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극인(1401~1481):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각(茶角), 다헌(茶軒)이라 했다. <불우헌집>에서 사헌부의 다시(茶時) 이야기를 썼고 상춘곡을 지었다.
- 서거정은 조선 초의 학자로 호는 사가정(四佳亭)이었다. 중국에 다녀와서 차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사잠상인혜작설차’를 비롯한 다시 수편이 전한다.
- 남효온(1454~1492): 호는 추강(秋江). 김시습과 교유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했으며 차를 매개로 더욱 가깝게 지냈다. 다시 ‘은당자다(銀鐺煮茶)’가 유명하다.
- 조위(1454~1503): 호는 매계(梅鷄). 성종의 총애를 받은 점필 문하의 차인으로 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시 ‘가섭암’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김수동(1457~1512): 호는 만보당(晩保堂).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인이다. 예서를 잘 쓴 차인으로 ‘야좌유음(夜坐有吟)’에는 차겨루기 얘기도 나온다.
- 정희량(1469~?): 호는 허암(虛庵). 무오사화 때 유배된 후 현허(玄虛)한 사상에 심취한 차인이다. 그의 ‘야좌전다(夜坐煎茶)’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다.
- 이목(1471~1498): 호는 한재. 김종직의 문하로 사부(詞賦)에 뛰어났다. 중국을 다녀오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차를 좋아해서 명문인 <다부(茶賦)>와 다시를 남겼다. 다선(茶仙)으로 추앙 받는다.
- 서경덕(1489~1546): 조선의 문인으로 호를 화담(花潭)이라 하고 수차의 벼슬을 고사하고 은거하여 차와 술을 즐긴 차인이다.
- 정사용(1491~1570): 조선의 문인으로 명문(名門) 출신이며 호를 호음(湖陰)이라 했다. 중국에 두 번이나 다녀온 차인으로 다구(茶甌) 같은 용어가 글에 나온다.
- 보우대사(1509~1565):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추천으로 봉은사 주지가 되어 선종사찰로 지정했다. 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많은 다시를 남겼다.
- 서산대사(1520~?): 법호는 청허(淸虛), 법휘는 서산(西山),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승과에 급제하여 교종선종판사가 됐고 봉은사 주지를 지냈다. 임란 때 승군을 이끌었고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달그림자 밝으며 시냇물 길어 차 달이는 연기 하늘 가르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 이행(1478~1534): 호는 용재(容齋). 중국에 다녀온 차인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했다.
- 정관대사(1533~1609): 법휘는 일선(一禪). 서산대사에게 삭발출가했다. 대둔사에서 일생을 보낸 다승(茶僧)으로 여러 편의 다시가 전한다.
- 최연(1503~1549):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다시 <음다(飮茶)>에는 당시의 음다풍속이 들어있다.
- 이이(1536~1584): 율곡은 우참찬,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중국에 다녀와서 차를 더욱 애용했다. <격몽요결>에서 ‘유식(侑食) 후 진다(進茶)한다’고 기록했다.
- 부휴선사(1543~1615): 임란 때 승병(僧兵)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대둔사 송광사 쌍계사 등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벽암(碧岩)ㆍ취미(翠微) 등의 제자를 두었고 다시를 많이 남겼다.
- 사명대사(1544~?): 직지사로 출가해 묘향산 서산대사에게 배웠다. 임란 때 승군(僧軍)을 이끈 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후에 일본에 가서 강화를 맺었다. 다시가 전한다.
- 김장생(1548~1631): <가례집람도설>에 자신이 고안안 다선(茶筅)으로 차를 타서 다례를 지내는 내용이 있다.
- 신식(1551~162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가례언해>에서 점다에 관해 썼다.
- 장현광(1554~1637): 벼슬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제례 때 차를 드리는 일에 관해 썼다.
- 이경윤(1545~1611): 화가로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짐. 산수, 인물에 뛰어났고 다화 몇 점이 전한다.
- 소요태능(1562~1649): 연곡사와 대둔사에 부도가 있고 다시도 전한다.
- 이수광(1563~1628): <천주실의> <지봉유설>을 쓴 실학의 선구자로, ‘음다육언시’ ‘채다론’ 등의 글을 썼다.
- 허난설헌(1563~1589):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다. 차를 즐겨 ‘춘경(春景)’ 등의 다시 여러 편이 전한다.
- 허균(1569~1618): <홍길동전>을 썼으며 천추사ㆍ동지사 등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차를 즐기고 다시도 몇 편 남겼다.
- 목대흠(1575~1638): 호는 다산(茶山)과 죽오(竹塢). 강릉부사를 지낸 차인으로 다시가 여러 편 전한다.
- 정철(1536~1593): 어려서 궁중에 출입할 때부터 차를 마셔 다시 몇 편이 전한다.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남겼다.
