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강원도 정선 아리랑

맑은물56 2010. 4. 8. 11:41

강원도 정선 아리랑



     

     

           
           
                        
          긴 정선 아리랑


          
          눈이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구싶어 지나 
          정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싶어 가나
          아침 저녁에 돌아가는 구름은 산 끝에서 자고 
          예와 흐르는 물은 돌부리에서 운다 
          일년 일도에 감자 꽃은 삼재팔난을 적는데 
          대한의 청년 남아는 만고풍상을 다 적네 
          산천에 올라서 임 생각을 하니 
          풀잎에 매디매디 찬 이슬이 맺혔네 
          정선 앞 조양강물은 소리없이 흐르고 
          님향한 충절은 변함이 없네 
          봄철인지 갈철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행화춘절이 날 알려주네 
          무릉도원 삼산호수에 도화는 만발했는데 
          짝을 잃은 외기러기 갈곳이 없구나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네날 짚세기 육날미투리 신들매 짤끈 매구서 
          문경새재 넘어가니 눈물이 팽팽 도네 
          돌담 넘어 밭 한뙈기를 건너가면 되련만 
          얼키고 설키었으니 수천리로구나 
          비봉산 한중 허리에 두견새가 울거든 
          정든님 영혼이 돌아온 줄 알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旌善) 아리랑 지정번호 :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 1971년 12월 16일 소 재 지 : 정선군 일원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分布)되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旌善) 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조선조 초기(朝鮮 初期)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 (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 하다가 정선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 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心 情)을 한시로 읊은 것이 지금에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그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悲痛)한 심정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 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 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한일 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에는 나라없는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思想)이 담긴 노래는 탄압(彈壓)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情恨)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 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 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民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