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의 남자 / 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 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한 지친 남자의 독백 .1 / 이승훈
아무나 만나고 싶은 날
아무나 만나
사랑하고 싶은 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웃고 싶은 날
그런 날
이 벼랑에서 함께
뛰어내리고 싶은 날
이 재의 가슴
활활 태우고 싶은 날
그런 날
아무나 만나면
따뜻이 안고 싶은 날
정겨운 날
눈물이 마악
쏟아질 것 같은 날
그런 날
한없이 살이 그립고
따신 가슴이 그리운 날
말라깽이 시쟁이
아아 갑자기
한량이 되고 싶은 날!
키 큰 남자를 보면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서정시를 쓰는 남자 / 이기철
바람 타는 나무 아래서 온종일 정물이 되어 서 있는 남자
정물이 되지 않기 위해 새들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고전적인 늑골을 들고 서 있는 남자
벽돌집 한 채를 사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시를 밤 늦게까지
쓰고 있는 남자, 아파트 건너 집 주인 이름을 모르는 남자.
담요 위에 누워서도 별을 헤고 백 리 밖 강물 소릴 듣는 남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개울물에 발목이 빠진 남자
주식 시세와 온라인 계좌를 못 외는 남자
가슴 속에 늘 수선화 같은 근심 한 가닥 끼고 다니는 남자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을 남자
거미줄 같은 그리움 몇 올 바지춤에 차고 다니는 남자
그 흔한 문학 강연회에 단골 초청 연사도 되지 못하는,
그 엄숙한 표정의 민중 시인이 되지 못하는 남자.
반정부 인사도 동서기도 되기에는 부적합한 남자
활자 보면 즐겁고 햇살 보면 슬퍼지는 남자
한 아내의 부채로만 살아가는 남자
가을 강에 잠긴 산그늘 같은 남자
버려진 빈 술병 같은, 지푸라기 같은 남자
서정시를 쓰는 남자.
술마시는 남자 / 장석주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 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남자의 등 / 김왕노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철모가 나뒹굴고 탄피가 흩어지고
청춘이 유배되어 와 절망의 자선어보나 꿈의 목민심서를 쓰다
모래가 된다
모래 바람으로 하늘을 뒤덮는다
먼 미지로 떠났던 것들이 한 줌의 모래로 날아와 버석거린다
명사산이 밤새 울고 누가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사막 가장 깊숙한 곳에 정박의 닻을 내리고
안식의 밤을 위해 푸른 달을 기다린다
온갖 탄생과 죽음이 모래언덕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의 어느 모퉁이에 무거운 등짐처럼 내려놓기도 한다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그래서 한없이 넓고 끝이 없다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참을 수 없는 구름이 흘러와 비를 내리면
수천 수만 마리 폐어가 깨어나 미친 듯 산란한다
그러다 다시 잠들면 꿈의 와디가 흐르다 사라지고
사라진 별과 바람과 꽃과 사랑이 다시 부활을 기다린다
암각화된 기린과 사자 온갖 야생동물이 어둠에 젖어 우는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그래서 자구 등이 가렵다고 하는 남자들
오늘도 진정한 사랑을 얻으려는 한 여자가
끝없는 목마름으로
그 먼 먼 사막을 외롭게 낙타로 건너가고 있다
다리를 떠는 남자/김기택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그는 명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사랑에 빠진 남자 /김형술
그는 대단히 단순하게, 쉽사리, 생각 없이 늘 사랑에
빠지곤 한다.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건 소묘시간 석고상
줄리앙에게였다. 살아 숨쉬듯 생생하게 그것을 백지 위
로 불러내보고 싶었지만 아름다운 처녀 미술교사는 한번
도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상대를 정확하게 보도록 해요. 눈을 감으면 안돼요.
비례는 엉망이고 구도는 불안정하며 음영이 우습도록 비
현실적이라는 거, 모르겠어요?
