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차와 예절

茶道 이야기

맑은물56 2008. 2. 1. 11:21
다도(茶道) 이야기
조선시대의 다인(茶人)

 - 정극인(1401~1481):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각(茶角), 다헌(茶軒)이라 했다. <불우헌집>에서 사헌부의 다시(茶時) 이야기를 썼고 상춘곡을 지었다.

 - 서거정은 조선 초의 학자로 호는 사가정(四佳亭)이었다. 중국에 다녀와서 차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사잠상인혜작설차’를 비롯한 다시 수편이 전한다.

 - 남효온(1454~1492): 호는 추강(秋江). 김시습과 교유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했으며 차를 매개로 더욱 가깝게 지냈다. 다시 ‘은당자다(銀鐺煮茶)’가 유명하다.

 - 조위(1454~1503): 호는 매계(梅鷄). 성종의 총애를 받은 점필 문하의 차인으로 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시 ‘가섭암’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김수동(1457~1512): 호는 만보당(晩保堂).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인이다. 예서를 잘 쓴 차인으로 ‘야좌유음(夜坐有吟)’에는 차겨루기 얘기도 나온다.

 - 정희량(1469~?): 호는 허암(虛庵). 무오사화 때 유배된 후 현허(玄虛)한 사상에 심취한 차인이다. 그의 ‘야좌전다(夜坐煎茶)’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다.

 - 이목(1471~1498): 호는 한재. 김종직의 문하로 사부(詞賦)에 뛰어났다. 중국을 다녀오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차를 좋아해서 명문인 <다부(茶賦)>와 다시를 남겼다. 다선(茶仙)으로 추앙 받는다.

 - 서경덕(1489~1546): 조선의 문인으로 호를 화담(花潭)이라 하고 수차의 벼슬을 고사하고 은거하여 차와 술을 즐긴 차인이다.

 - 정사용(1491~1570): 조선의 문인으로 명문(名門) 출신이며 호를 호음(湖陰)이라 했다. 중국에 두 번이나 다녀온 차인으로 다구(茶甌) 같은 용어가 글에 나온다.

 - 보우대사(1509~1565):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추천으로 봉은사 주지가 되어 선종사찰로 지정했다. 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많은 다시를 남겼다.

 - 서산대사(1520~?): 법호는 청허(淸虛), 법휘는 서산(西山),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승과에 급제하여 교종선종판사가 됐고 봉은사 주지를 지냈다. 임란 때 승군을 이끌었고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달그림자 밝으며 시냇물 길어 차 달이는 연기 하늘 가르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 이행(1478~1534): 호는 용재(容齋). 중국에 다녀온 차인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했다.

 - 정관대사(1533~1609): 법휘는 일선(一禪). 서산대사에게 삭발출가했다. 대둔사에서 일생을 보낸 다승(茶僧)으로 여러 편의 다시가 전한다.

 - 최연(1503~1549):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다시 <음다(飮茶)>에는 당시의 음다풍속이 들어있다.

 - 이이(1536~1584): 율곡은 우참찬,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중국에 다녀와서 차를 더욱 애용했다. <격몽요결>에서 ‘유식(侑食) 후 진다(進茶)한다’고 기록했다.

 - 부휴선사(1543~1615): 임란 때 승병(僧兵)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대둔사 송광사 쌍계사 등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벽암(碧岩)ㆍ취미(翠微) 등의 제자를 두었고 다시를 많이 남겼다.

 - 사명대사(1544~?): 직지사로 출가해 묘향산 서산대사에게 배웠다. 임란 때 승군(僧軍)을 이끈 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후에 일본에 가서 강화를 맺었다. 다시가 전한다.

 - 김장생(1548~1631): <가례집람도설>에 자신이 고안안 다선(茶筅)으로 차를 타서 다례를 지내는 내용이 있다.

 - 신식(1551~162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가례언해>에서 점다에 관해 썼다.

 - 장현광(1554~1637): 벼슬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제례 때 차를 드리는 일에 관해 썼다.

 - 이경윤(1545~1611): 화가로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짐. 산수, 인물에 뛰어났고 다화 몇 점이 전한다.

 - 소요태능(1562~1649): 연곡사와 대둔사에 부도가 있고 다시도 전한다.

 - 이수광(1563~1628): <천주실의> <지봉유설>을 쓴 실학의 선구자로, ‘음다육언시’ ‘채다론’ 등의 글을 썼다.

 - 허난설헌(1563~1589):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다. 차를 즐겨 ‘춘경(春景)’ 등의 다시 여러 편이 전한다.

 - 허균(1569~1618): <홍길동전>을 썼으며 천추사ㆍ동지사 등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차를 즐기고 다시도 몇 편 남겼다.

 - 목대흠(1575~1638): 호는 다산(茶山)과 죽오(竹塢). 강릉부사를 지낸 차인으로 다시가 여러 편 전한다.

 - 정철(1536~1593): 어려서 궁중에 출입할 때부터 차를 마셔 다시 몇 편이 전한다.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남겼다.

