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차와 예절

[스크랩]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맑은물56 2008. 2. 1. 11:03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51. 조선시대 26

우리 차의 전통은 사찰과 궁중의 다례(茶禮)에서 계속되었다. 이는 우리 차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해외에서 견문을 넓힌 새로운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외국의 문물과 함께 다속(茶俗)을 소개했다. 문화란 항상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있던 전통적인 다풍(茶風)에는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계획적으로 여럿이 모이는 일은 흔치 않았고, 어쩌다 한 두 명이 만나 차를 마시거나 시회(詩會)나 기로회, 계회 등에서 차를 곁들이는 정도였다. 헌데 새로 생긴 다화회(茶話會)는 사람 수도 많을 뿐 아니라 간단한 파티 형태의 모임이었다. 다화회는 일종의 당대 문화의 첨단 유행이었다. 정부에서는 외국인들의 권유도 많고 외국 차문화에 대한 정보도 많이 들었기에 차 장려책으로 1885년 <농정신편>을 배포하기도 했다.
중국은 차에 관한 서적도 계속 출간됐으나 전대에 비해 고아한 정신적인 면보다는 생산과 경제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차산업의 근대화에 대한 열의가 짙게 보인다. 일본의 차는 퇴조하는 가운데 기계가 도입되었고 차에 관한 홍보도 진행된다.

① 김범부(1897~1966): 동양철학자로 동양대학 출신이며 불교철학에 심취한 차인이다. 차를 즐기고 시를 잘 지었다.
② 최익현(1833~1906): 문신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논박하다 귀양 가고 후에 단발령에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을사조약 후 의병을 모아 투쟁했다. 그의 상소 중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차나 과일을 왕이 들지 않도록 하는 대목도 있다.
③ <해동죽지>에 최영년의 글에 장성의 죽로차가 맛과 향이 좋다는 기록이 보인다.
④ 경운당에서 열린 명현태후 망팔(望八) 행사를 기록한 진연의궤가 있다. 또 이 해부터 내의원에서 관장하던 차를 태의원으로 옮겼다.
⑤ 장지연이 정약용의 <강역고>를 증보(增補)한 책이다.
⑥ 차를 파는 집이 더러 있어서 외국인들이 사서 마셨다. 독일인 분쉬 박사는 당시 찻값을 6전이라 했다.
⑦ 안종수(安宗洙)가 쓴 농서로 차에 관한 기술이 많이 실려 있다. 차의 재배법, 제다법에서부터 거름주기까지를 기록했는데 일설에는 일본의 좌등신연(佐藤信淵)의 토성변(土性辨)과 초목육부, 경종법 등을 번역했다고 햇으나, 실은 청(淸)나라 호병추의 <다무첨재(茶務僉裁)>를 옮겨 적은 것이다.
⑧ 각부 대신들이 용산 인쇄국에서 다화회를 열었다.
⑨ 여주 여흥학교(驪興學校) 개교식에서 다례를 거행했다.
⑩ <구례칠의각기>에 차 마시는 얘기가 나온다.
⑪ 내각과 중추원 고문들이 4월 24일 처음 합동 다화회를 민병석의 집에서 열었다. 계속해서 6월 14일, 7월 22일, 7월 28일, 8월 4일에도 개최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이준용이 용산 이지용의 강정(江亭)에서 다화회를 가지는 등 상류사회에 다화회가 유행했다.
⑫ 살영액이 쓴 책으로 우리 백산차(白山茶)를 소개했다. 백두산 근처 산바위 정갈한 곳에 자라 맛과 향이 짙고 제사에도 쓰고 대용차로도 마신다. 청의 건륭황제는 백산차를 공물로 요구하기도 했다.
⑬ 하윤생: 흡현에 재임할 때 무원차에 관한 자세한 분류와 그에 따른 세금의 부과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복주의 기계화 차공장을 건립하게 되었다.
⑭ 중국 역대의 중요한 다서를 합해서 간행한 책.
⑮ 청대 강소성에서 지현을 지낸 차인으로, 사군자를 잘 그렸다. <다설>을 찬술해 자기 세계를 구현했다.
16 <무군농산고략(撫郡農産考略)>에서 차종, 지리 등에 관해 썼다.
17 서세창(1855~1939): 북양 군벌정부 총통으로 차를 좋아해 다시를 많이 남겼다.
시세결(1858~1923): 대만의 차인으로 최초로 ‘공부차(工夫茶)’를 즐긴 사람이다.
18 강창각삼(岡倉覺三)이 미국에서 쓴 차에 관한 책으로 차의 정신에 대해 피력했다.

