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문화원의 원고청탁에 응하여 이퇴계선생님의 시와 노래에 관한 단상을 도산십이곡 발문에 나타나는 몇 구절을 중심으로 논해 보았다. 이 글은 안동문화원 발간 '안동문화' 제17집(2009. 12월)에 실려있다.
퇴계(退溪)와 시가(詩歌)
평생을 경건· 성실하게 생활하셨던 퇴계 이황 선생! 출사(出仕)와 사직(辭職)을 거듭하면서 성(誠)과 경(敬)으로 일관하셨던 선생은 그의 저술만 보더라도 주자서절요, 연평답문(延平答問), 성학십도, 경서석의(經書釋義), 계몽전의(啓蒙傳疑), 이학통록(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義), 상례문답(喪禮問答) 등 주로 성리학과 예법에 관한 엄숙한 글들이 즐비하다.
따라서 칠십년에 걸치는 삶의 역정 가운데 여가(餘暇)를 보내는 현자(賢者)로서의 자태-특히 시가(詩歌)에 관한 태도를 자세히 고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칫 성실 근엄하며 무미건조한 도학자라고만 인식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先生이 고향에 내려와 조정(朝庭)에 나아가지 않겠노라 뜻을 굳히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도 청량산을 유관(遊觀)하곤 하시던 모습을 살펴보면 자못 유유자적한 멋과 문예적(文藝的) 취향이 많이 엿보인다.
그 가운데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도산십이곡 발문(陶山十二曲 跋文)에 나타나는 음악교육관에 에 관한 것이다. 퇴계는 도산(陶山)에서 66세경에 유명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다. 조선조 선비들이 한문으로 된 시를 읊고 글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다반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평생 한두 수 정도, 시조시(時調詩)를 짓곤 한다. 그런데 퇴계는 이천여 수에 육박하는 방대한 한시를 지은 외에, 순수한 우리말로 된 열두 곡(曲)의 연작시(聯作詩)를 지어 고불 맹호연과 농암 이현보 선생의 강호시가(江湖詩歌)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도산십이곡은 선생의 설명과 같이 전6곡(前六曲)은 뜻을 말했고 후6곡(後六曲)은 배움을 말한 연시조(聯時調)이다.
그런데 도산십이곡 발문(跋文)을 자세히 읽어보면, 선생은 시작(詩作)만 한 게 아니라 그것을 노래하고 춤출 수 있게까지 하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생은 우리나라 국악사와 무용사에도 특별한 자취를 남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먼저 도사십이곡 발문(이하 발문이라 기재함)의 주요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편의상 여섯 문단을 나누고 가급적 직역으로 새겨 보고 그 뜻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1) (도산)노인[퇴계선생]이 이를 지은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저 음난함이 많아 족히 말할 수 없다. 저 '한림별곡'의 류와 같이 문인(文人)의 입 기운(口氣)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 방탕하고 겸하여 설만(褻慢) 희압(戱狎)하니, 더욱 군자가 마땅히 숭상할 바 못 된다.
老人之作此 何爲也哉 吾東方歌曲 大抵多淫 不足言 如翰林別曲之類 出於文人之口 而矜豪放蕩 兼以褻慢戱押 尤非君子所宜尙
2) 다만 근세에 이별(李瞥)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성히 전(盛傳)한다. 오히려 저것[六歌]이 이것[한림별곡]보다 좋음이 되지만, 역시 그 가운데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음이 아깝도다.
惟近世有李鼈六歌者 世所盛傳 猶爲彼善於此 亦惜乎其有玩世不恭之意 而少溫柔敦厚之實也
3) 노인이 본디 음률을 아지 못하나, 오히려 세속의 음악을 듣기를 싫어할 줄은 아는지라, 한가히 거처하며 병을 요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성정(性情)에 느낀 바 있으면 매양 시로써 나타내었다.
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性情者 每發於詩
4)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으나, 노래할 수는 없다. 만일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대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所不得不然也
5) 그러므로 내 일찍이 이씨(李氏)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지(志)를 말하였고, 그 둘은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익혀 노래 부르게 하여 비기어 듣기도 하며,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게 하여, 거의 비인(鄙吝)함을 씻고 융통(融通)함을 느껴 피어나게 하여,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이익됨이 없지 않게 하고자 한다.
