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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매화월영(梅花月盈) 둥근 달아래 핀 매화

맑은물56 2008. 12. 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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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월영(梅花月盈) 둥근 달아래 핀 매화

窓下數枝梅(창하수지매)

창 아래엔 매화나무 여러 가지 뻗어 있고

 

窓前一輪月(창전일윤월)

창 앞에는 둥근 달이 둥실 떠 있네.

 

淸光入空査(청광입공사)

맑은 달 빛이 빈 사립문에 흘러드니

 

似續殘花發(사속잔화발)

남은 꽃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듯 하네.

                                              박제가(朴齊家)

 

박제가(朴齊家)의 매화월영(梅花月盈)에서는 창밖에 핀 매화와 달, 달빛의 어루만짐에 의하여 계속 피어나는 매화꽃을 읊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북학파(北學派)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초정(楚亭)이다.

출생 때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시(詩)·서(書)·화(畵)로 명성을 얻어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학문을 배워 선진 문물을 본받아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역설하였다.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읽고 정약용등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었다.

무려 네 번의 청나라 갔다 왔으며 돌아오자마자 흉서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곧 죽었다.

 

그의 글씨는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의 문인화풍으로 산수 및 인물화로 생동감 넘치는 꿩과 물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참고-박제가의 매화 한시로 다시 보는 역사기록

지금 MBC에서 절찬리에 방송되는 드라마 이산(李祘-조선 22대왕 정조의 이름)은 조선조 27명의 왕중에서 가장 개혁을 주장한 임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재임 24년 만에 할아버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절후(癤候-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 등창의 일종)병으로 고생했는데 그날도 병을 치료를 받은 후 바로 죽은 것이다. 수은(水銀)중독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의술로서도 등창은 쉽게 죽을병이 아닌 것이다.

 

영조와 정조 때에는 벽파(辟派)와 시파(時派)의 두당파가 있었다. 벽파는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반대파이고 시파는 친 사도세자파인 것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인 탕평책(蕩平策)썼지만 벽파(辟派)의 술책에 넘어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처럼 벽파는 계속하여 세손인 정조까지 죽여 정권을 잡으려는 모략을 꽤한다. 정조의 첫 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는 천성이 착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정조의 어머니 혜빈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고.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지만 슬하에 소생이 없어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1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자 2남인 이공(李玜)이 왕위에 오르니 23대 순조임금이다.

 

그리고 정조를 독살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가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 사회는 세도정치의 탄압으로 경직되어 백성들은 경제 불황속에 허덕이게 된다. 현재 우리정치사회와 비슷하다.

 

그해 시파(時派)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사교(邪敎)인 천주교 신자들 200여 명을 처형하는 사회 혼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한다.

 

이에 도탄에 빠진 민중들은 각종 유언비어에 현혹하게 되고 불안이 팽배하게 되어 커다란 사회 갈등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1811년 12월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대규모의 반정부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제주도에서 양제해(梁濟海)가 난을 일으키고, 1815년에는 용인에서 이응길(李應吉)의 난, 등 소규모의 민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1817년 유칠재(柳七在) 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 (凶書事件)과 1819년 액예(掖隷) 원예(院隷)들의 반란과 1826년 청주 괘서사건(掛書事件)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출처 : 별난집별난맛(T.F.C)
글쓴이 : 洸逵(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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