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인연대표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원광법사 (圓光法師) (542 - 640) |
․신라 진흥황(眞興王, 534 - 576)때에 태어남. ․화랑의 세속오계를 설하였고 소주(蘇州) 호구산 (虎丘山)에서 茶생활을 하였다. |
540 - 신라 솔거(率居), 황용사 (皇龍寺) 벽에 노송(老 松)을 그림 548 - 고구려, 백제의 독산성 (獨山城)을 공격, 백제, 신라의 구원으로 이를 물리침 612 - 7월 고구려 을지문덕(乙 支文德), 隋군을 섬멸 614 - 7월 수양제 회원진에 도 착, 고구려 항복으로 수 군 철수 631 - 2월 고구려 천리장성 쌓 음(동북쪽 부여성 - 동 남해)
654 - 태종 무열왕 즉위 660 - 9월 신라, 당군과 함께 백제를 평정함
668 - 9월 나․당 연합군 고구 려 평양성 함락(고구려 멸망)
|
자장율사 (慈藏律師) (진덕왕때) |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 - 631)때에 태어남. ․선덕여왕때(643)에 중국에서 부처님의 사리와 가 사를 모셔왔다. ․통도사의 茶나무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 |
원효성사 (元曉聖師) (617 - 686) |
․속성은 설(薛)이요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 (新幢) ․고려의 이규보가 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茶人 원효성사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부안 원효방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살았다. | |
사포대사 (蛇包大師) |
․원효성사와 함께 수행했던 도반(道伴). ․원효성사를 모시면서 차를 달여 드렸다고 한다. | |
행기보살 (行基菩薩) |
․일본 천평원년의 성무천황(聖武天皇)시대에 살았 다. ․일본에 귀화한 왕인박사의 후손. ․동대사(東大寺)를 창건하고 차나무를 심었다. | |
지장법사 (地藏法師) (653 - 752) |
․신라 진덕여왕의 넷째 아들, 속성은 김(金)씨요,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지장은 법명. ․24살에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九華山)에 들 어가 수도를 해 등신불이 된 스님. ․중국으로 건너갈 때 차와 벼씨를 가지고 들어갔 다. | |
문무왕 (文武王) (661 - 681) |
․신라 30대 왕,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릉에 茶로써 제사를 지내게 했다.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 끊 어졌던 이 제사를 수로왕의 뜻을 기리어 이었다. | |
신문왕 (新文王) (681 - 692) |
․신라 31대 왕. ․문무왕의 장남으로 문화융흥정책을 펴서 설총과 강수 같은 대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설총으로부터 화왕계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 달아 정치를 잘함. | |
설총 (薛聰) (? - 692 - 746 - ?) |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학자로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남. ․신문왕(681 - 692)의 자문역을 맡았을 때 왕에 게 얘기한 〈화왕계(花王戒)〉에 임금은 ‘차’와 ‘술’로 정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함.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보천(寶川)과 효명 (孝明)태자 |
․신문왕(新文王 : 681 - 692)의 두 아들. ․삼국유사에 매일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 했다는 이야기가 전함. ․도를 깨친 보천태자에게 정거천의 천인들이 차 를 달여 공양함. |
751 - 대상(大相), 김대성(金大 城)이 불국사를 창건
765 - 忠談師, 安民歌를 지음
771 - 12월 성덕왕 신종을 주 조하여 봉덕사에 바침
|
경덕왕 (景德王) (? - 765) |
․신라 제 35대왕. ․경덕왕 23년(765), 삼월 삼짇날 귀정문 루상에서 충담사와 다회를 열었다. ․월명사에게 다구 일습을 선물함. | |
충담사 (忠談師) (? - 765 - ?) |
․향가의 대표적 작가이자 화랑 출신의 승려. ․신라차의 개조, 헌다의식을 실천한 선각자. ․매년 3월 3일(삼짇날)과 9월 9일(중구날)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에게 바 쳤다. | |
혜초대사 (慧超大師) (704 - 787) |
․신라 성덕왕 때 승려. 723년에 당나라 광주에 가 서 인도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된 후 그의 권유 로 인도의 불교성지 순례를 다녀옴.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 |
월명사 (月明師) (경덕왕때) |
․신라 경덕왕(742 - 764)때 화랑출신의 승려. ․경덕왕 19년(760)에 도솔가를 지어 두 개의 해가 나타는 괴변을 물리치고 왕에게서 차와 옷 한벌 을 선물 받음. | |
진감선사 (眞鑑禪師) (774 - 850) |
․오늘날의 지리산 쌍계사(雙磎寺)를 지었으며 소 박하게 차를 즐겨 마심. ․떡차를 가루내지 않고 그대로 돌 솥에 달여 마 심. ․범패를 전한 분으로 우리나라 범패의 비조가 되 었다. | |