<한국>
1897 김범부(金凡父)의 출생 ①
1898 최익현(崔益鉉)의 상소 ②
@ <해동죽지(海東竹枝)> ③
1900 별다례(別茶禮)-경효전(景孝殿)
1901 진연의궤 ④
1903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⑤
@ 찻집 ⑥
1905 <농정신편(農政新編)> 배포 ⑦
1906 다화회를 열다 ⑧
다례 거행 ⑨
<구례칠의각기(求禮七義閣記)> ⑩
1908 다화회 ⑪
@다화회 성행

<중국>
1895 <길림외기(吉林外記)> ⑫
1896 하윤생(何潤生)의 활동 ⑬
1897 <서합(書合)> ⑭
@ <다설(茶說)> ⑮
1903 하강덕(何剛德) 16
1905 수뇌인물들이 인도와 국내 차산지 시찰
@서세창(徐世昌) 시사결(施士潔) 17

<일본>
1897 유념기 발명
1907 <차의 책(The Book of Tea)> 18
1908 다도월보(茶道月報)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49. 조선시대 24

고려 이후에 계속된 선가(禪家)의 차는 초의를 거쳐 범해(梵海), 금명(錦溟)에 이어져 만개하는 결실기를 맞는다. 불가(佛家)에서도 박한영, 한용운 등의 스님이 나와 불교 현대화를 위해 설법했고, 새로운 교육체계를 모색하는 시기다. 그 같이 높은 다심(茶心)이 지금의 선가에 다속(茶俗)을 이루고 많은 불자들이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깊은 뜻을 체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궁중에서는 의궤(儀軌)에 차가 반드시 들어 있고 다식(茶食)도 빠지지 않았으며 일반 가정에서도 차 대신 숭늉을 올리더라도 다식만은 꼭 제수로 썼다.
근대적인 개화사상에 젖었던 유길준이나 장지연, 이능화 등이 나와 다사(茶事)를 기록으로 남겼고, 다시를 통해 올바른 차 정신을 노래했다.
중국은 바야흐로 차의 대량생산을 위해 차 제조공장을 세워 수출에 주력하고, 일본도 왕정복고 이후 차 산업 장려에 힘을 기울였다.


①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개화운동가. 유럽을 여행한 후 <서유견문록>을 쓰고 서양인들의 티파티를 소개해 당시 다화회에 영향을 주었다.
② 금명보정(1861~1930): 송광사 스님으로 범해각안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자(字)를 다송자(茶松子)라 했으며 평생 차와 함께 살았고 다시 80여수를 남겼다.
③ 진찬의궤에서 작설차를 썼다고 했다.
④ 이능화(1869~1943): <조선불교통사>에서 장백산에서 백산차(白山茶)가 나온다고 했다.
⑤ 박한영(1870~1948): 법명은 정호(鼎縞), 한용운 등과 임제종 정통론을 주장하고 조선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며 불교강의를 한 차인이다.
⑥ 우리나라 역대 시 모음집으로 다시도 들어있다.
⑦ 권흥(權興)이 쓴 다시로 오국헌의 시가 있다.
⑧ 의식 때 술 대신 차를 쓴다(用茶代酒)고 했다.
⑨ 고종 10년에 자완(磁椀) 20개 및 은다종(銀茶鐘)을 썼으며 차는 내의원에서 관장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⑩ 만해 한용운(1879~1944): 독립운동가이자 스님으로 불교중흥과 청년운동을 주도하며 <님의 침묵> <흑풍> 등의 작품을 쓴 차인이다.
⑪ 청대 문인으로 <속다경(續茶經)> 20권을 썼다.
⑫ 청대 사람으로 <기홍애진장설다(記紅崖陳丈說茶)>를 찬술했다. 그 속에 다화(茶花), 제다(製茶), 배법(焙法), 용화(用火)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⑬ 변실제(卞實第)가 찬술한 책으로 여러 곳의 물산차(物産茶)를 썼다.
⑭ 송경탕이 찬술한 책으로 차나무 번식법을 기록했다.
⑮ 필자 미상의 무이차에 관해 기록한 글이다.
16 오창석(1844~1927): 전각서화가로 차를 사랑한 차인이다.
17 경도(京都)에서 유행하던 큰 전다회가 열렸다.