- 김육(1580~1658):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으며 영의정을 지낸 차인이다. <유원총보(類苑叢寶)>에 차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 취미대사(1590~1668): 부휴와 벽암대사에게 수학한 선학(禪學)의 대가로, 다시를 남겼다.
- 윤선도(1587~1671): 긴 유배생활 속에서도 강호연파와 어울리고 호연정(浩然亭)에서 차를 마시는 풍류를 누린 차인이다.
- 김우옹(1540~1603): 퇴계 문인으로, 다시를 남겼다.
- 중관대사: 임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차를 즐겨 다시를 지었다.
- 백곡대사: 안심사에 주석하고 차를 즐겨 마셨으며 다시가 여럿 전한다.
- 유성룡(1542~1607):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영의정에 올라 임란을 치룬 명상(名相)이다. 차인으로 다시도 몇 편 전한다.
- 심동구(1594~1660): 심양에 다녀와 차를 즐겼으며 다시(茶詩) 몇 편이 <청봉집>에 전한다.
- 유형원(1622~1673): 실학에 전념했으며 중농적(重農的)인 면을 강조해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반계수록>에서 다색(茶色)의 정리와 궁궐에 바치는 차의 양에 관해 쓴 것이 있다.
- 홍만선(1643~1715): 실학자로 당쟁에 휩쓸리지 않는 차인이었다. 그는 <산림경제(山林經濟)> 2권에서 ‘다탕법(茶湯法)’을 썼다.
- 이상일(1612~1666): 청에 다녀와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다시 ‘옥전다중(玉田茶中)’을 남겼다.
- 남용익(1628~1692): 이조판서를 지낸 문인으로, <부상록(扶桑綠)>을 썼는데, 다옥을 지나며 천지차 다공(茶貢)을 받은 얘기가 있다.
- 함월해월(1691~1770): 환성지안의 의발을 받았고 차와 선을 함께 한 스님이다. 다선실(茶禪室)과 다실을 읊은 시가 전한다.
- 안정복(1712~1791): 실학자로 <잡동산이(雜同散異)>라는 책에서 혼례 때의 다례(茶禮)와 차 마시는 것을 기록했다
- 연담대사(1720~1799): 어려서 고아가 돼 상월 등의 스님들께 수참했다.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
- 지환화상: 화엄사 주지를 지냈으며 범음집(梵音集)에 ‘다각(茶角)의 축원문’에 대법회 때 불상에 유차(乳茶)를 올린다고 썼다.
- 최눌(1722~1795): 용담, 상월 등의 스님께 배우고 심성론과 화엄품목 한 편을 지었다. 차를 즐겨 다시도 남겼다.
- 정선(1676~1759): 호는 겸재. 산수사생의 진경산수의 세계를 그렸으며 몇 점의 다화(茶畵)를 남겼다.
- 이긍익(1736~1806): <연려실기술>에는 송다(宋茶)에 관한 것에서부터 전고(典故)에 차를 쓰는 것과 기타 왕실에서의 차에 관한 것 등을 기록했다.
- 이덕무(1741~1793): 중국을 다녀와서 실학에 몰두했고 <청장관전서>에 수많은 다시와 다사를 남겼다.
- 김홍도(1760~?): 호는 단원. 차에 관한 그림 ‘시명도(試茗圖)’ ‘전다한화도(煎茶閒話圖)’를 비롯해 수많은 다화를 남긴 차인이다.
- 이인문(1745~1821): 구도의 특이함과 독특한 준법으로 ‘선동전다도(仙童煎茶圖)’ ‘소선도(嘯仙圖)’ 등 다화 여러 편을 남겼다.
- 유득공(1749~?):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작설차 얘기가 나온다. <발해고>도 저술했다.
- <증보산림경제>: 유중임이 찬술한 책으로 다탕(茶湯)과 백산차에 관해 썼다. 다관과 다종(茶鐘)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 박제가(1750~?): 박지원의 문하로 중국에 네 번이나 다녀왔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유한 차인이다. <북학의(北學議)>에 실학사상을 담았다.
- 영수합 서씨(1753~1823): 홍인모의 부인으로 차인이었다. 자녀들 모두 차를 즐겼고 그의 다시 여러 편이 전한다.
- 홍인모(1755~1812): 우부승지를 지냈고 경사, 음약, 의약에 통달했으며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
- 이상계(李商啓)가 쓴 가사로 ‘월하팽다(月下烹茶)’를 노래했다.
- 빙허각 이씨(1759~1824):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썼다. 여기에 차를 생활과 연결한 다백희(茶百戱), 대용차, 다식, 다선고(茶仙姑) 등의 얘기를 담았다.
