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법에 담긴 진리

石門頌 예서작품 春靜曲堂垂麗日 秋經空谷历寒霜

맑은물56 2009. 11. 23. 15:47

 

石门颂 集联

 

 

  민승준 작품   40 *110   石门颂 集联

 

  春靜曲堂麗日

  秋經空谷寒霜

 

 석문송은 東漢 建和 2년(서기 148년)에 섬서성 褒斜谷 石門 암벽을 갈아서 쓴 마애석각으로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무려 6cm에 달하는 큰 글씨의 古拙美가 넘치는 예서이다.

 작자는 미상이고 王升이 撰했다고 전해진다. 


동한 말기는 서예사에서 또 한 차례의 중흥기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서예가와 서예이론가들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분한예의 명석지서가 완전히 성숙함과 동시에 각종 풍격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위부인의 <필진도>를 보면

 필력이 좋은 자는 골력이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하는 자는 획에 살점이 많다.

골력이 많고 획에 살점이 적은 것을 근서라 하고, 획에 살점이 많고 골력이 적은 것을 묵저라고 한다.


<석문송>은 골력이 많고 살점이 적으며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글씨로 근력으로 골력을 나타낸 대표적이다. 

 용필에서는 조세가 변화가 매우 미묘하며 흔히 보여지는 한예와는 차이가 있다.

필봉을 암암리 전환하는 법과 파동이 곡절하는 형태는 일종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 방필과 다르며 또한 일반적인 원필과도 다르다.

 제안돈좌의 표현이 매우 은근하고 간략하나 곳곳에서 중우하고 혼박한 정취가 나타나

 스스로 천기를 이루고 있다.


뱀이 기어나는 듯한 행필을 채용하여 붓끝에서 호매하여

 구속 받지 않는 듯이 넘쳐 흘러 자연스럽게 스스로 방종했다.

 이처럼 변화무궁하고 의취를 얻어 자유자재로 붓을 휘둘러 형체를 이루었으나

조금도 조작된 느낌이 없어 야일소방한 일파를 이루었다.
 
<석문송>은 한예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다.

장조익의 발문에서 "300년동안 한 비를 스승으로 삼은 자가 많았으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자는 없다.

 대개 웅혼하고 자유분방한 기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울 수가 없고,

 필력이 약한 자 또한 배우기가 어렵다."라고 했다.

 

 

全称《汉司隶校尉楗为杨君颂》.又称《杨孟文颂》。

东汉建和二年(148年)十一月刻,摩崖隶书。

20行,行30、31字不等,纵261厘米,横205厘米。藏汉中博物馆。

它卷镌刻在古褒斜道的南端,即今陕西汉中市褒城镇东北褒斜谷古石门隧道的西壁上。

内容为汉中太守王升表彰杨孟文等开凿石门通道的功绩。文辞为王升撰。

此摩崖刻字书写较随便,不刻意求工而流露出恣肆奔放、天真自然的情趣,为后世书家所珍爱。

 

北魏郦道元《水经注·沔水》云:

“褒水又东南历小石门,门穿山通道,六丈有余。刻石,言汉明帝永平中,

司隶校尉楗为杨厥之所开”,这是有关《石门颂》的最早记载。

郦道元精于古历史地理之研究,为世所公认,但疏漏失察之处,也在所难免。

 

以上记载中就有两处失实:

一是颂文中因有“杨君厥字孟文”一语,郦氏便误以为这位杨君名厥字孟文。

后世不少学者沿袭郦说,不加深究,遂致以讹传讹。

如宋欧阳修《集古录》即从郦说,赵明诚《金石录》更将《石门颂》径称为《杨厥碑》了。

 

经过宋代洪适《隶释》一书的考证,才弄清此处的“厥”字,

实际是语助词,也可解释为“其”或“他的”的意思,并不是这位杨先生的名字。

洪氏引《华阳国志》所载,杨君实名涣,字孟文。

二是郦道元及其以后的许多人,以为古石门是杨孟文开凿的,这也与史实不符。

开凿石门之举,早在汉高祖刘邦时代就开始了,只是没有完成。

据石门的另一著名摩崖《鄐君开通褒斜道刻石》明确记载,

东汉明帝水平六年至九年(63~66),汉中太守鄐君最后完成了开通褒斜、石门的任务。

后因安帝初年屡遭战乱毁坏,石门阻塞不通。顺帝初年,经杨孟文再三奏请,才重新修复。

因此,杨孟文与石门之首次开通,没有直接关系。

 


 石 門 頌

 

동한말기는 서예사에서 또 한 차례 중흥기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는 한편으로 전문적인 서예가와 서예 이론가들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분한예(八分漢隸)의 ‘명석지서(銘石之書)’가 완전히 성숙함과 동시에

각종 풍격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나라의 팔분예서는 가장 휘황찬란한 정상으로 향했으며,

<석문송(石門頌)>은 그러한 정상에서 반짝 빛나는 구슬 가운데 하나였다.


<석문송>의 원래 이름은 <고사예교위건위양군송(故司隸校尉楗爲楊君頌>이며,

또한 <양맹문송(楊孟文頌)>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 새겼다. 

 이는 마애에다 새긴 예서로 왕승(王升)이 지었으나 이를 쓴 사람의 성명은 없다. 