故嘗略倣李歌而作 爲陶山六曲者二焉 其一言志 其二言學 欲使兒輩朝夕習而歌之 憑而聽之 亦令兒輩自歌而自舞蹈之 庶幾可以蕩滌鄙吝 感發融通 而歌者與聽者 不能無交有益焉
6) 돌이켜 생각하건데, 나의 자취가 자못 어긋난지라, 만약 혹시 이와 같이 한가한 일로 인하여 시끄러움의 단서를 야기할지는 아지 못하겠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에 들어가고 음절에 맞는지 여부는 믿지 못하겠다.
顧自以跡頗乖 若此等閑事 或因以慝起鬧端未可知也 又未信其可以入腔調諧音節與未也
전체의 대의를 본다면,
1)은 당대 선비들이 부르던 노래는 한림별곡류인데 방탕하고 교만하여 취할 수 없다는 개탄이다.
2)에서는 이별의 六歌는 다소 품격이 있으나, 역시 불공스럽고 온유돈후의 기풍이 적다. 온유돈후는 서주(西周) 초기와 춘추시대 열국(列國)의 시가(詩歌), 즉 ‘시 삼백(詩三百)’의 아름답고 후덕한 기상을 말하며, 후세 당(唐)나라의 이태백과 백낙천이 숭상하여 자신의 시에 이 고풍(古風)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송대(宋代)에 일어난 고문회복운동의 하나의 목표가 된 시풍(詩風)이다. 이별(李鼈)은 박팽년의 외손이요 이공린(李公麟)의 아들인데, 가형(家兄) 이원(李黿)이 갑자사화에 사사(賜死)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둔 자적하여 장육당(藏六堂)이라 호(號)하며 표일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그의 六歌 가운데 다음의 한 수를 음미해 보더라도 강호에 앉아 오세자득(敖世自得)하는 은자의 기풍이 넘친다.
적엽만산초 공강영락시 赤葉滿山椒 空江零落時
세우어기변 일간진미자 細雨漁磯邊 一竿眞味滋
세간구리배 하필요상지 世間求利輩 何必要相知
(붉은 잎 산초나무에 가득하고 빈 강 쓸쓸할 때,
이슬비 내리는 바위 낚시터에서 고기잡이 하노라니,
한 자루 낚싯대에 참 맛이 넘치누나.
세간의 이끗 찾는 무리야 어찌 꼭 서로 알려 할까보냐.)
실제 그 기상이 자못 도가풍(道家風)이면서 출세자를 능멸하는 뜻이 있어 퇴계가 오세불공하다 한 것 같다.
다음 3)은 자신이 음률에는 밝지 못하나 세속의 저속한 음악은 듣기 싫어했고 여가에 한정(閑情)이 일어나면 시를 짓곤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시를 말한 것인데, 사실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시경의 시들도 노래였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공무도하가, 황조가, 향가, 고려속요, 장가, 단가, 경기체가 등 시에는 모두 ‘노래 가(歌)’ 자(字)가 붙는다. 고대의 악이란 시가와 춤을 총칭한 개념이다. 樂記에서도 詩言其志也,歌詠其聲也,舞動其容也。三者本於心이라 하고 있다.
4)의 글은 3)에 이어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옛 시는 바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특히 시경(詩經)의 성격을 말하는 것 같다. 시경의 ‘풍ㆍ아ㆍ송(風雅頌)’이 음악을 전제로 한 노래 가사였다는 것은 이미 주자(朱子)가 밝혔으므로, 퇴계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시는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은 한시(漢詩)를 말하는 것이겠다. 한시를 지을 때 비록 운율을 맞추나, 평측(平仄)과 압운에 그치고 시창(詩唱)이 있지만, 지금 칠언율시의 창법만 전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한시를 노래로 불렀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발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도 읊조리기는 하였으므로 오늘의 시낭송보다는 음악적 효과 있었다고 여겨진다. 시낭송의 경우 음악적 효과를 내기 위하여 배경음악이 삽입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보아도 시와 음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당신께서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시’를 짓기 위하여 (시의 구조와 성격은 이별의 六歌를 본받되) 두 개의 六歌로 된 연작의 한글로 이루어지는 시조시를 짓는다는 취지이다.