흥덕왕 (興德王) (? - 836) |
․신라 제 42대 왕. ․국교사절을 통하여 처음으로 차씨를 수입(흥덕 왕 3년 828년)해서 지리산에 심게함. | |
무염국사 (無染國師) (801 - 888) |
․속성은 김(金)씨, 법휘는 무염, 시호는 대남혜화 상(大朗慧和尙) ․태종, 무열왕의 8대손. ․평소에 차를 즐겨 마시었으므로, 입적후에도 신 라왕이 차와 향을 예물로 보내줌. | |
보조선사 (普照禪師) (804 - 880) |
․속성은 김씨, 법휘는 체징(體澄)이며 보조(普照) 는 시호.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어 9산문중의 한 산문을 개창했다. ․헌안왕으로부터 차를 하사 받은 일이있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원랑선사 (圓郞禪師) (? - 883) |
․속성은 박(朴)씨요, 원랑은 시호요, 탑호는 대보 선광(大寶禪光)이며 휘는 대통이다. ․40세때에 중국에 가서 증허대사의 제자가 되었 다. 50세때 귀국하여 월광사에 머믐. ․다실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차생활을 하였다. |
828 - 4월 장보고 청해진 대사 가 됨
892 - 후백제 건국(견훤 : 완 산주 에서 반란)
901 - 후고구려 건국(궁예) 911 - 궁예 국호를 태봉으로 고침
918 - 6월 왕건 추대되어 고려 태조가 됨. 궁예 도망가 다 피살됨 935 - 12월 신라 멸망 936 - 9월 후백제 멸망
|
장보고 (張保皐) (? - 846) |
․별 성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됨. ․산동반도에 신라방을 설치하고 차생활 즐김. | |
수철화상 (秀徹和尙) (817 - 893) |
․속성은 김(金)씨, 시호는 수철, 탑호는 능가보월. ․평소에 차를 즐김. ․수철화상의 제사에 차를 달여 올림. | |
헌안왕 (憲安王) (857 - 860) |
․신라의 제 47대 왕. ․성은 김(金), 이름은 의정(誼靖) ․무염국사, 보조선사께 차를 예물로 보냄. | |
최치원 (崔致遠) (857 - 894 - ?) |
․신라 말엽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며 해동공 자(海東孔子)라 불림.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 많은 벼슬 을 지냄.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차와 약을 사서 고국에 부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지며, 당시에 햇 차를 받고 감사하는 글이 전한다. ․그가 쓴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와 〈무 염국사(無染國師)비명〉에 차에 관한 구절이 있 다. | |
영랑(永朗)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
․화랑 國仙들로 이들이 차를 찧어 달여 마시던 다천(茶泉), 돌솥, 돌절구 등이 강릉의 한송정(한 송정)에 남아 있다.
| |
최승로 (崔承老) (927 - 989) |
․고려 성종때의 문신, 성종의 명을 받고 시무책 (時務策) 28조를 올렸는데, 그 글에 임금은 만승 의 지존으로 성체를 괴롭히는 일을 할 수가 없 는데, 공덕제를 지낼 때 손수 차를 가는 것은 옳 지 못하다고 하여 폐지시키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태사태광으로 추증되었다. | |
대각국사 (大覺國師) (1055-1101) |
․고려 천태종의 시조(始祖)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대각은 시호이 다. ․의천의 전하는 시에서 ‘이슬 함초롬히 내린 봄 아침이나, 달이 밝은 밤이 차 마시에는 좋은 때’ 라고 읊고 있다. ․“사다약표(謝茶藥表)문이 전한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곽여 (郭與) (1058-1130 |
․문인, 자는 몽득(夢得), 시호는 진정(眞靜) ․개성의 청연각으로 예종을 시좌하고 갔을 때 임 금은 귀한 쌍각용차(雙角龍茶․송나라 때 임금 에게 진상하는 차를 용의 형상으로 찍어 만든 것)를 하사했는데, 곽여는 그 귀한 차를 받고 시 를 지었다. |
1107 - 윤관, 여진 점령지역을 격파하고 6성을 쌓음 1126 - 12월 이자겸 사망
1135 - 묘청의 난
1151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 사망
|
정지상 (鄭知常) (? - 1135) |
․고려의 인종때의 시인, 문관,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서경출신으로 예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 좌사간, 지제고를 지냈다. 특히 시, 서, 화에 능통하여 고려를 대표하는 12명의 시인중 한사람 이다. 묘청의 난에 관련된 혐으로 처형되었다. 백률사에서 읊은 차시가 한편 전한다. | |
이자현 (李資玄) (1061-1125) |
․고려의 학자, 자는 진정(眞精), 호는 식암(息庵) ․차를 즐겨 마신 이자현에게 예종이 茶를 내렸다 는 기록이 전함 | |
임춘 (林椿) (1145-1170?) |
․고려 인종 때의 문관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이인로, 오세재, 함통, 이담지, 이규보 등과 함께 강좌 7현이라 칭하고 시와 차로써 여생을 즐겼 다. 시문에 능하여 서하선생집 6권이 전한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로 인해 쇠약해진 육신을 차로써 회복코자 했다. | |
김극기 (金克己) (1148-1209) |
