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다관》에서는 막간에 비렁뱅이 역을 맡은 배역이 등장하여 잦은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죽어라 죽어라고 // 죽판(竹板: 두 개의 대쪽으로 된 리듬 악기)을 두드리니 // 한 사람 한 사람 다관으로 들어와 // 그 많던 자리가 왁자지껄하구나 // 늙은이, 젊은이 // 지껄이는 자, 노래하는 자 // 하는 짓도 제각각이라 // 어떤 이는 새장을 들어올리고 // 어떤 이는 새를 희롱하는데 // 지지배배 잘도 키웠구나. …
이는 북경(北京) 지방 다관의 모습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청나라 말기 민국(民國) 시기에 중국 민간의 음다(飮茶) 관습과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대의 흥쇠, 왕조의 변천, 세태의 변화를 거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관에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기쁨과 괴로움, 사랑과 일, 실패와 성공, 영광과 몽상이다. 세상 모든 것이 여기에 모여들었고, 이로부터 독특한 다관문화가 만들어졌다.
중국 다관문화의 변천사
다관은 나름의 과정을 거치며 변천하였다.
양진(兩晉)과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중국에서는 청담(淸談)의 기풍이 널리 성행하였는데, 본래는 집안에서 차와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던 것이 나중에는 전문적 장소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런 전문적 장소가 바로 ‘다료(茶寮)’였다. 다료에서는 차를 마시기도 하고, 숙박을 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 다관의 모태가 되었다. 그후 8세기에 이르러 일부 도시에서 차를 파는 점포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곧 중국 다관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봉연(封演)의 G봉씨견문록(封氏見聞錄) H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에 이르면 비로소 다관이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북송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유명한 G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 H에는 변하( u河)의 양쪽 기슭으로 많은 다방(茶坊)과 주사(酒肆)가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넘어갈 즈음에 이르러 곡예(曲藝)와 평화(評話)가 세상에 나오면서 다관은 민간 예술가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청나라 이후로는 다관의 형태가 더욱 다양해지고 기능 또한 한결 복잡해졌다.
중국의 다관은 일찍이 살롱이었고, 거래를 하는 장소였고, 기원(妓院)이었고, 혁명을 꿈꾸는 곳이었고, 법정이었고, 무료함을 달래는 곳이었고, 식당이었고, 새[鳥]를 품평하는 장소였고, 전통 희극의 공연장이었고, 정보를 나누는 중심이었고, 신인 작가의 서재였고, 군소 신문기자들이 정보를 얻는 곳이었고, 건달들의 싸움터였고, 연인의 데이트 장소였고, 가난뱅이들의 구걸 장소였다. 이런 것들은 이미 사라졌고, 오늘날 중국의 다관은 한결 순수하고 밝고 아늑해졌다.
중국의 다관문화는 논하기 좋은 주제는 아니다. 그것은 비단 중국이 땅이 넓고 물, 산이 많아서 민간의 풍속이 너무도 다르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지방의 다관문화를 소개하면서 직접 그 지방에 가서 맛을 되풀이, 음미해 보고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 문화적 내용을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사(茶肆)나 다방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다. 비록 오늘날의 다관이기는 하지만 유서 깊은 고장 항주(杭州)와 항가호평원(杭嘉湖平原) 일대에 자리 잡은 것들이 우리에게는 가장 친숙하다. 항주에는 1990년대 초에 서호(西湖) 주변에 처음으로 다예관(茶藝館) 성격의 다루(茶樓)가 세워졌다. 그후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무려 2백 개 가까운 다예관이 들어섰다. 이 2백 개나 되는 다예관은 서호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차문화의 새로운 풍경선을 만들었다. 때문에 항주를 찾는 외지 관광객들은 다루에 앉아 서호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코스의 하나로 여긴다. 항주는 다관의 역사가 유구하고 차문화의 토양이 유난히 두텁기 때문에 지금 항주의 다예관이 상당히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의 다관에 앉아 전국 각지의 다관 모습을 상상하고 나아가 세계 각지의 다관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한 바퀴 둘러보며 찬찬히 음미해 보자.
북경의 다관
북경은 문명 고도(古都)로 중국 문화의 집산지이다. 때문에 우리는 북경 다관의 성쇠를 통하여 시대의 변천과 왕조의 흥망을 엿볼 수 있다.
북경의 다관은 역사적으로 대다관(大茶館)·야다관(野茶館)·청다관(淸茶館)·서다관(書茶館)·기다관(棋茶館) 등이 있었다. 오늘날 북경의 다관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여전히 왕자의 도량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동서대각사(東西大覺寺)의 혜다원(慧茶院)은 가장 ‘귀족적’인 곳으로 일컬어진다. 다원 내에는 6칸의 다실이 갖추어져 있고, 3백년이 넘은 백목련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갖가지 풍미를 지닌 다도가 시연되며, 차(茶)·수(水)·경(境)·인(人)·사(事)·기(器)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북경의 다관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항주의 다관
강남 지방의 다관은 북경과는 달리 차문화의 중요한 집산지로, 소주(蘇州)와 항주 일대가 가장 뛰어나다. 문헌에 따르면, 항주의 다관은 남송(南宋) 때에 이미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항주에는 서호를 끼고서 많은 다방이 있었으며, 문인소객과 귀족자제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식 살롱’의 분위기가 가득하였다. 당시 청하방(淸河坊)에 있던 장검열다사(蔣檢閱茶肆)가 가장 유명세를 떨쳤다. 그후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도 항주와 그 근교에는 크고 작은 2백여 개의 다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항주의 다루 역시 서호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이미 예전의 수준인 2백여 개를 회복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날의 다관은 지금 대부분 다예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다예관은 지난날의 다관에 비하여 ‘예(藝)’라는 글자 한 자가 더해졌을 뿐이지만, ‘예술적’ 지위를 지닌다. 다관이 중국인들의 사교의 살롱이었던 반면 다예관은 중국인들의 사교예술의 살롱인 것이다.
성도의 다관
“사천(四川)의 다관은 천하 제일이요, 성도의 다관은 사천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천 지방에서는 이미 1천여 년 전부터 차를 마셨고, 성도의 다관은 전국적인 명성을 지녀 왔다.
성도의 다관은 그 규모와 숫자 그리고 서비스의 품질에 이르기까지 전국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성도의 다관은 ‘개완차(蓋碗茶)’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완차’는 다구(茶具)의 구성에서 ‘차박사(茶博士)’로 불리는 종업원의 주도면밀한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동차호(銅茶壺)·석배탁(錫杯托)·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에서 제작한 다완(茶碗) 등 일련의 다구를 사용하여 달여낸 차는 색·향·맛이 모두 일품으로, ‘정종천미(正宗川味)’로 일컬어진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 잔 개완차를 앞에 놓고 끝없이 ‘용문진(龍門陣)’을 펼친다.
《차의 세계》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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