5)에서는 드디어 12곡을 완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학문에의 뜻을 다지며 배움을 계속해 나가는 정성[言志 言學]을 담았는데, 이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고 심지어 춤도 따라 추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것은 노래의 가락과 장단이다. 그리고 대상인 아이들이 과연 누구인가이다. 본고에서는 주로 음악적 측면을 고찰하므로 논의에서 제한다. 동자[兒輩]들이 조석으로 불렀다하나 어떤 방식으로 불렀는지는 미상하다. 다만, 한시로는 읊조릴 수 있을지언정 부를 수 없고 [可詠而不可歌], 그것은 우리의 정서를 기르고 감정을 푸는데 부족하다는 논점이다. 비루하고 인색한 정서를 씻어내 정화시키고 감정이 피어나고 나타나게 하여 무르녹아 통하게 하는 것은 노래의 공로라는 것이다. 이는 인격함양과 정서순화에 미치는 음악의 교육적 효능을 직설한 중요한 발언이라 하겠다.
6)의 글은 두 가지 겸허한 우려를 담았는데 하나는 당시의 문자(文字)를 버리고 이언(俚言) 즉, 통상에 사용하는 우리 말 그대로를 가지고 시를 지었다고 학자들이 일으킬지 모를 비판이며, 또 하나는 당신이 음악에 능하지 못하는데 자신이 지은 시, 즉 노래가 음악의 절조에 맞을는지 걱정된다는 것이다. 이상 도산십이곡 발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았는데, 문학이나 음악, 교육학적으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견해가 발견된다.
첫째, 퇴계선생은 음악에 비록 이론적으로 밝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음악의 의의와 효용성은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예기 악기편(禮記 樂記篇)에 “성(聲)을 아는 것은 금수요 음(音)을 아는 것은 보통사람이며 오직 군자라야 음도 알고 악도 안다[唯君子 審音而知樂]”, 곧 음악을 안다하였는데,
樂記; 是故知聲而不知音者,禽獸是也;知音而不知樂者,眾庶是也。唯君子為能知樂。
是故審聲以知音,審音以知樂,審樂以知政,而治道備矣.
여기서 성(聲)은 음가(音價)가 없는 단순한 소리(noise)이며 음(音)은 음가를 지난 소리(note)이다. 음악을 모른다는 것은 선비로서 결코 자랑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치세함에 풍속을 바꾸는 것은 음악보다 좋은 게 없다(移風易俗 莫善於樂 ― 공자)”고 도 한다. 공자께서도 음악으로써 인격 또는 정치를 완성한다(成於樂)하셨고 거의 매일 노래를 부르고 금(琴)을 연주하신 것은 논어에 잘 기록되어 있다. 아동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만족해하는 모습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음악의 중요성을 퇴계는 깊이 터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로부터 시와 노래는 동일체였다는 것이다. 지금같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에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로 시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퇴계는 시조 12수를 지었는데, 六歌를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발문의 내용으로 보아 읊조리는 정도라 생각한다(한시이므로). 그리고 시조는 노래할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부르는 것이 풍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당시에 선비들이 한림별곡 등의 경기체가를 많이 부르곤 했는데, 퇴계는 이 노래를 싫어했고 시조의 음률에 온유돈후한 시풍을 붙이는 시조음악을 선호하였다는 사실이다. 경기체가에는 한림별곡, 죽계별곡 등이 있는데 고려 중기이후에 유행하고 조선조 후기에는 쇠퇴한 사대부의 시가이다.
넷째, 퇴계는 음악, 특히 우리나라 말로 된 가사로 노래하는 것을 중요한 교육방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노래를 통하여 흥미를 가지고 학업에 취미를 일으키고 노랫말 즉, 도산십이곡이라는 훌륭한 시가 전달하는 교육적의미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야말로 공자의 ‘흥어시(興於詩)’의 가르침을 멋있게 적용하였다. 시조 또는 가사라는 노래의 교육적 가치를 농암과 퇴계는 잘 이해하였다. 다만, 이것이 후학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성리학적으로만 퇴계학이 발전해 나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다섯째, 퇴계께서 가르치고 흐뭇해 한 도산십이곡의 노래 가락과 장단, 춤 사위가 과연 어떠했느냐가 자못 궁금하고 흥미롭다. 경우에 따라 이것은 국악의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춤은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친히 활인심방을 편찬하고 연마한 사실로 볼 때 퇴계가 도인술(導引術)이나 무도(舞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유추될 수 있는데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노래에 관한 문제는 다소 전문성을 요하므로 보다 세밀히 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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