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禮)에는 반드시 차(茶)를 올려야 한다.
법현스님
1. 차례란 무엇인가?
차례는 국어사전에 '음력으로 다달이 초하루, 보름, 또는 그 밖에 명절이나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간단한 낮 제사' 라고 나온다. 『삼국유사』<표훈대덕조(三國遺事表訓大德條)> 에는 충담(忠談) 스님이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경덕왕이 즉위한 지 24년(765년)되던 해 삼짓날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나랏일 걱정에 훌륭한 사람의 고견을 듣고자 처음에는 잘 차려 입은 스님을 모셔왔으나 거절하고 누더기를 입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이를 거듭 청해 모신 스님이 충담스님이었다.
충담스님은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차 끓이는 도구와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년 삼짓날(3.3)과 중굿날(9.9)에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님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오는 길이라 했다. 충담스님에게 차를 청해 마신 뒤 충담스님이 '찬기파랑가'라는 향가(鄕歌)의 저자라는 것을 알고 나라를 편안케 하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충담은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어미라/ 백성을 어린아이라 여기니/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하리." 라는 내용의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그것이 다도(茶道)의 비롯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서 충담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모두들 '다도(茶道)' 또는 재주 예자를 써서 '다예(茶藝)의 효시'라고만 했지, 예도 예자를 쓴 '차례(茶禮)'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부처님께 차와 향을 올리고 절하는 것을 예불(禮佛)이라 하는 것처럼 충담스님의 그것도 차례라고 불러야 하리라.
차례의 효시는 충담스님의 미륵부처님께 올린 차례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명절에 지낸 차례도 결국 그 뿌리가 불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불교계 뿐만 아니라 유림이나 일반 가정에서도 차례를 지내는데 차를 쓰지 않고 있다.
2. 차례에 관한 불교와 유교의 의식
이렇게 차례가 성행했으나 경제적 이유와 함께 의식의 엄숙함이 복잡함으로 인식된 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절에서 지낼 때도 스님이 어려운 내용을 대신 읽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기존의 제례문(상용영반, 관음시식, 화엄시식, 종사영반 등)을 가지고 추석과 설 명절 차례도 지냈기 때문에 불교에는 차례의식이 없는 듯이 여겨진 것이다.
유교의 제사에도 차를 쓰는 것이 바른 예법이라고 한다. 유교 예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주자(朱子: 1130-1200)가 차와 관련이 있는 고장에서 생활했고 뒷날 명나라의 구준(丘濬)이 편집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차를 쓴다고 적혀있다. 또한, 우리나라 유가의 다례는 주자보다 2백여년 앞선 최승로(926-989)의 상례 때 뇌원차와 대차를 왕이 내린 것에서 훨씬 빨리 성립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었고, 신식(申湜: 1551-1623)의〈가례언해(家禮諺解)〉에 정월, 동지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차례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3. 왜 차를 쓰지 않게 되었을까?
그러므로써 일반인의 뇌리 속에 차 없는 차례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국화 없는 국화빵이요, 붕어 없는 붕어빵 같은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균관에 있는 어떤 이는 차례의 의미는 간단한 낮제사이기 때문에 버금 차(次)을 써야 하고, 차(茶)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유가에서도 제사에 차를 썼다는 홀기가 발견되었으니 그런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 되었다.
조선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弔義祭文)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당한 한재(寒齋) 이목(李穆)선생의 5백주기 추모제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던 이들이 이목선생의 부조묘(父祖廟)에 제사를 지낸 홀기(笏記)에서 “철갱봉차(撤羹奉茶)” 즉 “국을 내리고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 발견한 일이 있었다.
한재(寒齋)의 종중(宗中)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종전대로 숭늉을 올릴 것이냐 한재선생이 조상님께 올린대로 차를 올릴 것이냐를 논의한 끝에 조상님이 하신대로 차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재선생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선생에게 수학하여 25세 때 장원급제하고 영안남도(함경남도) 병마평사를 거친 인물로 참형 당하고 부관참시가지 당했다가 중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등을 추중받기도 한 곧은 인물이다.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선사(草衣禪師)보다도 3백여년이나 앞서서 1300여자의 다부(茶賦)를 그의 문집인 『한재문집(寒齋文集)』에 남겨 ‘차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차와 관련이 많은 분이다. 이렇게 유가에서도 이미 조선시대에 차를 올린 것이 기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나 차례에 차를 써야 한다는 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동일한 것이다.
4. 반드시 차를 올려야 한다
며느리의 솜씨로 직접 달인 차를 조상의 사당에 올리고 말이 없는 조상대신에 그 차를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나눠 마시는 것을 고묘(古廟) 또는 묘견례(廟見禮)에서의 회음(會飮)이라 했다.
따라서, 5천년 역사와 문화민족임을 자랑해온 우리가 차례에서 차를 빼서는 안 된다. 반드시 차를 써야 한다. 단, 모든 것이 민주적인 현대사회에서 가족 구성원 중 어느 개인의 의견대로만 해서는 안 되므로 회의를 통해 의견을 일치해서 차를 꼭 쓰도록 했으면 한다.
요즘은 누구나 차를 가지고 있는 시대이며, 제사에 쓰는 술 종류가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차의 사용은 이제 설득력을 얻기가 쉬울 것 같다. 종교를 떠나서 전 국민이 차를 써야 차례라는 이름이 지닌 제 값을 하는 것이다.