․호는 노봉(老峰), 문장에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 을 남겼는데, 그의 시중에는 차가 있는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한송정, 경포대, 안화사 등의 싯구에는 차를 마 시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 |
이인로 (李仁老) (1152-1220) |
․초명은 득옥(得玉), 호는 쌍명재(雙明齋) ․쌍명기로회에서 차회를 열어 당시에 다품을 크 게 일으켰다. ․진정한 차맛을 알고 그 풍류를 즐기던 사람. ․그의 저서 보한집에 실린 ‘다마(茶磨)’라는 시를 통해 사원에서 말차를 만들던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 |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
․고려의 문장가, 호는 백운산인(白雲山人)․백운 거사․지헌(止軒)․삼혹호(三酷好)선생 ․‘차 한사발은 바로 참선의 시작’이라고 하였고, ‘차의 맛은 선(禪)의 경지’라고 하여 다선일여(茶 禪一如)를 주장. ․문집(동국이상국집)에 차에 관한 4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운봉(雲峰)에 사는 노규선사가 조 아차(早芽茶)라는 차를 보내오자 이를 유차(孺 茶)라 이름하고 ‘孺茶’란 시를 지었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진각국사 (眞覺國師) (1178-1234) |
․호는 무의자(無衣子), 법호는 혜심(慧諶), 진각은 시호 ․보조국사 지눌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2세가 되 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차를 즐기던 다승(茶僧) |
1170 - 무신 정중부가 집권하 여 독재정권 확립
1196 - 최충헌, 최우, 최항, 최 의 4대 62년의 최씨 무 단통치가 시작 됨
1198 - 만적의 난
1216 - 거란족, 압록강을 건너 침입
1231 - 몽고의 고려 1차 원정 1261 - 몽고의 고려 복속
|
김지대 (金之岱) (1190-1266) |
․고려시대 무신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 ․초명은 중용(仲龍), 거란이 침입하자 아버지 대 신 종군함. 문과에 급제하여 문무를 겸함. ․유가사(瑜伽寺)라는 시에는 절에서 차마시고 법 문 듣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 |
천인대사 (天因大師) (1205-1248) |
․20세에 탐진 만덕산의 원묘국사에게 출가하여, 송광사의 혜심에게서 조계의 요체를 배우고, 만 덕산, 지리산, 비슬산 등을 전전하며 수도 한 뒤, 다시 원묘국사에게서 천태교관을 전해 받았다. 1247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난을 피하여 상왕산 법화사에 있다가 입적했다. ․시에 능통하여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차시가 여러편 전한다. | |
진정국사 (眞靜國師) (1206 - ?) |
․법명은 진정(眞靜), 자는 몽차(蒙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선왕 때 만덕산 원묘국 사에게 출가하여 보현도량에 들어간 뒤 만덕산 백련사의 제4대 조사가 되었다. 만년에 용혈함에 이거. 용혈 대존숙이라는 존칭을 받았고 시문으 로도 추앙 받았다. “노승과 회포를 풀다”라는 차 시가 전해진다. | |
백문절 (白文節) (? - 1282) |
․고려 때 문인 ․자는 빈연(彬然), 문장에 뛰어남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보직되고 이 부사랑을 거쳐 충렬왕 때는 사의대부, 대사성, 보문각학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많은 시 를 남겼으며 특히 “화암사 운제”라는 차시가 전 한다. | |
김서 (金湑) (충렬왕때) |
․고려의 무관 ․낭장(郎將)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이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할 때 호종했다. | |
원감국사 (圓鑑國師) (1226-1292) |
․법호는 법환(法桓), 충지(沖止)․원개(元凱)․밀 암(密庵)이며 원감은 시호. ․송광사의 16국사 중 한 분으로 제6세조 이다. ․20수에 가까운 차시가 「동문선」과 원감국사가 송(圓鑑國師歌頌)에 전해진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이진 (李瑱) (1244-1321) |
․호는 동암(東庵) ․송광산 정혜사의 혜감국사(慧鑑國師, 1249 - 1319)는 해마다 좋은 차를 동암에게 보냈고, 그 때마다 동암은 시로써 이에 보답했다. 차와 시로 맺은 유불의 교유였다. |
|
홍규 (洪奎) (? - 1316) |
․초명은 문계(文系)이며 충숙왕의 장인이다. ․원종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충선왕때 익산군에 봉해지고 상 의첨의도감사(商義僉議都監事)에 이르러 죽었다. ․‘박행산 전지댁에 제한한다’는 차시 1편이 전해 지고 있다. | |
박충좌 (朴忠佐) (1287-1349) |
․고려의 학자,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충렬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안렴사, 밀직 제학, 찬성사를 지냈다. 차를 좋아하여 친구들에 게 차 선물을 많이 하였다. | |
홍간 (洪侃) (? - 1304) |