<한국>
1850 <서유견문(西遊見聞)> ①
1857 세한도(歲寒圖)
초의 추사 영전에 제문을 올림
1861 금명보정(錦溟寶鼎)의 출생 ②
1864 차인 장지연
1866 초의 입적
1868 진찬의궤 ③
1869 이능화(李能和)의 출생 ④
1870 박한영(朴漢永)의 출생 ⑤
@ <대동시선(大東詩選)> ⑥
1873 어은유고(漁隱遺稿) ⑦
@ <농가집성(農家集成)> ⑧
1877 진찬의궤
1878 다완과 은다관 ⑨
1879 만해 출생 ⑩

<중국>
@ 미국 ‘동방호’가 차를 싣고 영국으로 가다
1861 한구(漢口)에 차공장 설치
@ 반사제(潘思齊) ⑪
1866 장진기 ⑫
1869 <민교유헌록(閩蟜楢軒錄)> ⑬
1874 <종다설십조(種茶說十條)> ⑭
@ <무이기승(武夷紀勝)> ⑮
@ 오창석(吳昌碩)의 활동 16

<일본>
1860 미국으로 차 수출
1866 명치유신
1868 왕정 복고
1874 차산업 장려
1875 대전다회(大煎茶會) 17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50. 조선시대 25

국제간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외국의 문화가 수입되었고 서양인들의 음다(飮茶)생활도 소개되었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차를 수입하면서 차의 재배에 관심을 가지고 묘목을 수입하기도 했다. 대외적 의식이나 조정의 행사, 사찰의식에서 차를 쓰면서 차의 생산을 소홀히 하는 정부에 대해 미국공사 딘스 모어가 차 재배를 권유하기도 했다.

국제간의 회담에 차에 관한 것도 논의되었고, 국가에서 차 재배를 장려하기도 했다. 일제의 침탈이 없었다면 우리의 차 생산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선인들이 남긴 드높은 차정신을 잇는 한편 더욱 좋은 품종을 많이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으로 당시에 다화회(茶話會)라는 차모임이 많았고 문일평 같은 선각자가 나와 다고사(茶故事)를 남겨 자료가 희소한 우리 다사(茶史)에 크게 공헌했다. 여류들의 진출이 많았으니 오효원 박한영 박영희 등의 등장은 기록할 만 하다.

중국도 개혁적 사상의 문인이요 차인인 노신이 등장하고 중국 근대 차발전에 공적을 남긴 오각농이 출생했다. 일본은 왕정복고 이후 얼마동안 다도가 퇴조하는 모양이었다.