법현스님
1. 차례란 무엇인가?
차례는 국어사전에 '음력으로 다달이 초하루, 보름, 또는 그 밖에 명절이나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간단한 낮 제사' 라고 나온다. 『삼국유사』<표훈대덕조(三國遺事表訓大德條)> 에는 충담(忠談) 스님이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경덕왕이 즉위한 지 24년(765년)되던 해 삼짓날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나랏일 걱정에 훌륭한 사람의 고견을 듣고자 처음에는 잘 차려 입은 스님을 모셔왔으나 거절하고 누더기를 입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이를 거듭 청해 모신 스님이 충담스님이었다.
충담스님은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차 끓이는 도구와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년 삼짓날(3.3)과 중굿날(9.9)에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님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오는 길이라 했다. 충담스님에게 차를 청해 마신 뒤 충담스님이 '찬기파랑가'라는 향가(鄕歌)의 저자라는 것을 알고 나라를 편안케 하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충담은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어미라/ 백성을 어린아이라 여기니/ ∼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하리." 라는 내용의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그것이 다도(茶道)의 비롯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서 충담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모두들 '다도(茶道)' 또는 재주 예자를 써서 '다예(茶藝)의 효시'라고만 했지, 예도 예자를 쓴 '차례(茶禮)'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부처님께 차와 향을 올리고 절하는 것을 예불(禮佛)이라 하는 것처럼 충담스님의 그것도 차례라고 불러야 하리라.
차례의 효시는 충담스님의 미륵부처님께 올린 차례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명절에 지낸 차례도 결국 그 뿌리가 불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불교계 뿐만 아니라 유림이나 일반 가정에서도 차례를 지내는데 차를 쓰지 않고 있다.
2. 차례에 관한 불교와 유교의 의식
이렇게 차례가 성행했으나 경제적 이유와 함께 의식의 엄숙함이 복잡함으로 인식된 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절에서 지낼 때도 스님이 어려운 내용을 대신 읽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기존의 제례문(상용영반, 관음시식, 화엄시식, 종사영반 등)을 가지고 추석과 설 명절 차례도 지냈기 때문에 불교에는 차례의식이 없는 듯이 여겨진 것이다.
유교의 제사에도 차를 쓰는 것이 바른 예법이라고 한다. 유교 예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주자(朱子: 1130-1200)가 차와 관련이 있는 고장에서 생활했고 뒷날 명나라의 구준(丘濬)이 편집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차를 쓴다고 적혀있다. 또한, 우리나라 유가의 다례는 주자보다 2백여년 앞선 최승로(926-989)의 상례 때 뇌원차와 대차를 왕이 내린 것에서 훨씬 빨리 성립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었고, 신식(申湜: 1551-1623)의〈가례언해(家禮諺解)〉에 정월, 동지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차례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3. 왜 차를 쓰지 않게 되었을까?
그러므로써 일반인의 뇌리 속에 차 없는 차례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국화 없는 국화빵이요, 붕어 없는 붕어빵 같은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균관에 있는 어떤 이는 차례의 의미는 간단한 낮제사이기 때문에 버금 차(次)을 써야 하고, 차(茶)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유가에서도 제사에 차를 썼다는 홀기가 발견되었으니 그런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 되었다.
조선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弔義祭文)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당한 한재(寒齋) 이목(李穆)선생의 5백주기 추모제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던 이들이 이목선생의 부조묘(父祖廟)에 제사를 지낸 홀기(笏記)에서 “철갱봉차(撤羹奉茶)” 즉 “국을 내리고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 발견한 일이 있었다.
한재(寒齋)의 종중(宗中)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종전대로 숭늉을 올릴 것이냐 한재선생이 조상님께 올린대로 차를 올릴 것이냐를 논의한 끝에 조상님이 하신대로 차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재선생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선생에게 수학하여 25세 때 장원급제하고 영안남도(함경남도) 병마평사를 거친 인물로 참형 당하고 부관참시가지 당했다가 중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등을 추중받기도 한 곧은 인물이다.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선사(草衣禪師)보다도 3백여년이나 앞서서 1300여자의 다부(茶賦)를 그의 문집인 『한재문집(寒齋文集)』에 남겨 ‘차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차와 관련이 많은 분이다. 이렇게 유가에서도 이미 조선시대에 차를 올린 것이 기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나 차례에 차를 써야 한다는 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동일한 것이다.
4. 반드시 차를 올려야 한다
며느리의 솜씨로 직접 달인 차를 조상의 사당에 올리고 말이 없는 조상대신에 그 차를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나눠 마시는 것을 고묘(古廟) 또는 묘견례(廟見禮)에서의 회음(會飮)이라 했다.
따라서, 5천년 역사와 문화민족임을 자랑해온 우리가 차례에서 차를 빼서는 안 된다. 반드시 차를 써야 한다. 단, 모든 것이 민주적인 현대사회에서 가족 구성원 중 어느 개인의 의견대로만 해서는 안 되므로 회의를 통해 의견을 일치해서 차를 꼭 쓰도록 했으면 한다.
요즘은 누구나 차를 가지고 있는 시대이며, 제사에 쓰는 술 종류가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차의 사용은 이제 설득력을 얻기가 쉬울 것 같다. 종교를 떠나서 전 국민이 차를 써야 차례라는 이름이 지닌 제 값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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