․자는 평보(平甫)또는 운부(雲夫)이며 호는 홍애 (洪厓)이다. 첨의사인으로 있다가 동래현황으로 좌천, 재직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시풍이 청려했다. 그의 시는 삼한시귀감에 수록되어 있 다. 저서로 홍애집(洪厓集)이 있으며, 김둔촌의 시에 화답하는 차시가 전한다. | |
권한공 (權漢功) (? - 1349) |
․호는 일재(一齋) ․충령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다가 충선왕때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에서 이제현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을 떨쳤다.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차시가 전한다. | |
이제현 (李薺賢) (1287-1367) |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 (益齋)․실재(實齋)․역옹(櫟翁)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의 경호(景瑚)선사가 해마 다 보내주는 차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표현했다. ․“모련사석지조기”문에 고려때 차달일 때 사용하 는 석지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 |
안축 (安軸) (1287-1348) |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 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 등과 개찬. 경 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 관동완주(關東瓦 住), 근재집(謹齋集)이 라는 문집을 남김. ․한송정, 촉성정, 죽장고사등의 차시가 전한다. | |
이곡 (李穀) (1298-1351) |
․초명은 운백(芸白), 자는 중부(仲父)이고, 호는 가정(稼亭), 이색의 아버지 ․주객이며 茶人인 이곡은 시에서 차의 성품을 술 과 대비시켜 나타내고 있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보우선사 (普愚禪師) (1301-1382) |
․고려말기의 승려 호는 태고(太古)이름은 보허(普 虛)로서 속성은 홍이다. 삼각산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호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중 국 호주로가서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임제종의 초조가 되었다.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구산을 통합하여 조계 1종을 만들었다. |
1323 - 왜인, 추자도 등지에서 노략질함
|
이연종 (李衍宗) (충렬왕때) |
․이승휴(1224 - 1300)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감찰대부 밀직사가 되었다. ․박치암으로부터 신차(新茶)를 선물받고 그 고마 움을 전하기 위해 칠언고시의 투다회(鬪茶會)에 대한 차시를 남길 정도로 차를 좋아했다. | |
정사도 (鄭思道) (1318-1379) |
․고려때 학자이며, 초명은 양필(良弼) ․1336년 문과(文科)에 급제, 공민왕으로부터 일성 군(日城君)에 봉해지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 명되었다. 유고주사(遊高住使)라는 차시가 전한 다. | |
이무방 (李茂芳) (1319-1398) |
․자는 석지(釋之), 광양 이씨(光陽 李氏)의 시조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조선 건국이후 광양부원 군이 됨. 寒松亭이라는 차시가 전함 | |
나옹대사 (懶翁大師) (1320-1376) |
․휘는 혜근(慧勤) 초명은 원혜(元慧)이며 나옹은 그의 호다. ․1340년 고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하 여 전국의 명산대찰을 편력, 1344년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여 개오했다. ․1347년 원나라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指 空)의 법을 차로써 전법을 받은 특별한 사례를 나겼다. | |
이색 (李穡) (1328-1396) |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이곡의 아들 ․여말 선초에 살았던 대학자요, 정치가이며, 문인 ․14세에 진사가 되어 국자감의 생원, 대사성, 판 문하부사를 지냈다. 성리학에 정통하고 성균관의 학칙을 개혁하여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69편의 차시가 전하는데, 차를 몹시 좋아하여 여 러 승려로부터 차를 선물받기도 했고, 차가 떨어 지면 가동(家童)을 시켜 차를 구해 오기도 했다. | |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
․호는 포은(圃隱), 자는 달가(達可) ․고려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포은문집에 차에 관한 여러편의 시를 남김 ․돌솥에서 찻물이 끓으며 내는 소리를 솔바람 소 리로 들으며 이것을 즐긴다는 내용의 ‘石鼎煎茶’ 등의 시가 전함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변중량 (卞仲良) (? - 1398) |
․호는 춘당(春堂), 변계량의 형이며 이성계의 조 카사위 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직사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에 우승부지, 우산기상시에 이르렀 다. 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참살 ․시문에 능하여 춘당유고가 1권 전하는데 몇 편 의 차시가 실려 있다. |
