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차향 그윽한 백련사의 선차
글: 최석환<(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 편집주간>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록에 자리잡은 만덕산 백련사는 고려 보조 스님의 ‘정혜결사’와 함께 쌍벽을 이룬 ‘백련결사(白蓮結社)’의 현장으로만 알려져 왔다.
이곳에는 50년 전까지만 해도 ‘만덕산전차(萬德山錢茶)’라는 특수가공된 녹차가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백련차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선차의 현장인 백련사를 찾으니, 고려 때 혜일 스님이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경루(萬景樓)에 올라 돛단배가 오가는 모습을 보며 운수납자를 맞아 차 한 잔을 놓고 담소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천태종과 법안종의 만남
백련사는 백련결사 이후 천태종 인물들에 의해 천태사상을 꽃피웠다. 백련사 출신인 원묘 국사(圓妙國師)·정명 국사(靜明國師)·원감 국사(圓鑑國師)·진정 국사(眞靜國師) 등이 천태학의 학승들이며 송광사 16국사 중 백련사 출신 선승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천태교학의 원찰인 백련사가 선차의 현장임을 밝히고자 한다.
법안종을 세운 법안 문익의 3세 법손인 영명 연수 선사가 36인의 고려인 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법안종이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36인의 제자 중 거돈사 원공 선사는 송에 들어가 연수에게 인가를 받고 귀국한 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선차문화를 고려에서 꽃피운다. 본격적인 법안종과 천태종의 만남은 대각 국사 의천에 의해 실현된다. 의천은 다소 강압적으로 법안종 승려를 천태종에 합류케 한다. 선종 사찰인 고달사·거돈사·지곡사 등이 바로 그곳이다.
백련사의 선차
백련사 또한 천태사상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의천 이후 법안종과 천태종 합류 이후 선종으로 그 사상적 물줄기가 흘러갔다.
문종의 4번째 아들인 대각 국사 의천은 중국 구법여행 중 항주에 머무르는 동안 법안종 승려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철학에서 많은 점을 배웠다. 때론 자신의 학문으로는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선의 경지도 체험했다. 귀국 후 법안종과 천태종의 통합을 계획, 천태 5대 수호사찰을 세우고 선종과 천태종의 통합을 이뤘다. 당시 천태종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전국에 세력을 떨쳐 중국 천태산과 비슷한 진주 영봉산 용암사 등을 창건, 천태사상의 세력을 떨쳐나갔다.
또한 천태세력권에 있었던 백련사의 존재가 미미했지만, 원묘 국사에 의해 천태종의 중흥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씨 정권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던 최표(崔彪)·최홍(崔弘) 등은 1211년부터 1217년까지 만덕산 빈 터에 30여 칸의 절을 짓고 백련사 간판을 내걸고 천태종을 표방한 뒤, 대각 국사가 전한 법화삼매(法華三昧)와 구생정토(求生淨土)의 수행방법을 실천해 나갔다.
백련사는 4세 법손인 진정 국사 천책(天·1206~?)에 의해 선차의 고향으로 거듭났다. 천책은 원묘 이후 차맥을 일으킨 인물로 백련사를 중흥시켰다. 그는 백련사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호산록(湖山錄)』을 남겼다. 『호산록』에는 「금장대선사에게 올립니다(寄金藏大禪師)」와 「용혈대존숙장하에 보냅니다(寄龍穴大尊宿丈下)」라는 차시 2수가 있다. 천책 스님의 뒤를 이어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아암 혜장과 정다산·초의 등에 의해 백련사는 근세 차맥의 중흥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대나무,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차밭
만덕산 백련사의 선차를 취재하기 위해 백련사를 찾았을 때 주지 혜일 스님이 반갑게 맞았다. 혜일 스님을 보는 순간 백련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고려 때의 혜일(慧日) 스님을 만난 듯한 감격에 젖었다.
스님과 함께 절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강진만이 눈앞에 펼쳐진 만덕산의 차밭을 찾았다. 대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를 헤치고 들어서니 찻잎이 맑은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혜일 스님은 “동백과 차가 어우러질 때 좋은 차맛을 낸다”고 했다.
『만덕사지』에 따르면 ‘동백’이란 유차의 속명이라고 한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동백과 차는 같은 식물로 분류된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백련사는 만덕산에 있다. 신라 때 창건했으며 고려의 원묘 국사가 중수하고 조선 세조 때 중 행호가 중수했다. 절 부근에는 소나무·잣나무·왕대·동백나무 등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라고 적고 있다.
최자(崔滋)가 찬한 「만덕산 백련사 원묘국사비명병서(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幷序)」에 따르면, 원묘 국사가 제자를 데리고 만덕산을 답사하던 중 목이 말라 물을 먹고자 했으나 절터 주변에 물이 없어 우연히 돌 하나를 잡아당기니 맑은 샘물이 용솟음쳐 나왔다고 한다.