- 정약용(1762~1836): 정치, 경제, 지리, 경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우리 차문화의 중흥에 태산북두(泰山北斗) 같은 차인이다. 초년부터 차를 즐기다 강진 유배 후 아암 스님을 만나 차에 깊이 빠졌다. 이후 초의를 가르치고 <동다기>를 썼다. 해배 후 저서가 오십여 권에 이르며, 그 중 차에 관한 것도 많다. 특히 그가 만든 다신계절목과 다신계는 훗날까지 지속되었다.
- 조수삼(1762~1849):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며 시명(詩名)을 떨쳤다. 문집에서 해남에 황차가 있다고 했으며 다시 수 편이 전한다.
- 백파긍선(1767~1852): 거일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에서 개당해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宗主)가 된 차인으로 다게(茶偈)가 전한다.
- 신위(1769~1847): 조선 문인으로 일찍이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거기에 더해 선(禪)에 몰입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차를 즐겨 다수 100수를 넘게 남겼다.
- 혜장(1772~1811): 대둔사 대강사로 차를 즐겨 다산과 교분을 맺고 그에게 차를 보냈다. 다산이 적지에서 위로를 받고 그를 위해 다시를 많이 남겼다.
- 김정희(1786~1856): 시서화의 명인으로 호를 완당, 추사, 노과 등 많이 가졌다. 중국을 다니며 문인들의 다풍을 섭렵했고 초의와 만나면서 우리 차도 즐겼다.
- 초의의순(1786~1866): 대둔사 13대 대종사. 다산을 인연으로 중앙무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차를 중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다신전> <동다송>을 썼고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 이규경(1788~?): 이덕무의 손자로 <도다변증설(도茶辯證說)>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었다.
- 김명희(1788~?): 추사의 동생으로 서예가다. 차를 즐겼다.
- 홍원주(1791~?): 호를 유한당이라고 한 여류 차인이다. 어머니 영수합 서씨의 영향으로 일가가 모두 차인이었다.
- 철선혜집(1791~1858): 초의와 같은 시기 스님으로 교와 선에 밝고 문집에 <우증초의화상> 등 다시가 전한다.
- 홍현주(1793~1865): 정조의 사위로 해거도인(海居道人)이라 호를 했다. 초의에게 청해 <동다송>을 짓게 하고 자신도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 숙선옹주(1793~1836):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해거에게 하가한 차인으로 그때 다모를 데리고 왔다. 다시를 남겼다.
- 이상적(1804~1865): 추사의 문인으로 호는 우선(藕船)이라 한 역관이다. 중국을 자주 다녀와 ‘세한도’를 전하도록 했고 백산차에 관한 다시를 지었다.
- 김홍도(1760~?): 정조 어진을 그리고 현감을 지낸 화원이다. 강렬한 개성으로 자신의 경지를 개척했다. 많은 다화를 남겨 차문화 발전을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 허유(1809~1892): 서화가로 호는 소치(小癡). 초의와 추사에게서 그림과 글씨를 익혀묵죽과 모란에 능했고 운림산방에서 차를 즐겼다.
- 범해각안(1820~1896): 대둔사 13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선과 차를 융화시켜 추앙을 받는다. 다시 수십편이 전한다.
- 금원당 김씨(1817~?): 김덕조의 소실로 <호동서락기(胡東西洛記)>를 썼다. 운초, 죽서 등 여류문인들과 시문을 즐겼으며 다시가 전한다.
-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개화운동가. 유럽을 여행한 후 <서유견문록>을 쓰고 서양인들의 티파티를 소개해 당시 다화회에 영향을 주었다.
- 금명보정(1861~1930): 송광사 스님으로 범해각안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자(字)를 다송자(茶松子)라 했으며 평생 차와 함께 살았고 다시 80여수를 남겼다.
- 이능화(1869~1943): <조선불교통사>에서 장백산에서 백산차(白山茶)가 나온다고 했다.
- 박한영(1870~1948): 법명은 정호(鼎縞), 한용운 등과 임제종 정통론을 주장하고 조선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며 불교강의를 한 차인이다.
- 오효원(1889~?): 여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시재(詩才)가 있었고 시 470여 수가 담긴 <소파여사시집> 안에 다시 6편이 전한다.
- 박영희(1892~1990): 대둔사를 떠나지 않고 초의의 맥을 받았다는 응송(應松) 스님이다. 한국의 전통차 보급에 애썼고 <동다정통고(東茶正統考)>를 썼다.
- 김범부(1897~1966): 동양철학자로 동양대학 출신이며 불교철학에 심취한 차인이다. 차를 즐기고 시를 잘 지었다.
- 최익현(1833~1906): 문신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논박하다 귀양 가고 후에 단발령에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을사조약 후 의병을 모아 투쟁했다. 그의 상소 중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차나 과일을 왕이 들지 않도록 하는 대목도 있다.
유건집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 조선시대 1~20 《다도, 차의 유래와 역사》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