1348 - 〈가시리〉 〈서경별곡〉 〈청산별곡〉 〈사모곡〉 〈정석가〉 〈동동〉등이 나옴
1352 - 조일신의 난
1361 - 홍건적 침입
1362 - 홍건적 대파 1363 - 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가져옴
1368 - 원의 멸망, 오나라왕 주원장(朱元璋)이 황 제가 되어 명 건국
1392 - 임신년 조선왕조시작 태조 이성계 즉위
|
이첨 (李詹) (1345-1405) |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 우정언, 좌대 언, 예문관, 대제학, 정헌대부가 되었다. 하륜 등 과 함께 삼국사략을 찬수했고 문장과 글씨에 뛰 어났으며 소설 저생전을 지었다. ․양책역에서 차를 달여 마신 시가 전한다. | |
이숭인 (李崇仁) (1349-1392) |
․고려때 대학자이며 문장가, 자는 자안(子安), 호 는 도은(陶隱) 고려 3은 중 한사람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고사, 진덕박사를 거쳐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차를 벗하며 한을 달램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고 했으며,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 |
권근 (權近) (1352-1409) |
․자는 가원(可遠), 사숙(思叔)이며 호는 양촌(陽村) ․16세에 성균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예의 판 서, 정당문학, 대사헌을 지냈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양촌집, 입학도설이 있으며 시문집에 여러편의 차시가 전한다. | |
이행 (李行) (1352-1432) |
․호는 기우자(騎牛子) ․다로써 유배생활의 울분을 달랬다. ․차 맛을 잘 간별할 줄 알았으며 우리나라 찻물 을 충주 달천수, 한강 우중수, 속리산 삼타수가 좋다고 평하였다. | |
길재 (吉再) (1352-1419) |
․호는 야은(冶隱), 자는 재부(再父) ․이색․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 린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茶人 | |
함허선사 (涵虛禪師) (1976-1433) |
․후는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양주 회암사로 가서 무학대사의 제자가 되어 종 품을 진작시켰다. 진상화상의 다게와 옥봉화상에 게 어울리는 다게를 지었다. 그의 산중미와 같은 담백한 몇 편의 다시가 전한다. | |
유계문 (柳季聞) (1383-1445) |
․자는 숙행(叔行), 1408년에 문과에 급제 언관을 거쳐 이조정장, 시언등을 지냈다.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냈고, 글씨를 잘썼다. 한송정이라는 차시가 전한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최항 (崔恒) (1409-1474) |
․자는 정부(貞夫) 호는 태허정(太虛亭), 동량(㠉粱) ․2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부수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고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역사, 언어 등의 분 야에 정통하고 문장에 능한 훈구파의 대학자이다.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동국정운을 찬진했으며 저 서로는 태허정집, 관음현상기가 있다. |
1418 - 창덕궁 인정전 이룩됨
1419 - 세종대왕 즉위
1428 - 일본에 통신사를 파송
1430 - 〈농사직설〉반포
|
신숙주 (申叔舟) (1417-1475) |
․조선의 학자, 정치가 ․호는 보한재(保閒齋), 희현당(希賢堂), 자는 범옹 (泛翁) ․작설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고향의 옛일을 회고 하는 내용을 시가 전함 | |
서거정 (徐居正) (1420-1488) |
․자는 강중(剛中),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 亭), 정정정(亭亭亭)이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이조참의, 예조 참의를 지냈다.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 람을 편찬했고, 동문선, 필원잡기, 사가정집 등의 저서가 있다. 사가정집에는 십여편의 차시가 전 한다. | |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
