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스크랩] 문학기행에 대하여 (정판수 교사의 글)

맑은물56 2008. 3. 31. 20:27
문학 기행에 대하여

정판수(울산 청운중학교)


 문학 기행이란 말이 사용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으나 ‘역사 기행’, ‘생태 기행’처럼 이미 이 단어는 낯설지 않다. 아마도 이렇게 대중화된 이유는 대부분의 지역 국어교사모임이 문학 기행이란 소모임을 꾸려가고 있거나, 없어도 문학 기행을 한두 번은 시도해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대중화됐다 해도 아직도 접해보지 않은 이가 많으니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즉 문학 기행을 하지 않았어도 그에 관심 있거나 언제든 여유가 있으면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이들과 소모임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볼 기회를 주기 위해 쓴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글은 문학 기행에 관한 이론적 방향을 제시하려 함이 아니다. 문학 기행에 관한 길잡이는 이미 박안수 선생님께서 잘 정리한 바가 있다.1) 대신에 필자가 소속돼 있는 동구국어교사모임2)(이하 동국모라 씀)에서는 이미 6년 전 1999년부터 방학 때마다, 그리고 봄이나 가을 중 짬을 내어 문학 기행을 수차례 다녀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실전적인 글일 것이다.


◎ 문학 기행은 자료 수집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학 기행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뉜다. 사람 만나러 가기와 장소를 찾아가는 것. 달리 말하면 시인이나 소설가 등의 문인 만나기와, 문학작품과 관련 있는 유적지 찾아가기다.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이 모두 의미 있는 행위이며, 이 둘을 아우른, 즉 문인을 만나면서 현장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인 만나기에도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 그분의 문학세계에 관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일정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 동국모에서 도종환 선생님3)과 김용택 선생님4)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문인 만나기는 아주 유익한 기행이 되긴 하지만 일정을 잡기 어려워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우리 모임은 언제나 방학과 동시에 기행을 시작했다. 늦추면 회원 개개인의 일정과 겹치기 때문에 그때가 가장 좋다는 판단에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쪽 일정이야 그렇게 잡으면 되지만 문인들의 일정을 우리에게 맞추게 하려면 오래 전부터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시간대에 그분들이 응할 수 있는지 없는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특히 처음 찾아가는 곳이나 예비답사를 하지 않은 경우엔 기행할 곳에 관한 정보 수집이 필수적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의 대중화로 쉽게 자료를 얻을 수 있지만 처음 한동안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기행할 곳이 정해지면 가장 먼저 그곳이 속한 행정구역, 즉 시나 군의 관광부서에 들어가 여행 자료를 신청한다. 그러면 어느 곳이나 친절하게 빠른 시간에 책자를 보내준다. 2004년 여름 ‘2차 강원도 문학 기행’을 할 때 얻은 책자만 해도 정선군, 강릉시, 영월군, 원주시, 평창군 등 두툼했다. 이런 책자들은 해당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자료보다 상세히 나와 있기에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다음으로 관광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몇 대의 승용차로 나뉘어 여행할 때는 도로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다. 예비답사를 하지 않고 갈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차를 몰고 가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 자칫 길을 지나치거나 놓치게 되면 시간의 지체는 물론 사고의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지도 읽는 법과 이정표 읽는 법은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그 외에도 잠잘 곳, 먹을 것 등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요즘 그리 문제가 안 된다.


◎ 문학 기행은 국어 교사로서의 수련 과정이다.