① 김원식이 청(淸)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의 회담 내용에 조선 차의 재배와 해외수출 문제를 포함했다.
② 천진군기소의 총판 유향림과 다업진흥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교환했다.
③ 농상사(農商司)에서 차 재배 업무를 맡아 정부에서 장려했다.
④ 고종 21년에 일본차를 상당량 수입했다.
⑤ 청국에서 차의 모종 6천 그루를 수입해서 심다.
⑥ 청국의 안휘성으로부터 육안차(六安茶)의 차씨를 수입했다.
⑦ 서울에 있던 미국 공사 딘스 모아가 차 심기를 권장했다.
⑧ 문일평은 한말 학자로 호를 호암(湖岩)이라 하고 <호암전집> 안에 <다고사(茶故事)>를 써서 우리 차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⑨ 오효원(1889~?): 여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시재(詩才)가 있었고 시 470여 수가 담긴 <소파여사시집> 안에 다시 6편이 전한다.
⑩ 이즈음에 오면 정부의 고급 관리들이 다화회를 자주 가진다. 이는 외국 사람들의 티파티를 모방한 새로운 다회 형태였다.
⑪ 박영희(1892~1990): 대둔사를 떠나지 않고 초의의 맥을 받았다는 응송(應松) 스님이다. 한국의 전통차 보급에 애썼고 <동다정통고(東茶正統考)>를 썼다.
⑫ 오치보(1847~1929): 근대 다상으로 가업을 이어 전차를 주로 만들어 이름을 얻었다. 북경을 중심으로 수많은 점포를 두고 많은 자산을 모아 공익사업을 했다.
⑬ 유순경(兪洵慶)이 쓴 글로 차의 공(功)에 관해 썼다.
⑭ 좌종당(1812~1885): 군기대신을 지냈으며 그의 글에는 청대 다법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많다.
⑮ 노신(1888~1936): 문학자로 혁명적 사상을 펼쳤다. 원명은 주장수로 <광인일기(狂人日記)> <아큐정전> 등의 명작을 남겼다. 차를 아주 즐겨 일생을 차의 정신으로 산 문인이다.
16 오각농(1891~1988): 현대 다학 전문가로 농업기술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다업시험장에 근무하고 돌아왔다. 중국차 발전을 위해 교육기관을 세우고 외국 다업을 돌아봤다. 많은 저술을 남겨 중국 다사를 빛낸 인물이다.
17 조의(趙懿)가 쓴 것으로 몽정차(蒙頂茶)에 관한 것이 들어있다.


<한국>
1881 김윤식 회담 ①
1882 유향림과 회담 ②
1883 차나무 재배 장려 ③
1884 일본차 수입 ④
1885 차 모종 수입 ⑤
1886 육안차 수입 ⑥
1887 미국공사 차 재배 권장 ⑦
1888 문일평(文一平)의 출생 ⑧
상해에서 차 수입
1889 오효원(吳孝媛)의 출생 ⑨
@ 다화회 성행 ⑩
1892 박영희(朴暎희) 출생 ⑪


<중국>
@ 오치보(吳熾甫)의 활동 ⑫

1884 <하랑필기(荷廊筆記)> ⑬
1885 차세에 관한 좌종당左宗堂)의 글 ⑭
1888 노신(魯迅)의 출생 ⑮
1891 오각농(吳覺農)의 출생 16
1992 몽정다설(蒙頂茶說) 17

<일본>
1883 다업조합 결성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48. 조선시대 23

한재(寒齋)의 드높은 차 정신이 펼쳐진 후 350여 년 동안 우리에게 이렇다할 다서 하나 없는 실정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다산이 썼다는 <동다기>가 나왔으나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소실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보전서>에 나오는 <다록>을 옮겨 적은 <다신전>이 나왔으니, 차의 가장 보편적인 이론이 보급된 셈이다. 이어서 초의 선사의 <동다송>은 대부분 기존 다서의 중요 부분을 발췌한 내용이지만 말이 부분의 내용은 우리 차의 장점과 올바른 차정신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 차문화상 중요한 작품이다.

한편 새로운 정신과 학풍이 펼쳐지면서 여류와 서얼 및 평민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차생활에는 부용당, 죽서당, 금원당 등이 등장한다.

중국의 차의 생산, 수출이 주요 정책이었으니 외교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일본은 비로소 옥로(玉露)가 개발되었다.