․조선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季溫), 효관이며 호 는 점필재(佔畢齋)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영관, 형조판서, 자중 추부사를 지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시문 과 서화에 능하여 많은 시문이 점필제집에 전한 다. 영남학파의 종조. ․성종 2년(1471) 봄에 경상도 함양군수로 부임했 는데, 당시 공물로 바칠 茶가 생산되지 않아 전 라도에 가서 쌀과 차를 바꿔 공물로 바쳐야 하 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함양 땅에 차나무를 심어 다원을 조성했다. | |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 峯), 청한자(淸寒子)이다. 3세에 이미 시를 지었 고 5세에 중용․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났 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통분하여 책을 태 워버리고 출가하여 법명을 설잠(雪岑)이라 했다. ․세속에서 벗어나 독서와 바둑에 몰두하여 화초 를 가꾸며 살았는데, 그가 기르던 종류의 화초 중에는 차나무도 있었다. ․그의 저서인 〈매월당집〉에 60여 수나 되는 차 시가 전한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성현 (成俔) (1439-1504) |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 대사헌, 예조판서를 지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 정통 하여 아악궤범을 편찬햇으며 저서로는 용재총화, 허백당집, 부휴자당론 등이 있다. ․용재총화에 차에 얽힝 일화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 |
1443 - 12월 「훈민정음」28자 를 제정 1447 - 2월 茶房을 司尊院 으로 개칭 1449 -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간행 1455 - 세조 즉위
1465 - 원각사 대종(大鐘)완성
1474 - 〈국조오례의(國朝五禮 儀)〉완성
1504 - 갑자사화
1506 - 중종(中宗)반정
|
유호인 (兪好仁) (1445-1494) |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뇌계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토관, 합천군수를 지 냈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 했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대의 3절로 불리었고 성종의 총애가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임계유고가 있다. ․엄천사에서 지다라는 차시외에 몇 편이 전해진다. | |
이목 (李穆) (1471-1498) |
․호는 한재(寒齋)로 도학자(道學者)요, 문인 ․480자로 된 차노래〈다부(茶賦)〉를 지음. 다부 에는 차이름과 산지, 차나무의 생육환경과 예찬, 차 달여마시기, 일곱잔 차의 효능, 차의 다섯가 지 공로, 차의 여섯가지 덕성에 관한 내용이 적 혀있다. | |
조위 (曹偉) (1454-1503) |
․호는 매계(梅溪), 자는 태허(泰虛)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안도 경차관이 되었 다. 시문에 뛰어나 유호인 등과 함께 성종의 극 진한 총애를 받았다. 사림문학의 비조로 추앙받 았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가섭암(迦葉庵)에서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시며 음다의 효과를 노래한 ‘가섭암’이란 시가 전한다. | |
정희량 (鄭希良) (1469 - ?) |
․호는 허암(虛庵) ․김종직의 문인(門人)으로 있을때부터 다도(茶道) 를 배움. ․여러편의 다시를 남겼는데 훗날 출가하여 승려 가 되었다. 차의 달인으로 손수 차를 달여 마시 기를 좋아 하였다. ․夜座煎茶의 시 한 편은 걸작품이다. | |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
․호는 화담(花潭), 조선의 철학자, 성리학의 대가 ․술과 차를 즐겼다.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 도삼절(松都三節)로 불린다. | |
보우대사 (普雨大師) (1515-1565) |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 ․16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에 입산, 참선과 경학연 구에 전념하다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 사 주지가 되고 선교양종을 부활시켜 선종판사 가 되었으며 3백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로 하 고 도첩제에 따라 4천여명의 승려를 뽑아 승과 를 설치했다. ․상수미암이라는 차시가 전한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서산대사 (西山大師) (1520-1604) |
․자는 현응(玄應), 법휘는 휴정(休靜), 호는 청허 (淸虛) 또는 서산(西山)이며 묘향산에 오래 있어 서 서산대사라 부른다. ․지리산에 들어가 숭인장로에게 의지하여 출가하 였고 21세에 부용대사에게 인가를 받았다. ․임진왜란때 팔도십육도총섭이 되었고 승군을 지 휘하여 왜병을 무찔렀다. ․선교양종을 통합하여 조계종으로 일원화 시켰다. 저서로는 선교석, 삼가귀감, 창허당집 등이 있다. ․여러 편의 차시와 다가가 전한다. |
1523 - 10월 소학언해 간행
1553 - 9월 경복궁 화재
|
정관대사 (靜觀大師) (1533-1608) |
․속성은 곽씨, 법명은 일선(一禪), 정관(靜觀)은 법호이다. 연산사람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백하선 운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서산대사 문하에 들어 가 신임을 얻었다. 훗날 편양, 소요와 함께 3파 를 형성했으며 그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 되었고 그의 정관집에는 여러편의 차시가 전한다. | |