실망하지 않고 그는 다시 말과 사랑에 빠졌다. 그의 영
혼을 흔드는 것들, 이를테면 한밤중 텔레비전 화면 속의
노이즈와 늘 벽에서 뛰어내리는 시계, 거울 속에서 날아
나오는 나비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속삭이는 벽...... 따
위를 열정적으로 채집하여 바쳤지만 근엄하신 교수님은
한번도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말을 비틀지 말도록. 혼란스러운 이미지
들을 구체적으로 투명하게 형상화시키도록. 탄탄한 구조
를 가진 언어의 건축에 신경을 쓷록. 치열한 눈으로 세
상을 직시하여 나름대로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하도록.
그는 약간 지치고 의기소침한 데다 자신에게 심한 혐
오감마저 가져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사랑에 빠지지를
못했다. 문을 닫아걸고 어둠 속에 웅크려 곰곰 생각한 후
그는 결심했다. 컴퓨터를 사랑하기로.
가능한 모든 상상력과 끝없는 기억력을 가진 이 아름
다운 물건을 그가 사랑한 것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였으므로 마음을 다치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지
만 때로는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사랑을 받아보고 싶
어졌다. 하여 그는 모든 책들에서 기계처럼 비정한, 기계
처럼 무표정한,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기계처럼 무심한
...... 등등의 말들을 지웠다. 대신 컴퓨터와 춤추는, 컴퓨
터와 토론하는, 컴퓨터와 식사하는, 컴퓨터와 섹스하는
...... 등등의 말을 새로 적어넣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
을 이루기 위하여 마침내 자신이 컴퓨터가 되기로 결심
했다.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 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 뿐
눈에 띌까,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변학도.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빵을 가진 남자 / 신현림 |
먼 빛 속에서
출렁거리는 아침바다로 오십니다
창공을 흔들고 제 가슴을 치며
야생화보다 풋풋하게 오시는
당신은
해저같이 캄캄한 제 영혼이
끝없이 다다를 역입니다
인간이 결국
무덤이라는 둥근 빵을 얻기 위해 살듯
빵을 가진 마음처럼 둥그래져야겠지요
빵 속의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남자 / 김 기린
자기보다 조금은 과장하는 사람
그래야 멋인줄 아는 사람
그걸 진짜로 아는 사람
여자의 탯줄에서 태어나
여자의 젖줄에 매달린 사람
어차피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하면서도 여자를 업신여기는 두 껍질을 가진 자
권위를 즐겨 먹고
순박을 뱉어 내는 자
단것을 좋아하고
쓴것을 싫어하는 자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자
세상에서 제가 제일 못난 자
그런 사람끼리 경쟁하는 사람.
상처를 가진 남자 / 문정희
다리미질 하는 아내 곁에서 아직도
잉크로 원고를 쓰는 사람,
오에 겐자부로
세계는 그를 노벨상 작가라 부르지만
그를 키운건 문학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아들이었음을
어젯밤 뉴스에서 보았다.