 - 김육(1580~1658):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으며 영의정을 지낸 차인이다. <유원총보(類苑叢寶)>에 차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 취미대사(1590~1668): 부휴와 벽암대사에게 수학한 선학(禪學)의 대가로, 다시를 남겼다.

 - 윤선도(1587~1671): 긴 유배생활 속에서도 강호연파와 어울리고 호연정(浩然亭)에서 차를 마시는 풍류를 누린 차인이다.

 - 김우옹(1540~1603): 퇴계 문인으로, 다시를 남겼다.

 - 중관대사: 임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차를 즐겨 다시를 지었다.

 - 백곡대사: 안심사에 주석하고 차를 즐겨 마셨으며 다시가 여럿 전한다.

 - 유성룡(1542~1607):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영의정에 올라 임란을 치룬 명상(名相)이다. 차인으로 다시도 몇 편 전한다.

 - 심동구(1594~1660): 심양에 다녀와 차를 즐겼으며 다시(茶詩) 몇 편이 <청봉집>에 전한다.

 - 유형원(1622~1673): 실학에 전념했으며 중농적(重農的)인 면을 강조해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반계수록>에서 다색(茶色)의 정리와 궁궐에 바치는 차의 양에 관해 쓴 것이 있다.

 - 홍만선(1643~1715): 실학자로 당쟁에 휩쓸리지 않는 차인이었다. 그는 <산림경제(山林經濟)> 2권에서 ‘다탕법(茶湯法)’을 썼다.

 - 이상일(1612~1666): 청에 다녀와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다시 ‘옥전다중(玉田茶中)’을 남겼다.

 - 남용익(1628~1692): 이조판서를 지낸 문인으로, <부상록(扶桑綠)>을 썼는데, 다옥을 지나며 천지차 다공(茶貢)을 받은 얘기가 있다.

 - 함월해월(1691~1770): 환성지안의 의발을 받았고 차와 선을 함께 한 스님이다. 다선실(茶禪室)과 다실을 읊은 시가 전한다.

 - 안정복(1712~1791): 실학자로 <잡동산이(雜同散異)>라는 책에서 혼례 때의 다례(茶禮)와 차 마시는 것을 기록했다

 - 연담대사(1720~1799): 어려서 고아가 돼 상월 등의 스님들께 수참했다.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

 - 지환화상: 화엄사 주지를 지냈으며 범음집(梵音集)에 ‘다각(茶角)의 축원문’에 대법회 때 불상에 유차(乳茶)를 올린다고 썼다.

 - 최눌(1722~1795): 용담, 상월 등의 스님께 배우고 심성론과 화엄품목 한 편을 지었다. 차를 즐겨 다시도 남겼다.

 - 정선(1676~1759): 호는 겸재. 산수사생의 진경산수의 세계를 그렸으며 몇 점의 다화(茶畵)를 남겼다.

 - 이긍익(1736~1806): <연려실기술>에는 송다(宋茶)에 관한 것에서부터 전고(典故)에 차를 쓰는 것과 기타 왕실에서의 차에 관한 것 등을 기록했다.

 - 이덕무(1741~1793): 중국을 다녀와서 실학에 몰두했고 <청장관전서>에 수많은 다시와 다사를 남겼다.

 - 김홍도(1760~?): 호는 단원. 차에 관한 그림 ‘시명도(試茗圖)’ ‘전다한화도(煎茶閒話圖)’를 비롯해 수많은 다화를 남긴 차인이다.

 - 이인문(1745~1821): 구도의 특이함과 독특한 준법으로 ‘선동전다도(仙童煎茶圖)’ ‘소선도(嘯仙圖)’ 등 다화 여러 편을 남겼다.

 - 유득공(1749~?):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작설차 얘기가 나온다. <발해고>도 저술했다.

 - <증보산림경제>: 유중임이 찬술한 책으로 다탕(茶湯)과 백산차에 관해 썼다. 다관과 다종(茶鐘)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 박제가(1750~?): 박지원의 문하로 중국에 네 번이나 다녀왔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유한 차인이다. <북학의(北學議)>에 실학사상을 담았다.

 - 영수합 서씨(1753~1823): 홍인모의 부인으로 차인이었다. 자녀들 모두 차를 즐겼고 그의 다시 여러 편이 전한다.

 - 홍인모(1755~1812): 우부승지를 지냈고 경사, 음약, 의약에 통달했으며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

 - 이상계(李商啓)가 쓴 가사로 ‘월하팽다(月下烹茶)’를 노래했다.

 - 빙허각 이씨(1759~1824):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썼다. 여기에 차를 생활과 연결한 다백희(茶百戱), 대용차, 다식, 다선고(茶仙姑) 등의 얘기를 담았다.

 - 정약용(1762~1836): 정치, 경제, 지리, 경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우리 차문화의 중흥에 태산북두(泰山北斗) 같은 차인이다. 초년부터 차를 즐기다 강진 유배 후 아암 스님을 만나 차에 깊이 빠졌다. 이후 초의를 가르치고 <동다기>를 썼다. 해배 후 저서가 오십여 권에 이르며, 그 중 차에 관한 것도 많다. 특히 그가 만든 다신계절목과 다신계는 훗날까지 지속되었다.