부휴대사 (浮休大師) (1543-1615) |
․속성은 김(金)씨, 이름은 선수(善修) 20세에 지리 산에 들어가 신명장로에게 의지해서 출가했다. 서화에도 능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임진왜란시 해인사에 있을때는 명나라 장군 이종성이 자주 방문했으며 송광사에 오래 머물렀다.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루는 양대 법맥을 이루었 다. 몇편의 차시가 전한다. | |
사명대사 (四溟大師) (1544-1610) |
․자는 이환(離幻), 법명은 유정(惟政), 법호는 사 명당(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鐘峯)이다. ․13세에 작지사 신묵대사에게 출가했다. 1561년 승과에 급제하여 선종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 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서산대사에게 가서 법 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의 문하 에서 의병장이 되었으며 승군도총섭으로 왜병을 무찔렀으며 훗날 강화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의 저서인 사명집에 여러편의 차시가 전한다. | |
소요대사 (逍遙大師) (1562-1648) |
․속성은 오(吳)씨, 법휘는 태능(太能) ․임진왜란 때 의승군에 가담 ․시문집 〈소요당집(逍遙堂集)〉에 「조주차(趙州 茶)」라는 차시가 전한다. | |
이수광 (李晬光) (1563-1628) |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之峰),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지평, 교리, 도승지, 대사간, 이조 판서가 되었다. 명나라에 가서 서학을 접하고 돌 아와 실학발전에 선구자가 되었다. 지봉유설이 전하고 시문집에는 차시가 여러편 실려있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허균 (許筠) (1569-1618) |
․호는 교산(蛟山)․백월거사(白月居士) ․조선의 정치가, 작가 ․시문(時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인 허난설 헌(蘭雪軒)의 동생 ․몇편의 茶시가 전한다. |
1592 - 4월 임잰왜란 발발 1598 - 11월 이순신 장군 전사
1609 - 6월 을유조약 체결 1613 - 경국대전, 동의보감 간행
|
편양대사 (鞭羊大師) (1581-1644) |
․법휘는 언기(彦機), 법호는 편양, 속성은 이씨, 안성사람으로 11세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제자 가 되었다. ․항상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남북을 마음대로 오 가며 선과 교를 함께 보는 서산대사의 선교론을 따라 법을 폈다. 서산대사의 정법제자로 의발을 받았으며 편양당집 외에 선교에 관한 저서가 있 다. ․산거시에는 차밭을 가꾸고 정자를 지어 맑고 담 백한 차생활을 즐겼다. | |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
․조선 중기의 시인(詩人), 문신(文臣) 자는 약이 (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 )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의 시가를 지음 ․보길도에 차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었으며 차생 활을 즐겼다. |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
․조선의 학자, 정치가, 시호는 문정(文正) ․호는 우암(尤庵) ․검소하고 고집통이었지만 차만큼은 소중하게 생 각해 차동(茶童)을 따로 둘 정도였다고 한다. | |
처능대사 (處能大師) (1617-1680) |
․조선 승려, 호는 백곡(白谷), 자는 신수(愼守), 속 성은 김, 12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시문 에 능하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23년 동안 도를 강의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은 백곡집 2권이 전한다. 여러 편의 차시가 있다. | |
도안대사 (道安大師) (1638-1715) |
․조선시대 스님, 호는 월저(月渚) 속성은 유, 평양 사람, 10세에 출가하여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 의 대의를 강구하고 종풍을 드날렸으며 풍담의 법을 이었다. 대승경전을 간행하여 승속에 널리 폈다. 유거잡영 등 여러편의 차시가 전한다. | |
천경대사 (天鏡大師) (1691-1770) |
․자는 천경이고 법휘는 해원(海源), 법호는 함월, 속성은 이씨 함흥사람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능 허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회암대사에게 화엄 경을 배우고 환성대사에게 3장의 교전을 배웠으 며 특히 화엄과 선문염송에 정통하였다. ․천경집 3권이 전해지는데 차시 여러 편이 실려 있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묵암대사 (黙庵大師) (1705-1790) |
․법휘는 최눌이고 자는 이식(耳食), 법호는 묵암, 속성은 박씨, 흥양사람으로 14세에 보성 증광사 로 출가하여 만리대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조계 산 송광사에 가서 풍암 노사의 법을 이었다. ․묵암집 3권 등 많은 저서가 전해지는데 몇편의 차시가 실려 있다. |
