맑은물의 이야기/맑은물의 이야기

그녀의 가을 편지 / 고종수

맑은물56 2010. 11. 4. 21:38

 

빚바랜 여름 뒤로 가을볕이 깊게 드리워지더니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길 서두르는 계절입니다.

늘 그렇듯 곧 또 보자고 하고선 약속 못 지켜 빚진 마음입니다.

한 달 가까이 대학 수시모집 서류 작성하는 것 도와주는라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가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나 심리적인 에너지가 소진한 탓인지 다른 여력이 없네요.

 

고3 담임선생님들의 워낙 바쁜데다

아디들 글 솜씨는 초라하고

거절 잘 못하는 성격에

조금 손봐준다고 끄적거린 것이 화근이 돼,

마무리 단계인 모의 면접까지 번져 제 코가 석 자였습니다.

 

좋은 대학에 대한 압박감,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읽혀져

차마 대충 해주지는 못하고 차의성과는 거리가 먼 녹슨 머리 썩혀댔으니 천직인가 싶기도 하고,

내색은 못하나 못마땅해 하며 마지못해 하며 마지못해 하는 제 꼴을 보면 영 아니 것 같기도 하고,

저와 코드가 맞는 몇몇 사위권 아이들로부터 <다음 윤리 수업 기대돼요.>라든가

학부모들로부터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평에 (비록 립 서비스일망정)

철학이 담고 있는 지적 매력을 접해야 그네들이 행복할 거라는

어줍지 않은 나름대로의 확신과 더 중요한 건 과목이 과목이니 만큼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륜이 묻어나는, 울림이 있는 좋은 강의를 하고 싶은 욕심에

가르치는 행위를 스스로 즐기고 있는 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어서

이 끈을 선뜻 놓지 못하고 있는 속내와

고등학교 근무의 매력은 교재연구 아닌가 싶은데

혁신학교니 연구학교니 교원능력평가니 입학사정관제 수시입학전형 등등

오히려 교육의 본질을 잃게, 잊어버리게 하는,

이래저래 코드가 다르니 이만 물러섬이 옳겠다 싶은

상반된 속내로 늘 마음이 뒤죽박죽 엉켜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 나이에도 어떤 한 부분에서 조차 프로패셔널이 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아마추어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

먹은 밥그릇 숫자가 헛 것은 아니었나하는 자책도!

직장에 직에 매이지 말고 엄마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라고 채근하는 아이는

천박한 삶과 천박하지 않은 삶의 잣대는

생각이나 언행, 차림새보다는 오히려

일만 하며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못을 박기에

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으로 되짚어 보게 됩니다.

 

희영님은

(교감선생님이라고 바꿔야 하는데.....지금은 호칭에 익숙해졌나요?)

자리가 자리인 만큼 가볍지 않겠어요.

요즘 같은 세태에 그 자리로의 승진이 진정 축하해야 할 일인지 마음쓰입니다.

 

조성옥교감은

<너는 교감 안하길 백번 잘했다고, 절대 못 견뎌냈을 거>라며 단언하는 걸보면

그 자리가 얼마나 머리 무거운지, 버거울지 짐작을 넘어 새삼 거듭 확인됩니다.

(제 능력의 한계와 분수를 정확히 아는 저 스스로도

오십 넘어 살면서 잘 한일 몇 가지 중에 우선순위로 꼽습니다.)

 

어려워도 남다른 마음 씀씀이로 버금리더로서의 자리 소신껏 해내고 계시지요!

아이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또 다른 부모가 되도록 노력하고 계시지요!

 

타인에 대한 호, 불호가 이미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뭇사람들 속에서 별반 행복하지 않은 저로서는

가족과의 관계, 몇몇 지인들과의 관계만으로 인간관계를 한정짓고

(법정스님 言대로 사람을 사귐엔 오로지 정신을 깊이 하는 일 말고는 딴 뜻을 두지 말아야,

한 때의 알고 지냄에 그치고 마는 범속한 사귐은 이내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니)

거창하지 않은, 주목받지 못하는 삶이어도

가족으로부터의 인정과 존중이 제대로 된 진짜의 삶이라고 자위하며

부모로서의 몫은 다른 무엇보다 자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소통, 함께해 주는 시간이라도 여기기에

가능한 바깥일 자제하며 지냅니다.

