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초기소설 연구
- 「병신과 머저리」,「소문의 벽」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이상은 석사논문
타자의 시선, 감시의 사회
이청준의 소설에는 현실 세계에서 발붙일 곳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외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현실에 유리된 자아는 자기보존을 위해 주체의 재정립을 꾀하고,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 주체의 욕망과 타자의 관계는 다양한 사회적 계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타자는 물론 인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 또는 담론, 권력, 이데올로기 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청준 소설 속의 주체들은 이렇듯 거대한 타자와 만나면서 위축되고 좌절한다.
「소문의 벽」은 잡지사 편집장인 ‘나’가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는 소설가 박준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정신 이상의 원인과 정체를 탐색해가는 과정으로 전개되어 있다. 여기서 주인공 ‘나’의 의식은 박준의 삶을 조망하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박준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는 자기 내부의 불안의 정체를 탐색하고 있다. 박준의 자기존재에 대한 불안 의식은 타자에 의해 억압된 상태에서 발생한다. 타자는 주체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저지시킴으로써 주체의 자율적인 의지를 가로막는다. 여기서 타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하는데, 그 중 그를 가장 억압하는 것은 ‘전짓불’2)로 표상되고 있는 타자의 시선이다.
박준의 불안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자신의 삶이 고립되고, 유린당하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6.25 전쟁이 일어난 유년기에 어머니와 전짓불 아래서 선택을 강요당했던 체험은 진술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생산한다. 이쪽, 조쪽의 대치상황은 일방적인 한 쪽의 힘의 논리가 다른 한 쪽을 무참히 짓밟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렇듯 일방적인 힘의 논리로 표상되는 감시의 현실을 주목하고자 한다.
작품은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편집장 ‘나’의 이야기와 ‘나’에 의해 서술되는 박준의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술자가 주도하는 액자 형식의 구조와는 달리, 내부액자의 주인공인 박준의 이야기는 박준이 주도하고 있다.3) 곧 소설은 ‘나’의 이야기와 박준의 이야기, 그리고 박준이 쓴 세 편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작품의 중심은 나의 이야기보다 박준에게 더 맞추어져 있다. 박준은 발표되지 않은 소설 세 편을 통해 자기의식의 파행성의 원인을 드러내면서 ‘나’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 서술자 ‘나’가 박준의 기행(奇行)을 탐색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타자의 존재이다. 타자는 박준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억압하고 불안하게 한다. ‘나’는 그 실체를 찾아가면서 박준의 정신이상 상태를 구하고자 한다. 박준이 남긴 세 편의 소설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전짓불>4)을 한 편씩 읽어 나가는 가운데, ‘나’는 그의 정신이상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타자의 시선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괴상한 버릇>에서 ‘광’이나 ‘골방’으로 들어가 가사(假死)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 행위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기도이며, 죽은 사람 시늉하기는 외부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의식적 행위이다. 이때 타자는 일상 속에 함께 있는 주변 인물들로 해석되고, 그들은 나를 억압하는 실체로 작용한다. 또한 ‘광’이나 ‘골방’은 감시의 시선을 피해 도망친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이다. 그러나 더 이상 ‘광’이나 ‘골방’이 주인공의 은밀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외부세계에 노출되며, 그의 가사 상태는 아내로 상징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제 주인공의 내밀한 세계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감시의 시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런 꼴로 늘 죽어 눕기가 소원이람 차라리 정말로 한 번 죽어 보기라도 하지’라는 아내의 말처럼 그는 끝내 죽어버리고 만다.
나는 정말로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처럼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해 버리고 나면 아무리 절실하게 급한 일도 정말 급한 것 같지가 않고, 불쾌한 일도 더 이상 불쾌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중략>
결혼을 하고 나니 이젠 <그>의 생활이나 주변이 전보다도 훨씬 복잡해지고 낭패스런 일도 그만큼 많아졌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긴장이나 피로가 더욱 자주 찾아왔고, 그때마다 <그>는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주 그 가사의 잠을 자야 했다. 그 시간도 더욱 더 길어져 갔다. 어떤 때는 그 가사의 잠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때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버릇이었다.5)
생활이 훨씬 ‘복잡해지고, 낭패스런 일도 그만큼 많아’지면서 ‘긴장’과 ‘피로’가 몰려오고, 주인공은 그같이 억압하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런데 타자의 억압은 표층적인 의미 이상을 갖게 되면서, 인간을 사회에서 유리시키고 불구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벌거벗은 사장님>에 오면 주인공을 강제하는 현실의 억압 기제가 좀더 밝혀진다. 사장님의 운전수인 주인공은 어느 날 사장님을 따라가 모처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된다. 그날 이후 사장님과 주변의 감시가 압박 요인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결국 ‘정신이상자’가 되어 실직하고 만다.