① 진작의궤(進爵儀軌): 차를 올리는 다정(茶亭)이 주정(酒亭) 옆에 설치되고, 연회 중간에 차를 올리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또 각색다식(各色茶食)이며 삼색다식도 들어 있다.
② 금령(錦舲) 박영보(朴永輔)가 쓴 글이다. 그는 차를 좋아해서 신위(申緯) 신헌(申櫶) 초의 등과 교유했다.
③ <다신전>은 <만보전서>에 실린 명나라 장원(張源)이 쓴 <다록>을 옮겨 쓴 것으로 저서로 보기는 어렵다. 차 특히 산차(散茶)에 관한 기초적 내용이므로 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보아둘 책이다.
④ 최한기가 쓴 책으로 차와 차탕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⑤ <부용집>에 시 200여수가 실렸고 다시고 몇 수 있다.
⑥ 금릉(강진의 옛 지명)의 월출산에서 났던 차로 다산이 가르친 제다법으로 만들었으며 가로 6cm, 세로 15cm의 종이 봉투에 붉은 상표를 찍었다.
⑦ 해거도인 홍현주의 청으로 만든 송(頌)이다. 끝에 우리 차의 우수성을 강조한 것이 이채롭다.
⑧ 금원당 김씨(1817~?): 김덕조의 소실로 <호동서락기(胡東西洛記)>를 썼다. 운초, 죽서 등 여류문인들과 시문을 즐겼으며 다시가 전한다.
⑨ 임점매(1821~1868): 대만 차인으로 문인들의 차생활이 좀더 활기차도록 유도하고 ‘잠원음사(潛園吟社)’를 만들어 많은 문인들이 모였다.
⑩ 완복(阮福)이 쓴 것으로 보이차에 관한 다사(茶事)를 기록했다.
⑪ 손동원(孫同元)이 쓴 글로 하권에 자신이 담배와 술을 끊고 차를 좋아하는데 용정차가 색향미에서 뛰어나다고 썼다.
⑫ 여간신: 청대 다상(茶商)으로 홍차 제법으로 차를 만들었다. 기문(祁門)을 중심으로 크게 성공해 기문홍차의 명성을 얻었다.
주문치: 청대 대상으로 성격이 곧아 거짓말 할 줄 몰랐다. 20여 년간 다상으로서 노력했으나 많은 손해를 보았다. 골동품을 좋아해 수집품이 많았다.
⑬ 황본기(黃本驥)의 저술로 호남의 세공 차 양과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종을 기록했다.
⑭ 문인으로 그의 저술에서 매다옹(賣茶翁) 고유외(高遊外)의 차생활을 비평했다.


<한국>
1827 진작의궤에 차를 올림 ①
1828 진작정리의궤
1830 남차병서(南茶幷序) ②
<다신전(茶神傳)> ③
<농정회요(農政會要)> ④
1831 일지암 지음
@ 부용당 김씨(芙蓉堂 金氏) ⑤
@ 월산차(月山茶) ⑥
1836 다산의 타계
1837 <동다송(東茶頌)> 완성 ⑦
@ 금원당 김씨(錦園堂 金氏) ⑧
1840 김정희의 제주 유배

<중국>
1821 임점매(林占梅)의 출생 ⑨
1825 <보이차기(普洱茶記)> ⑩
1828 차의 밀무역 엄금
1832 차겨루기(복건 지방)
1833 <영가견문록(永嘉見聞錄)> ⑪
@ 인도와 기술제휴
1838 임측서의 흠차대신
@ 여간신(餘幹臣), 주문치(朱文熾) ⑫
1845 <호남방물지(湖南方物志)> ⑬

<일본>
1822 매다옹다기도보
1824 전중학옹(田中鶴翁)
1826 뇌산양 ⑭
1836 옥로차 개발
@ 차의 외국 수출 증대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46. 조선시대 21