뒤뚱거리는 불구 아들의 손을 잡고
험준한 산봉우리 오르는 동안
장애아들을 이끄는 아버지의
그 통렬한 힘으로 자신은
저절로 봉우리에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학이라 부르지만
그는 깊은 상처를 가진 적은 있다고
그것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빵을 가진 남자 / 신현림
먼 빛 속에서
출렁거리는 아침바다로 오십니다
창고을 흔들고 제 가슴을 치며
야생화보다 풋풋하게 오시는
당신은
해저같이 캄캄한 제 영혼이
끝없이 다다를 역입니다
인간이 결국
무덤이라는 둥근 빵을 얻기 위해 살듯
빵을 가진 마음처럼 둥그랭야겠지요
빵 속에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반죽하는 남자 /권이영
그 남자가 반죽을 하고 있네
심심하고 출출한 짐승이 되어
마누라와 애들의 핀잔을 들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밀반죽을 하고 있네
꾹꾹 뭉쳤다가 잡아늘이고
이 모양 저 모양도 만들어 보다가
도마 위에 쾅쾅 내려치네
손바닥이 흥분하고
팔과 어깨 심줄도 흥겨워져서
여기 저기 밀가루가 허옇게 묻어도
콧노래를 부르며 반죽을 하고 있네
저러다가 곤죽을 만들겠네
만사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은 남자가
세상도 마누라도 제대로 못주무르는 남자가
오늘은 마구 주무르고 있네
주물다가 쾅쾅 내려치기도 하네
쾅쾅 내려치기도 하네
그 남자의 방 / 류인서
몸에 무수한 방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햇살방 구름방 바람방 풀꽃방
세상에, 남자의 몸에 무슨 그리 많은 방을
그 방 어느 창가에다 망상의 식탁을 차린 적 있다
안개의 식탁보 위에 맹목의 주홍장미 곁에
내 앙가슴살 한 접시 저며내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의 방을 기웃거리다 도리어
내 침침한 방을 그에게 들키던 날
주름 깊은 커튼자락 펄럭, 따스한 불꽃의 방들 다 두고
물소리 자박대는 내 단칸방을 그가 탐냈으므로
내게도 어느결에
그의 것과 비슷한 빈방 하나 생겼다
살아 꿈틀대던, 나를 들뜨게 하던
그 많은 방들 실상, 빛이 죄 빠져나간 텅 빈 동공
눈알 하나씩과 맞바꾼
어둠의 가벼운 쭉정이였다니, 그는 대체
그동안 몇개의 눈을 나누었던 것일까
그 방 창이 나비의 겹눈을 닮아 있던 이유쯤
더이상 비밀이 아니구나, 저벅저벅 비의 골목을 짚어가던
먼 잠 속의 발걸음 소리도 그의 것이었구나
뜨개질하는 남자 비단뱀 장수 / 유형진
남자는 비단뱀 장수
소금을 파는 비단뱀 장수
남자의 여자는 검게 그을린 부뚜막 앞의 청상과부다
남자는 비단뱀을 꼬아 뜨개질을 한다
남자가 뜨는 옷은 부뚜막 위의 곶감처럼 익어간다
남자가 뜨는 옷은 어떤 지옥보다 뜨겁다
남자는 이대로 뜨개질하는 남자가 되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는 비단뱀 장수
소금을 파는 비단뱀 장수
남자의 여자는 남자가 파는 소금을
한 번도 사준 적이 없는데
남자가 떠준 옷을 입는다
여자의 남자는 비단뱀 장수
소금을 파는 비단뱀 장수
비단뱀 꼬아 뜨개질하는
소금을 파는 비단뱀 장수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 여태천
당신과 함께 하는 저녁
자장면 그릇에 침이 고인다.
흘러서 그것은 추잡하고
흘러서 그것은 외롭다.
면발처럼 긴 저녁을
참고 또 참으면
머릿속의 침은 마를 것인가?.
당신 앞에서 언제쯤
신문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주워섬기며
잘 이어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나무젓가락으로 단무지를 들었다 놓았다
춘장을 찍었다 말았다, 하면서
나는 빈 그릇을 덮을 신문지를 생각한다.
잠자는 남자 / 류인서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바람에 한번 뺨을 맞아보려 한다
심술궂은 놀부네 나무주걱 같은 바람이
따악, 하고 후려친 얼얼한 뺨에 돋는 밥풀 같은 별을 볼 수 있다면
그는 가슴에 새도 한번 길러보려 한다
새모이로 공깃돌만한 밥을 입에 밀어넣고서
오랜 실업의 증거인, 늑골 아래 녹물 소리처럼 흐르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직업적인 침대가 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일거리인 잠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느려터진 달팽이시간이 귓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침대
어쩌다 밖에서 사람들 눈에 뛸 때면, 아파트 옆 공터에서 반으로 접힌 채 노숙하는 침대
비를 피하기 위해 느티나무 옆 창고 처마 밑으로 자꾸 등을 들이미는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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