모두 22행으로 행마다 30-31자씩 씌어졌다.  내용은 한나라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던

양맹문(楊孟文)이 석문(石門)을 뚫어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는 일을 적었다.

  이 작품은 섬서성 포성현(褒城縣)의 동북쪽 포사곡(褒斜谷) 석문의 벼랑이 있다. 

 이 작품은 한비(漢碑) 가운데 가장 종횡경일(縱橫勁逸)하고 기자호매(奇姿豪邁)하다.

 

 

 

善筆力者多骨, 不善筆力者多肉.

多骨微肉者謂之筋書, 多肉微骨者謂之墨猪.

多力豊筋者聖, 無力無筋者病

 

 “필력이 좋은 자는 골력이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한 자는 획에 살점이 많다. 

 골력이 많고 획에 살점이 적은 것을 근서라 하고, 획에 살점이 많고 골력이 적은 것을 묵저라고 부른다.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것은 좋은 글씨이고, 힘이 없고 근력도 없는 것은 좋지 못하다"

-위부인의 筆陣圖-

 

 ‘골력이 많고 살점이 적으며’, ‘힘이 많고 근력이 풍부한’ 글씨로

근력으로 골력을 나타낸 대표작이다. 

 

 용필에서는 조세(粗細)의 변화가 매우 미묘하여 흔히 보여지는 한예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필봉을 암암리 전환하는 법과 파동이 곡절하는 형태는 일종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 방필과 다르며 또한 일반적인 원필과도 다르다. 

 

추획사(錐劃沙), 옥루흔(屋漏痕)과 같이 표일하고 신기하며 중간은 풍윤하여

 비록 제안돈좌(提按頓挫)의 표현이 매우 은근하고 간략하나

곳곳에서 중우하고 혼박한 정취가 나타나 스스로 천기(天機)를 이루고 있다. 

 

 

 필력이 굳세고 침착한 것이 마치 오래된 등나무와 같아 곡절(曲折)하는 곳에서 강인함이 나타난다. 

뱀이 기어나는 듯한 행필을 채용하여 붓끝에서 호매하여 구속받지 않는 뜻이 넘쳐흘러

자연스럽게 스스로 방종했다. ‘中’, ‘道’자에서 전절(轉折)하는 곳은 붓을 들어 암암리 지나갔고,

‘靈’자에서는 한 모서리를 펴서 전절하여 내렸고, ‘圍’, ‘復’에서는 붓을 들어 종이를 떠나

허공에서 내려 필치가 끊어진 것 같으나 필의는 연결되었다. 

 

이처럼 변화무궁하고 의취를 얻어 자유자재로 붓을 휘둘러 형체를 이루었으나

 조금도 조작된 느낌이 없어 야일소방(野逸疏放)한 일파를 이루었다. 

 

조형은 크고 넓으면서 표일하며 대소와 종횡의 변화가 많고

행렬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았다. 

 

 

 

《石门颂》的艺术成就,历来评价很高。

其结字极为放纵舒展,体势瘦劲开张,意态飘逸自然。

多用圆笔,起笔逆锋,收笔回锋,中间运笔道劲沉着,故笔画古厚含蓄而富有弹性。

通篇看来,字随石势,参差错落,纵横开阖,洒脱自如,意趣横生。

《石门颂》为汉隶中奇纵恣肆一路的代表,素有“隶中草书”之称。

文中“命”、“升”、‘诵”等字垂笔特长,亦为汉隶刻石中所罕见。

《石门颂》对后世影响很大。

 

 예를 들어 ‘命’ ‘升’ 등의 글자는 세로획이 매우 길다. 

이는 한예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고 오히려 한간(漢簡)이 남긴 법으로

 ‘예서 가운데 초서[隸中草書]’라 할 수 있다. 

풍격은 심후하고 웅기(雄奇)하며 자유분방하여 한간의 노숙하면서도

 굳세고 거칠면서도 졸한 맛이 있어 일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별도로 천진한 예술효과를 갖추었다. 

 

 

杨守敬《平碑记》云:

“其行笔真如野鹤闲鸥,飘飘欲仙,六朝疏秀一派,皆从此出。”

 

 양수경(楊守敬)은 《평비기(平碑記)》에서

 “그 행필이 마치 들 학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떠돌다 변화하려고 하니,

 육조의 소수(疏秀)한 일파가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其行筆如野鶴聞鳴, 飄飄欲化, 六朝疏秀一派皆從比出

 

 <석문송> 마애석각의 풍격과 기도(氣度)는 한비에서는 둘도 없는 것으로

 한예의 경일호상(勁逸豪爽)한 서풍을 열어주었다.

 

清张祖翼跋此碑云:

“然三百年来习汉碑者不知凡几,竟无人学《石门颂》者,盖其雄厚奔放之气,

胆怯者不敢学,力弱者不能学也。”

 

<석문송>은 한예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다. 

장조익(張祖翼)은 발문에서

 “300년 동안 한비를 스승으로 삼은 자가 많았으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대개 웅혼하고 자유분방한 기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울 수 없고

필력이 약한 자 또한 배울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비는 장봉(長鋒)으로 종이에 강한 필력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손과 마음은 너그럽고 붓끝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형세를 얻어 필봉에서 묘한 변화를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