18세기 말의 우리 차 중흥의 주역들이 속속 등장하는 시기다. 천주교의 박해운동은 어쩌면 우리 차의 발전에 원인제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이 유배되어 강진으로 가지 않았다면 찬란했던 19세기 초의 우리 차문화는 양상을 달리했을 수도 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아암혜장을 만나고 그로 인해 초의를 가르치게 되고, 이어서 유산ㆍ추사ㆍ해거도인들과 초의가 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 본다면 역사의 진전이란 실로 예상키 어려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15세기 말에 그렸던 ‘십노도상계도권’이 이때 단원에 의해 이모본(移模本)으로 남아 있어 고려 말과 조선의 선비차 생활과 다모들의 행다 예법이나 동작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차가 무역의 중요 품목으로 전대(前代) 같은 깊은 정신적 면을 소홀해지는 듯한 감을 준다. 일본도 차가 상품의 의미가 강해져서 행사 위주로 기울어진다.

① 김정희(1786~1856): 시서화의 명인으로 호를 완당, 추사, 노과 등 많이 가졌다. 중국을 다니며 문인들의 다풍을 섭렵했고 초의와 만나면서 우리 차도 즐겼다.
② 초의의순(1786~1866): 대둔사 13대 대종사. 다산을 인연으로 중앙무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차를 중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다신전> <동다송>을 썼고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③ 이규경(1788~?): 이덕무의 손자로 <도다변증설(도茶辯證說)>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었다.
④ 김명희(1788~?): 추사의 동생으로 서예가다. 차를 즐겼다.
⑤ 1499년 그려진 ‘십노도상첩(十老圖像帖)’을 단원이 이모본(移模本)으로 만든 그림이다. 그 속에 문인들의 차생활과 다모(茶母)가 등장한다.
⑥ 홍원주(1791~?): 호를 유한당이라고 한 여류 차인이다. 어머니 영수합 서씨의 영향으로 일가가 모두 차인이었다.
⑦ 철선혜집(1791~1858): 초의와 같은 시기 스님으로 교와 선에 밝고 문집에 <우증초의화상> 등 다시가 전한다.
⑧ 홍현주(1793~1865): 정조의 사위로 해거도인(海居道人)이라 호를 했다. 초의에게 청해 <동다송>을 짓게 하고 자신도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⑨ 숙선옹주(1793~1836):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해거에게 하가한 차인으로 그때 다모를 데리고 왔다. 다시를 남겼다.
⑩ 조소관은 사신을 맞는 영접도감으로 인삼차를 잘 안마시니 다른 좋은 차를 쓰겠다고 계(啓)를 올렸다.
⑪ 오건(吳騫)이 쓴 책으로 형남차(荊南茶)와 나개차(羅개茶) 등 다사를 기록했다.
⑫ 성승조가 쓴 것으로 더운 남쪽지방 사람들의 차 마시는 일에 관해 썼다.
⑬ 오건의 책으로 화차(花茶)에 관해 기록했다.
⑭ 상전추성(1734~1809): 일본의 국학자이며 문인으로 <청풍쇄언(淸風쇄言)>을 펴내 차를 문인들에게 더 가깝게 했다.

<한국>
1785 천주교 박해
1786 김정희(金正喜) 출생 ①
초의의순(艸衣意恂) 출생 ②
1788 이규경(李圭景) 출생 ③
김명희(金命喜) 출생 ④
1790 십노도상계축 이모본 ⑤
1791 홍원주(洪原周) 출생 ⑥
다시(茶時)
송사행다례(送使行茶禮)
<경도잡지(京都雜誌)>
철선혜집(鐵船惠楫) 출생 ⑦
1793 홍현주 출생 ⑧
숙선옹주(淑善翁主) 출생 ⑨
1799 조소관(趙銷寬)의 계(啓) ⑩


<중국>
1785 ‘중국황후’호가 차 운반(뉴욕)
1787 <도계객어(桃溪客語)> ⑪
1788 <위세식략(衛歲識略)> ⑫
@ <첨양총필(尖陽叢筆)> ⑬

<일본>
@ 상전추성(上田秋成) ⑭





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45. 조선시대 20

정조의 개혁운동이 추진되면서 새로운 학풍이 진작되어 역사의 진로를 모색했으니, 철학적인 이론보다 실제 생활과 직결된 일반 백성들의 생활문제가 화두로 등장하는 시기다. 반계 유형원, 초정 박제가, 연암 박지원 등의 저작들이 나와 새로운 문풍을 일으켰다.