 

-사물의 몬질을 표현해내고자 우리가 그동한 쏟아 부어온 모든 노력은

모차르트가 세상에 나타나면서 곧바고 헛수고가 되어버렸다-는

괴테의 모차르트를 향한 극찬처럼 작곡을 업으로 하는 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저희 아이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꿈꾸고 있음이 자주 읽혀집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힘, 그 강한 매력에 흡입돼

심한 감정의 기복으로 사소한 일에 조차 극도로 디테일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의 성정을 닮을까봐,

즐기고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 이미 자기 자신과 한 몸이 되어 있는 아이의 존재 의미를 규정지은

音樂이 역설적으로 그 아이르 옭아매게 될까봐 저는 勞心焦思하나

 

아이는 누가 건드릴 수조차 없는 태생의 旅遊 自酌함으로

자기에게 창작은 苦가 아닌 樂이니 고통이나 불행을 지레짐작해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곡을 쓰기 위한 베이스로 철학책과 세계사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물론 제대로 된 공부이니 말릴 수 없지만 아직 대학을 못 들어간 상황에서

입시와는 동떨어진, 실기에 올인 해도 다 해내기 어려운데.....)

투자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잘해댜 후년 정도 입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서 빨리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할 텐데.....

바둑도 공부도 독학한 탓에 십년 세월을 집안에서 가둬두고 키웠으니

큰 허물로 드러날 게 미루어 짐작돼 마음 편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 덕분에 호사를 누리기도 합니다.

홀로만의 시간 속에 갇혀 산 숱한 고독감의 표출인지, 내공인지

아이가 쓴 습작들의 선율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라도 한 듯,

제법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귀 기울여보면 늘그막으로 가는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가슴 설레임도 있고, 중년의 나이에 걸 맞는 징한 눈물 훔치게 하는 가슴 먹먹함도 있습니다.

 

<음악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위한을 주는 게 자기가 생을 사는 단 하나의 이유이며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자신의 행, 물행의 차원이 아니라고>

아이는 다행히 제 능력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쓰여야할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나봅니다.

 

보름 전에 잠자다 침대에서 떨어져 오른 쪽 귀 고막이 찢겨 응급치료 받았습니다.

(인위적인 봉합보다 자연 치유되는 걸 권해서 날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온 신경을 귀에만 집중했었기에 청각의 이상은 치명적 손상임을 감지할 텐데도

걱정하는 내색 없이 한 술 더 떠

 

<나는 모차르트를 너무 닮고 싶은데 베토벤을 닮게 됐다고

한번쯤은 겪어 볼만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고

답답하긴 해도 한쪽 귀로만 들으니 또 다른 세상이라고

양쪽 귀 다 들리기 전에 서둘러 곡을 써야겠다고

靈感의 원천,

創作의 이유와 과정은 너무 복잡해서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성공 여부를 떠나 어떤 한 가지에 혼을 다 바쳐

진지하게 고민하며 제가 지닌 에너지를 다 뿌린 사람만큼

예쁜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속되지 않은 思惟의 뜰을 품었으니!

 

조각공부하는 아이사촌 형은

音樂하는 이에게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려고

잘 안 들리게 해 소리에 더 집중하게, 더 간절하게 하려고

주님께서 베푸신 기회며 은혜라고!

무슨 因果인지!

 

신의 섭리가 맞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어깨나 얼굴 등 다른 外傷은 전혀 없는데 고막에만 이상이 생긴 것

꽤 많이 찢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신경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의사도 의외의 경우라며 거듭 검사를 하곤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제 아이일로 올케와 조카는 내내 새벽기도 드린다는데

저는 <한쪽 귀만 다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속 祈禱드린 게 고작이니,제 신심의 한계이고

진실한 크리스챤들을 곁에 둔 人福많은 자의 섣부른 자만이겠지요.

 

자유롭게 태어난 마음이란

결코 노예처럼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설사 자유를 잃는다 하더라도d을

그 긍지만은 간직한 채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법입니다.

- 모차르트 -

 

아이가 좋아하는 글귀인데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이 空間에서의 닫힌 일상에 염증을 느낀 탓인지

엄두도 못 내지만 10대의 反抗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치기인지

점점 더 시간에 얽매이게 되는 노예스러워짐에 대한 스스로의 慰安인지

저에게도 내내 꽂히네요!

 

철학도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든

제 발부리 내려다보게 되고

제 삶에 대해 스스로 묻게 되는 思索의 계절임을 핑계로

두서없는 글 드려 속만 시끄럽게 해드린 것 아닌지!

 

평생 철들 것(?) 아니 늙을 것 같지 않은 이미지의 희영님

늘 그 모습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

한결같으시길!

 

에서 멀어져도 우린 늘 서로에게 마음 보태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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