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3일 서울대 교수 124여명과 중앙대 교수 68명이 시국선언을 했고, 연세대 교수들도 다음 주쯤 시국선언을 하기로 하고 서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전국 100여 개 대학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약칭 민교협)도 꿈틀거리고 있구요.
1970년대 유신시대와 80년대 군부독재 하에서 저항의 기폭제가 됐던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른다는 것은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그만큼 어둡고 암울하다는 반증입니다. 이는 시국선언에 동참한 교수들이 이날 '민주주의 후퇴'를 가장 핵심적인 문구로 내세웠던 것만 봐도 능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몇명이 참여했나"라고 되물은 뒤 "124명"이라고 답하자, "서울대 교수가 전부 몇 분인지 아시나. 서울대 교수 총원이 1천70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라고 일축했다지요? 극소수 교수들만이 참여한 시국선언인만큼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그런 말인데요.
대한민국의 지성들이 뜻을 모아 내지르는 소리는 정작 듣지 않고 소리 지른 사람들이 몇 명이냐고 따져묻는 그 엽기발랄한 발상에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민심에 귀 기울이기보다 누구 돈으로 촛불을 샀는지 보고하라고 다그쳤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졸개다운 대응 아닙니까.
흥미로운 것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제시한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 숫자가 서울대 교수 총원 대비 몇%' 라는 식의 셈법이 어디서 비롯됐느냐는 겁니다. 청와대가 선호하는 조중동 세 신문의 시국선언 관련기사를 살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런 셈범을 곁들여 소개했더군요.
<조선> - "서울대 전임교수 2300여명 중 120여명은 3일 오전..."(입력 : 2009.06.03 11:06)
<동아> - "서울대에는 정·부교수와 전임강사 등을 포함해 총 1761명의 교수(올해 2월 기준)가 있다."(입력 2009-06-03 10:45)
어떻습니까?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일어나자마자 대뜸 '전체 몇 %냐?'를 따지는 두 신문의 짐승같은 순발력이? 그런데 보다시피 <조선>은 '2300'이고, <동아>는 '1761'입니다. 게다가 입력시간도 <동아>가 앞섭니다. 띠라서 청와대가 언급한 "1700명"은 <동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네티즌들 가운데는 "서울대 전임교수 2300여명 중 120여명은..."이란 <조선> 기사만 인용하고서 "청와대가 <조선>만 보고 정치했다"는 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던데, 이번 건은 <조선> 대신 <동아>를 넣어야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봤자 그 놈이 그 놈이지만. 암튼 전후를 따지면 사정이 그렇단 얘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습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입니다. <조선>은 4일자 지면에서 서울대와 중앙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사회면(A10) 사이드에 조그맣게 배치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사라는 뜻이지요. 그러면서도 사설에서 이를 별도로 다루는 희한한 편집을 선보였습니다.
대개 사설에서 다루는 주제는 1면톱의 기사와 호응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사회적 파장이 크고 중요성이 높은 기사는 스트레이트와 더불어 에디토리얼로 다시 여론을 환기시켜주는 것이 관행이거든요. 그 점에서 사회면 사이드 기사 배치와 사설의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언밸런스라 할 밖에 없습니다.
사설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 웃깁니다. <조선>은 "서울대 교수 선언문이 법적·도덕적 허무주의를 드러냈다"고 비난합니다. 한 나라의 최고 지성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 수뢰사건에 대해 분명한 가치판단을 내려야 할텐데 수사 절차상의 문제점만 전면에 부각시키고 실체적 진실은 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조선>은 사설 말미에 "사회가 둘로 쪼개져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때 일부 대학교수들마저 이를 부채질하고 나선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미래가 없다"느니 "대한민국의 선진화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느니 하며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개탄.한탄.통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당시 "시국선언이 잇따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운행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뜻"이라며 "이 같은 목소리가 정부에만 들리지 않는다면 국가의 장래는 깜깜하고 국민의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부추기던 것과는 딴판 아닙니까?(사설, '혼돈의 시대에 다시 울리는 敎界의 목소리', 2004.09.17)
한기총 등 보수단체가 노무현 정부에 반대해서 시국선언 하면 무조건 그를 귀담아 들어야 비로소 국가의 장래가 밝고, 서울대학 교수들이 이명박 정부에 반대해서 시국선언 하면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담해진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선악의 이분법은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 것일까요?
손가락을 들어 달을 보랬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탓하더란 말이 있습니다만, 지금 이명박 청와대와 <조선>이 하고 있는 짓이 딱 그 짝입니다. 민주주의가 현저히 후퇴하고 전임 대통령마저 정치적 타살당하는 비극적 상황을 우려하며 교수들이 시국선언 했더니 그를 비웃고 힐난하는 꼴이라니...!
이명박 대통령이 민심은 보지 않고 조중동만 보고 정치한다는 세간의 냉소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지요.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환부를 도려내라는 의사의 처방이나 다름 없는데, 그를 무시하고 귀 막으면 그 다음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 하였거늘...! (200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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