특히 자하 신위(申緯)는 시(詩) 서(書) 화(畵)에 선(禪)과 차를 결부시켜 하나로 조화시킨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부는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 뚜렷하게 금을 그을 만큼 중요한 시기인데, 이런 차인의 출현은 의의가 크다. 나라에서는 모든 의식에 한결같이 다례를 올렸고 개인의 차 생활도 여전했다. 제도나 형식은 간결해지고 문화는 크게 꽃피웠다.

중국도 차 무역에 힘을 기울였고 일본은 다가(茶家)에 종가제(宗家制)가 생겨서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다. 천리휴(千里休) 이후 천종단(千宗旦)에 이르는 삼대의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유파를 이루어 전승되어 왔다.

① 영조 41년 수작의웨에는 다모(茶母) 2인과 백대자완(百大磁椀) 그리고 백다식 홍다식이 기록되어 있다.
② 백파긍선(1767~1852): 거일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에서 개당해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宗主)가 된 차인으로 다게(茶偈)가 전한다.
③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중국 차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④ 중보 삼림경제에 다탕제품(茶湯諸品)을 쓰고 다른 데서 다관, 다종에 관해 썼다.
⑤ 신위(1769~1847): 조선 문인으로 일찍이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거기에 더해 선(禪)에 몰입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차를 즐겨 다수 100수를 넘게 남겼다.
⑥ 혜장(1772~1811): 대둔사 대강사로 차를 즐겨 다산과 교분을 맺고 그에게 차를 보냈다. 다산이 적지에서 위로를 받고 그를 위해 다시를 많이 남겼다.
⑦ 전다(煎茶)와 점다(點茶) 등의 용어와 기구를 여러 군데 설명했다.
⑧ 마단림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참고로 했으며 다사(茶事)가 실려 있다.
⑨ 조학민이 찬술한 책으로 차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특히 보이차(푸얼차)에 관해 자세하게 실려 있다.
⑩ 이조원이 쓴 책으로 몽산차(蒙山茶)와 선인장차(仙人掌茶)에 관해 썼다.
⑪ 양장거(1775~1849): 청대 문인으로 <귀전쇄기(歸田瑣記)>에서 무이산의 귀한 차 얘기를 싣고 있다.
⑫ 매다옹의 영향을 받은 문인으로 차를 취미삼아 마셨다.
⑬ 대전현상(大典顯常) 스님이 쓴 <다경> 해설서다.
⑭ 전능촌죽전(1777~1835): 문사이자 화가로 취미생활로 차를 즐겨 이름을 얻은 차인이다. 매다옹의 다풍을 계승했다.


<한국>
1765 수작의궤 ①
1767 백파긍선(白波亘璇)의 출생 ②
서유구의 출생 ③
@ 유중림 ④
1769 반계수록
신위의 출생 ⑤
1772 혜장(惠蔣)의 출생 ⑥
1773 유희 ⑦
1774 수로왕에게 제사
@ <동국문헌비고> ⑧
1778 <북학의>
1780 <열하일기>

<중국>
1765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 ⑨
1769 <정와잡기(井蛙雜記)> ⑩
1773 보스턴 차선(茶船) 사건
1775 양장거(梁章鉅)의 출생 ⑪
@ 무이다가(武夷茶歌)
@ 사고전서(四庫全書) 완성

<일본>
1767 청목목미(靑木木米) ⑫
@ 다가(茶家)의 종가제(宗家制, 이에모토) 시작
1774 <다경상설(茶經詳說)> ⑬
1777 전능촌죽전(田能村竹田) ⑭









출처 : 다선정{茶禪定}
글쓴이 : 지현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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