물은 차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
명나라 전예형(田藝)이 쓴 『자천소품(煮泉小品)』에 의하면 ‘돌은 산의 뼈다. 흐름이란 물이 가는 것이다. 산은 기운을 펴서 만물을 낳는다’고 평했고, 당나라 때 황보증(皇甫曾)이 쓴 『박물지』에 의하면 ‘산의 샘은 땅의 기운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일찍이 차는 물맛이라고 말한 바 있는 원감 국사는 「백련암」이란 차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밥 한 바리에 나물 한 쟁반이라
시장하면 먹고 고달프면 잠을 자네
물 한 병에 차 한 남비라
목 마르면 들고 와서 손수 달인다네
대지 땅이 하나와 둥근 부들방석 하나
다니기도 선이요, 앉기도 선이라네.
선차문화 일으킨 진정 국사
백련사를 선차의 고향으로 만든 진정 국사는 『호산록』을 통해 백련사라는 사명(寺名)을 밝혔다. 백련이 있는 곳에는 으레 백련차가 있기 마련이다. 진정 국사는 백련차를 마시며 차선일여 정신을 꽃피웠으리라.
왜 유독 강진에만 백련이 만발하는가? 그 연유는 『호산록』에 나와 있다.
白藕花開道價殊 흰 연꽃이 피어나니 소문이 더욱 드높아지네
東林蓮社又西湖 동림의 결사가 그랬다더니 서호에도 그렇군요
三韓海上誰移種 바라건대 누가 백련을 옮겨왔나
萬德山中始盛敷 만덕산중에도 풍성하게 피어나는군요.
만덕산 백련사에 7월에서 8월 사이에 흰 연꽃이 만개하자 연꽃을 보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누가 언제 심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천책 스님이 연꽃을 상당히 좋아했는지 ‘연꽃을 심고 때때로 단월(신도를 가르킴)을 인도함이다’고 했다.
백련은 백련사를 정점으로 성전면 금당 마을, 군동면 평덕 마을, 도암면 덕연리 등 3곳에 피어 있다. 덕연리의 연지를 관리하는 촌로 등에 의하면 90여 년 전에 백련사에서 연씨를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백련사에서 퍼진 백련은 강진 전역을 불국토의 세계로 만들어 그 모습이 장엄했다. 백련사의 백련이 사라진 것은 유학자들의 불교 배척이 근본적인 원인이 된 것 같다.
경내에 가득한 백련차향
우리나라에 선차문화가 가장 잘 조화된 지역은 남도이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이 뱃길을 통해 들어왔을 때 선차정신도 따라 들어왔다고 보여진다. 젠차로구의 『선차록』에 따르면 ‘선이 선도(禪道)의 수행을 통하여 자성을 발견하고 불생불멸의 진리에 이르는 것과 같이 차는 바로 선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오랫동안 차선일여의 경지에 몰입하면 자성을 발견하는 길이 된다’고 했다.
차의 종류에는 수십 종류가 있다. 특히 백련사에는 전차와 동백잎을 띄운 차, 백련차 등이 50년 전후까지 존재했음을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련차 제다법은 참선의 경지 이상으로 어렵고 고행이 뒤따른다. 노스님들에게 들은 백련차 제다법은 이렇다.
새벽의 여명이 밝기 전 흰 연꽃이 벙긋이 피어날 때 꽃봉우리를 열고 그 속에 차 한움큼을 가득히 넣는다. 다음 삼껍질로 묶고 하룻밤을 묵힌다. 다음날 일찍이 꽃잎을 따서 찻잎을 기울여 쏟아내고 그 차를 따뜻한 햇볕에 말린 다음 그 찻잎을 뜨거운 물에 한움큼 넣고 차로 내었다. 이렇게 탄생된 백련차를 귀한 손님에게 대접했다.
백련차를 맛보면 다른 차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입맛을 바꾸어 놓는다고 한다. 찻물을 10번 이상 우려내도 백련 향기는 변함이 없을 정도로 진하다.
천책(天·1206~?) 스님이 차의 명승으로 이름이 높자 같은 시대의 금장(金藏) 선사가 햇차를 충지(沖止·1226~1292) 스님에게 선물하자, 충지 스님이 「사선사 혜다(謝禪師惠茶)」라는 시를 보냈다.
고귀한 차는 몽정산에서 받았고
좋은 물을 혜산(惠山)에서 길었네.
예로부터 차승들은 좋은 차와 물을 얻고자 했다. 그 유형은 오늘에도 변함이 없다.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차인들이 야생차나 백련차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좋은 차와 물이 정신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다.
백련사의 차맥은 송광사 16국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남도차맥은 크게 백련사와 수선사가 주류를 이룬다. 그 주류의 양대산맥은 백련사의 진정 국사와 수선사의 진각 국사 혜심이다. 이들에 의해 남도 차문화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지금까지 백련사의 차맥을 살펴보았다. 특이한 것은 법안종과 천태종의 만남의 계기가 바로 선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청담 스님은 술보다 차를 마시면 정신과 육체의 일방적인 형식에 끄달리지 않게 되며, 영육일치의 중도적 인간상을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
수많은 선승들에 의해 피어난 백련사의 차의 향기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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