 문학 기행의 의의를 새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단지 책에서 배운 것과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느낀 것의 차이점은 크리라.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하여 살아 있는 문학수업이 된다. 그래서 국어 교사라면 문학 기행을 가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그리고 문학 기행은 현장에서의 직접 경험만 얻는 게 아니라 기행을 통하여 적어도 문인이나 문학 일반에 대한 지식을 심도 있게 확충시키는 과정이다. 따라서 반드시 가야 한다. 시간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가야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동국모에서는 문학 기행을 앞두고 최소한 한 달 이상 거기에 대해 준비를 한다. 올 6월 5일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라벌문학 기행’만 해도 한 달 넘게 준비과정을 거쳤다.5) 이런 오랜 준비 과정을 통하여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제와 토론 시간을 통하여 대학 졸업 뒤 사라져간 기억을 되살릴 뿐만 아니라, 알 듯 말 듯  어슴푸레 들어와 있던 지식들이 알알이 영글어 머리 속을 채운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단순히 교사의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골바로 아이들에게 전달되도록 한다. 즉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작품과 연관된 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수업하면 그 효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태백산맥」을 가르칠 때 소화다리, 벌교, 율어해방구 등 … 「처용가」를 가르칠 때 처용암, 처용탈방, 처용무, 망해사 등 …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꽃밭과 물레방아와 나귀 등 ….


◎ 문학 기행은 가서보다 가기 전이 더 중요하다.

 흔히 문학 기행에선 ‘그곳’에서 얻은 경험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얻는 성과보다 가기 전에 집중적인 학습을 통하여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현장에서의 성과는 크지 않다고 감히 단언한다.

 동국모에서는 2001년 겨울방학과 동시에 실시한 ‘충청도 문학 기행’에서 도종환 선생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과 만나기 위해서 선생님의 시집 모두를 구해 가각 한 사람씩 맡아 발제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도종환 = 접시꽃 당신 = 백혈병 걸린 아내에 관한 아픔을 쓴 시인 = 감성시인’이란 공식을 답습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각자 「고두미 마을에서」,「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부드러운 직선」 등의 시집을 맡아 발제하면서 이전까지 갖고 있었던 「접시꽃 당신」에 고착된 시인에서 벗어나 강렬한 시 의식을 전달하는 시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뒤 김용택 님을 만나러 갈 때도 마찬가지로 그 분의 시집을 한 사람씩 나눠 읽었다. 뿐만 아니라 ‘강원도 문학 기행’에서 김삿갓, 김시습, 허균, 허난설헌 등에 대해 좀더 깊이 알았고, ‘제주 4․3 문학 기행’에서 제주도민의 한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면으로 이번 ‘2차 서라벌 문학 기행’에서는 현진건의 작품을 다루면서 우리 기억 속에 거의 들어 있지 않던 「적도」를 읽으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 문학 기행은 확인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학 기행을 처음 가는 이들은 조금 실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기행과 달리 대부분의 유적이 남겨져 있지 않거나 있다 해도 모조품(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현장)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 의미 있는 유적이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둘러 본 유적지로는 ‘동학 문학 기행’에서의 동학 항쟁 유적과 ‘제주 4․3 문학 기행’에서의 4․3 민중항쟁 유적지가 그것인데, 그 외는 꾸며져 있거나 보잘것없는 상태로 있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 수 있다. 문학, 특히 소설 같은 경우는 허구의 산물이므로 그 현장 역시 허구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하동 평사리에 「토지」의 현장 최참판댁을 아무리 실감나게 꾸몄다 하더라도 그곳은 서희와 길상이 자라던 그 현장일 수 없고,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에 가면 물레방아와 나귀가 메어져 있지만 그것은 작품 속의 물레방아도 나귀도 아니다.

 그러나 작품 속의 무대가 허구라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태백산맥 문학 기행’에서 율어리에 갔을 때 우리는 작가가 왜 그곳을 해방구로 설정했는가를 볼 수 있었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자 사방이 온통 성벽처럼 싸인 데다가 아래로 움푹 패인 그곳에는 농토가 넓게 펼쳐져 그곳을 해방구로 설정한 작가의 혜안에 정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용 문학 기행’에서도 헌강왕과 용왕의 만남이 있은 처용암6)은 ‘처용 전설’이 만들어지기 아주 적당한 장소였다.


◎ 문학 기행이라도 여행이므로 3쾌가 만족스러워야 한다

 3쾌(快)는 ‘쾌식(快食), 쾌면(快眠), 쾌변(快便)’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다.