1651 - 윤선도 어부사시사를 지음
1756 - 12월 호구조사. 전국 호수 177만 1,350 호 인구 남자 353만 534명 여자 378만 7,825명
1790 - 정약용 유배
1811 - 12월 홍경래의 난 1832 - 6월 영국상선 로드 아 마스트호, 황해도 몽금 포 앞바다에 나타나 통 상을 청함 1880 - 수신사 김홍집 일본으 로 출발 1883 - 1월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
영수각서씨 (令壽閣 徐氏) (1753-1823) |
․초의선사가 〈동다송〉을 집필하는 동기를 만드 어준 홍현주(洪顯周 1793 - 1865)의 어머니 ․차를 즐겼고, 200여 편의 시중에 차 시도 여러 편 전한다. | |
신위 (申緯) (1769-1847) |
․조선의 학자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초의선사와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시문에 능통하여 시학의 스승이 되었다. ․다수의 차시가 전하며 누구보다도 차생활을 즐 긴 것으로 전한다. |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등 ․진정한 차맛을 알고 즐겼던 뛰어난 다인 중 한 사람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 동안 차생활을 익혔다. ․1818년 귀양이 풀려 강진을 떠날 때 그곳에서 키운 18명의 제자들을 모아 다신계(茶信契)를 조직 ․초의선사에게 선학(禪學)과 다도(茶道)를 배움 ․다산이 머문 전남 강진 귤동의 다산 초당에는 많은 茶 유적이 전한다. | |
혜장선사 (惠藏禪師) (1772-1811) |
․조선의 스님 ․속성은 김씨, 호는 연파(蓮坡), 아암(兒庵) ․혜장은 다산에게 차를 가르켜 다산은 걸명소를 지어서 혜자에게 보냈다. 다산과 주역에 대해서 논쟁을 버림. 다산이 비문을 지었다. | |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등 ․조선의 고증학자(考證學者), 금석학자(金石學者), 서예가 ․초의선사와 동갑으로 함께 시문과 다도에 심취 한 지기였다. | |
초의선사 (艸衣禪師) (1786-1866) |
․법명은 의순(意恂), 초의는 호, 속성은 장(張)씨 이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다산과 추사에게 다도를 가르킴 ․정약용에게 유학(儒學)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
다 인 명 |
행적 및 활동사항 |
비 고 |
초의선사 (艸衣禪師) (1786-1866) |
․1824년 일지암을 중건 ․1830년 다신전(茶神傳)을 펴내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끓이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차를 알고자 하는 사 람들이 보도록 했다. ․1837년 동다송(東茶頌)을 지어서 차나무의 생태, 차고사, 중국의 이름난 차와 우리차의 우수함, 차다루기의 어려움, 차따기와 끓이기, 제다법 등 에 관한 내용을 시로써 전하고 있다. |
1884 - 갑신정변 1894 - 갑오경장
|
이상적 (李尙迪) (1804-1865) |
․자는 혜길(慧吉) 호는 우선(藕船), 역관을 지낸 서얼출신으로 온양군수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 르렀다. 12차에 걸쳐 중국에 왕래하여 오숭량, 유희해, 옹방강등과 친교를 맺고 중국에서 시문 집까지 간행했다. 시문에 뛰어나 헌종도 그의 시 를 애송하였으므로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고 이 름했다. 대원군이 준 고려시대 떡차를 선물받고 용단승설 기문을 짓기도 했으며 백산다가(白山 茶歌)와 여러편의 차시를 남겼다. | |
허유 (許維) (1809-1892) |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癡) 조선 고종때 서화가,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시, 서, 화 삼절이라고 했으며 묵죽을 잘 그리고 초의선 사와 추사 밑에서 수학하여 남종화를 정착시켰다. ․차를 잘 다리고 차밭을 만들어 차나무를 가꾸고 차를 만들었으며 차시를 많이 남겼다. | |
신관호 (申灌浩) (1810-1888) |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관호는 초명이 며 후에 헌(櫶)이라고 고쳤다. ․금위영대장, 좌참찬, 훈련대장, 어영대장, 판중추 부사가 되었다. 한미 수호조약의 전권대사가 되 어 조약을 체결하고 병자수호 조약도 체결, 초의 선사의 비문을 지었다. 차를 즐겨마시고 차시를 여러편 남겼다. | |
범해선사 (梵海禪師) (1820-1896) |
․자는 환여(幻如), 법명은 각안(覺岸), 법호는 범 해 ․16세에 호의대사에게 출가하였으며 초의선사에 게 구족계를 받았다. 호의의 법을 잇고 대흥사 진불암에서 개당하여 22년간 경전을 강론했다. ․저서로는 동사열전, 범해선사유고집 2권이 있는 |
'교육 > 차와 예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의 다관문화 (0) | 2008.04.28 |
---|---|
[스크랩] [동영상] 중국 다예 (0) | 2008.04.28 |
[스크랩] 백련차향 그윽한 백련사의 선차 (0) | 2008.04.28 |
중국공예미술대사 장용 여사 작품들 (0) | 2008.03.16 |
[스크랩] 중국공예미술대사 장용 여사 서거 (0) | 2008.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