하지만 너무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참다 보니 종당엔 신경과민 증세가 생기고 만다. 누군가가 꼭 자기의 언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는 심경이다. 회사 인에서는 벌써부터 자기가 곧 쫓겨나게 되리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고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소문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눈들이, 귀들이 사방에서 자기만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 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마누라까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이따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딴 생각을 하다가 종종 주의력을 잃어버릴 때가 생기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는 그 주의력 결핍 때문에 운전수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회사를 쫓겨나고 만다.․․․․․․
운전수가 당하는 감시는 소설가 박준의 의식과 부합한다. 진술하고자 하나 보이지 않는 눈들이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보이지 않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는 상황은 불안을 극대화시킨다. 이는 곧 작가로서 박준의 자기진술욕이 좌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문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눈들이, 귀들이 사방에서 자기만을 감시하고 있는’ 세계에서 박준은 작가로서의 자기진술을 온전히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의 실체는 세 번째 작품 <G와 전짓불>에서 보다 더 구체적이다. 곧 타자의 시선은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집단 권력의 형태로 확대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문관이 어느 날 나에게 나타나 끊임없이 진술을 강요한다. 나는 ‘성의껏 진실하게 진술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지만 신문관은 끝내 나의 진술을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다.
G가 이야기하고 있는 ‘전짓불 이야기’는, 줄기차게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6.25 전쟁 때의 전짓불 체험과 그 이후 대학, 군영시절의 전짓불 체험이다. 그리고 신문관은 G가 진술하는 ‘전짓불’ 체험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유죄판결을 내린다.
“자 그럼, 이제부턴 바로 그 당신의 진술 태도와 관련하여 유죄심증의 이유를 말하지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은 우리에게 체포당해 있다는 사실, 그것을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우리에게 당신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지금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출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둘째 번 이유는 당신이 줄곧 우리의 정체에 대해 불요부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점입니다. 당신은 진술을 하면서 자꾸만 우리들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밀은 영원한 것입니다.”
초논리적 심증에 의해 G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신문관의 정체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신문관은 박준이 인터뷰 기사에서 밝히고 있는 ‘소문의 정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문관은 G에게 진술을 요구하는 내내 G의 어떠한 목소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G에 대한 판결은 신문관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당신의 진술 내용을 당신에 대한 유죄심증의 근거로는 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당신의 혐의사실은 당신의 진술태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심증이 충분해지고 있었거든요. 당신이 진술한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그 태도에 의해서 말입니다.”
본래부터 G의 진술 내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G는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어서, 진술에 방해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불안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G로 상징된 박준의 의식은 작품의 서술자인 '나‘의 의식에까지 침투한다. 알지 못하는 권력이 박준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으며, 그 의식의 정체가 ’나‘의 의식에까지 포착되면서 ’나‘의 정체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정체에 대해 눈을 확장시킨다.
권력의 주체는 전짓불 뒤로 숨어 자신의 정체는 상대방에게 숨긴 채 G의 일상생활 곳곳을 내리비춘다. 그리하여 권력의 감시 장치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준다. 푸코는 이러한 감시 장치의 원형을 19세기의 근대 감옥 장치인 파놉티콘6)에서 찾는다. 이 ‘일망감시체제’는 수감자에게 끊임없이 감시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듦으로써 지속적으로 권력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이 감시 장치에 의해 행사되는 권력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은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편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권력의 형태는 담론과도 연관을 가진다. 곧 권력과 담론은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해서 지식(담론)은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해 주고, 그 역시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권력은 담론(지식)과 연계됨으로써 폭력과 죽음이 아닌 삶과 욕망의 방식에 의해 권력을 행사한다. 즉 담론과 지식(과학)을 통해 행사되는 권력은 삶의 곳곳에 편재할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영위하는 중에 인간을 통제한다.7) 박준 또한 권력 행사 방식을 감지하고 있는데, 그는 권력 행사에서 감시 장치가 담론(소문)을 통해 기능함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권력과 연계된 담론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들을 지배하고, 또 그것들 스스로 통제되는 그물망을 형성한다.
현실의 억압 기제는 주인공 박준과 대립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을 통해서도 탐색이 가능하다. 외부서사인 「소문의 벽」8)은 인물과 상호 작용하는 현실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주인공 박준 주변의 인물을 통해서 박준이 처한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되짚어 볼 수 있다. 이들은 안 형과 김 박사로 그들의 가치관(세계관), 행동 방식 등은 단지 개별자의 의미를 지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편자의 의미를 띠게 된다.