 아무리 내용을 알차게 갖춘 기행이었더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면 기억 속에 오래 남지 않아 그 기행에 대한 좋은 추억은 쉬 사라지고 나쁜 추억만 오래 남게 마련이다. 반대로 내용이 다소 빈약했다 하더라도 잘 먹었다면 그 기행은 오래 간다.

 잘 먹는 데 있어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은 그곳의 특미를 먹는 것이다. 물론 이는 너무 비싸면 안 될 것이다. 아무리 풍천에 가면 풍천장어가 별미라 하더라도 기행 예산이 뻔한데 그것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울릉도 문학 기행’에서의 홍합밥과,  ‘제주 4․3 문학 기행’ 때 모슬포에서의 생선회를 잊을 수 없다. 둘 다 아주 운 좋게 먹은 경우인데 홍합밥은 얼마나 맛있었던지 네 그릇을 먹은 사람도 있었고7), 모슬포에서는 안내하시는 분8)의 친척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1인당 1만원으로 해삼, 전복, 성게알 등을 섞은 회를 먹을 수 있었으니 …. 그래서 이 두 기행은 아직도 오래도록 얘기되고 있다.

 먹는 것 다음으로 잠자리가 중요하다. 여행 가서 아무 곳에나 자면 되지 하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숙박 장소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는 이를 통하여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예약하는 것보다 당일 찾아가는 게 좋다.

 잊혀지지 않는 잠자리로는 ‘동학 문학 기행’ 때 김용택 선생님을 만난 뒤 그분이 근무하는 초등학교 근처 모텔에서 잤던 게 기억에 담겨 있다. 옥정댐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자고 난 뒤 호숫가에 맺힌 빙화(얼음꽃)가 내뿜는 영롱함 …. 일행은 한동안 숨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리고 ‘2차 강원도 문학 기행’ 때 영월 알프스민박에서의 밤도 잊을 수 없다. 특히 그곳은 주인 내외의 친절이 그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했고 ….9) ‘울릉도 문학 기행’ 민박집에선 밤바닷가를 거닐며 부르던 노래와 날이 샐 때까지 밤을 지새우고도 모자라 아침까지 이어진 토론… 등10).

 나머지 쾌변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실패를 두려워 말자.

 아무리 잘 기획된 기행이라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즉 기행하기로 한 날에 폭우가 쏟아지면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때를 대비해 기획하는 이는 준비해야 할 게 있다.

 ‘1차 처용 문학 기행(교사 대상)’때 울산신정고에서 처용무를 감상한 뒤, 우정동 처용탈방을 들러서는, 황성동 처용암에 가서 보트를 빌려 타고 구경을 한 뒤, 망해사까지 갔다오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2차 처용 문학 기행’은 당일 비가 옴으로써 다른 날로 미뤄야 했고, 한 번 미뤄진 일정은 다른 일정과 계속 겹쳐져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가 비 올 걸 예상한 일정을 하나 더 작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 실패를 바탕으로 이번 ‘2차 서라벌 문학 기행’에서 그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하여 비가 와서 용장사탑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한 일정도 세웠었다.

 그리고 ‘태백산맥 문학 기행’ 때 평소에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광복절 휴무와 겹치는 바람에 8시간이나 걸렸고, 그러다보니 봐야 할 곳 몇 곳을 놓쳤다. 이때 얻은 교훈으로 하여 출발할 때 차가 밀릴 날인지 아닌지를 판단한 뒤 일정을 잡게 되었다.

 또한 ‘1차 강원도 문학 기행’ 때는 선두차를 몰고 갔던 필자가 교통지도와 이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잘못된 길을 들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일정에 넣었던 세 군데를 가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이 이제는 약이 되어 지도와 일정표를 읽는 눈을 갖게 되어 이제는 처음 가는 길이라도 어긋남 없이 가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가는 게 좀더 빨리 좀더 많이 볼 수 있는지 하는 안목도 생긴 것이다

출처 : 방송대문학기행반
글쓴이 : 권창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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