안 형은 박준의 소설인 <괴상한 버릇>에 대해 인간의 보편적 본성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버릇을 야기한 현실의 압박 요인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비판한다. 대체로 당시의 참여 문학론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여기지는 안 형의 태도는 이 작품이 리얼리즘 문학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또한 인터뷰 기사에서 언급된 박준 자신의 문학 입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 형으로 대표되는 문단 현실은 작가에게 일정한 창작 방법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그럼으로써 정직한 자기진술욕망을 가진 작가, 박준에게는 다분히 강압적으로 작용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작가를 막론하고 그가 만약 정직한 작가라면 자기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시대를 극복해 나가려는 방법은 작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주관적으로 말한다면 한 시대가 모든 작가들에게 어떤 특정한 작업방법을 요구해 올 경우를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시대의 압력이란 모든 작가들에겐 상대적인 것이며, 일률적으로 그들을 강제할 기준을 지니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작가는 그가 만약 자기 시대의 요구를 비겁하게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극복해 나갈 방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은 그 방법일 뿐이다.
광인 행세를 하던 박준을 진짜로 미치게 한 김 박사를 통해서도 박준에게 강제되는 현실의 억압 기제를 찾을 수 있다. 김 박사는 정신분석 임상의로서 과학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을 파신하며 자신의 치료 행위에 대해 자신만만해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임상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환자는 당연히 부차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환자가 지닌 그만의 개별적인 특수성에 대해 치료 차원에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김 박사는 박준의 증세를 노이로제, 일정 부분의 인격 장애에 불과한 질병으로 진단하면서 병인을 찾아 그것을 해소하는 것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박준의 증세는 진술 공포증으로 김 박사의 치료 방법인 자기진술과는 극명한 모순을 이룬다. 치료 방법 자체가 박준에게 폭력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좋은 결과는 방법을 합리화할 수 있다며 ‘나’가 병인에 대해서는 박준의 소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기방법만을 고집한다.
“그럼 박사님께선 앞으로도 박준씨에게 자기 진술이라는 걸 계속 시킬 작정이십니까.”
“물론 그래야지요. 나의 진단과 치료방법에 실패의 기록을 남기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적어도 의사라면 자신의 진단 결과에 대해 그만한 자신과 책임을 가져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 어쩐지 좀 잔인한 느낌이 드는군요.”
“잔인해도 할 수 없지요. 좋은 결과는 방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결과만 좋아진다면… 하지만 그러다 혹시 진술을 얻기도 전에 환자가 아주 진짜로 미쳐 버리는 건 아닙니까.”
김 박사가 마지막 비상수단이라 일컬은 전짓불을 통한 자기진술 요구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되어 박준을 미치게 한다. 치료행위 자체가 잔인한 폭력이 되어 미친 척하는 박준을 정말로 미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에 대해 ‘나’가 분노하자, 김 박사는 박준의 병세를 처음부터 정신분열증이었는데 오진을 한 것이라며 변명한다. 그리고 ‘나’가 박준이 미치게 된 것에 대해 김 박사를 연신 힐책하자, 그는 자신의 과실을 시행착오라며 박준이라는 한 인간의 가치를, 자신이 맹신하는 정신분석학의 합리성을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고 만다.
“하기야 난 이번 일에서만은 과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뒤늦게 의심이 간 일이기는 하지만 그는 아마 처음부터 정신분열의 증세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거든요. 단순한 노이로제만이 아니었으리란 말씀이에요. 아무래도 내가 그걸 재빨리 진단해 내질 못한 것 같아요.”
<중략>
"인간이란 아무리 성실하려해도 시행착오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중략>
“처음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그랬다는 건 물론 아니에요. 그러나 시행착오라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지요. 박준이라는 한 특정 환자에겐 불상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에게서 얻은 나의 경험은 이 병원을 위해서, 그리고 그와 비슷한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는 더없이 유익하게 활용될 수가 있을 테니까요.”
안 형과 김 박사는 박준에게 또 다른 현실의 억압 기제로 작용한다. 안 형은 박준의 소설을 잡지에 게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작가의 존재론적 바탕인 자기진술욕구를 저지한다. 또 정신병원에서 자신이 정신병자로 취급됨으로써 억압의 현실로부터 자유를 꿈꾸었던 박준에게, 김 박사는 정신분석학이라는 무기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 두 사람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은 ‘자신은 진실이되, 다른 것은 틀렸다’는 확고부동한 태도이다. 여기서 작가가 문제시해서 드러내고 한 것은 ‘절대 진리가 지니는 폭력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진리가 인간을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성으로 충만해 있다 하더라도, 인간 개체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검열의 힘이 없다면 그 진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주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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