 - 조수삼(1762~1849):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며 시명(詩名)을 떨쳤다. 문집에서 해남에 황차가 있다고 했으며 다시 수 편이 전한다.

 - 백파긍선(1767~1852): 거일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에서 개당해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宗主)가 된 차인으로 다게(茶偈)가 전한다.

 - 신위(1769~1847): 조선 문인으로 일찍이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거기에 더해 선(禪)에 몰입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차를 즐겨 다수 100수를 넘게 남겼다.

 - 혜장(1772~1811): 대둔사 대강사로 차를 즐겨 다산과 교분을 맺고 그에게 차를 보냈다. 다산이 적지에서 위로를 받고 그를 위해 다시를 많이 남겼다.

 - 김정희(1786~1856): 시서화의 명인으로 호를 완당, 추사, 노과 등 많이 가졌다. 중국을 다니며 문인들의 다풍을 섭렵했고 초의와 만나면서 우리 차도 즐겼다.

 - 초의의순(1786~1866): 대둔사 13대 대종사. 다산을 인연으로 중앙무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차를 중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다신전> <동다송>을 썼고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 이규경(1788~?): 이덕무의 손자로 <도다변증설(도茶辯證說)>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었다.

 - 김명희(1788~?): 추사의 동생으로 서예가다. 차를 즐겼다.

 - 홍원주(1791~?): 호를 유한당이라고 한 여류 차인이다. 어머니 영수합 서씨의 영향으로 일가가 모두 차인이었다.

 - 철선혜집(1791~1858): 초의와 같은 시기 스님으로 교와 선에 밝고 문집에 <우증초의화상> 등 다시가 전한다.

 - 홍현주(1793~1865): 정조의 사위로 해거도인(海居道人)이라 호를 했다. 초의에게 청해 <동다송>을 짓게 하고 자신도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 숙선옹주(1793~1836):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해거에게 하가한 차인으로 그때 다모를 데리고 왔다. 다시를 남겼다.

 - 이상적(1804~1865): 추사의 문인으로 호는 우선(藕船)이라 한 역관이다. 중국을 자주 다녀와 ‘세한도’를 전하도록 했고 백산차에 관한 다시를 지었다.

 - 김홍도(1760~?): 정조 어진을 그리고 현감을 지낸 화원이다. 강렬한 개성으로 자신의 경지를 개척했다. 많은 다화를 남겨 차문화 발전을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 허유(1809~1892): 서화가로 호는 소치(小癡). 초의와 추사에게서 그림과 글씨를 익혀묵죽과 모란에 능했고 운림산방에서 차를 즐겼다.

 - 범해각안(1820~1896): 대둔사 13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선과 차를 융화시켜 추앙을 받는다. 다시 수십편이 전한다.

 - 금원당 김씨(1817~?): 김덕조의 소실로 <호동서락기(胡東西洛記)>를 썼다. 운초, 죽서 등 여류문인들과 시문을 즐겼으며 다시가 전한다.

 -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개화운동가. 유럽을 여행한 후 <서유견문록>을 쓰고 서양인들의 티파티를 소개해 당시 다화회에 영향을 주었다.

 - 금명보정(1861~1930): 송광사 스님으로 범해각안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자(字)를 다송자(茶松子)라 했으며 평생 차와 함께 살았고 다시 80여수를 남겼다.

 - 이능화(1869~1943): <조선불교통사>에서 장백산에서 백산차(白山茶)가 나온다고 했다.

 - 박한영(1870~1948): 법명은 정호(鼎縞), 한용운 등과 임제종 정통론을 주장하고 조선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며 불교강의를 한 차인이다.

 - 오효원(1889~?): 여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시재(詩才)가 있었고 시 470여 수가 담긴 <소파여사시집> 안에 다시 6편이 전한다.

 - 박영희(1892~1990): 대둔사를 떠나지 않고 초의의 맥을 받았다는 응송(應松) 스님이다. 한국의 전통차 보급에 애썼고 <동다정통고(東茶正統考)>를 썼다.

 - 김범부(1897~1966): 동양철학자로 동양대학 출신이며 불교철학에 심취한 차인이다. 차를 즐기고 시를 잘 지었다.

 - 최익현(1833~1906): 문신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논박하다 귀양 가고 후에 단발령에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을사조약 후 의병을 모아 투쟁했다. 그의 상소 중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차나 과일을 왕이 들지 않도록 하는 대목도 있다.

유건집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 조선시대 1~20 《다도, 차의 유래와 역사》중에서...

 

현대의 다인(茶人)

이연자 (사)한배달 우리차문화원 원장)
정상구(한국다도협회 회장)
박동춘(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소장)
손민영((사)예명원 이사장)
이정애(종정다례원 원장)
고세연(고세연 차가(茶家)이사장)
선혜스님
유건집
김대성(한국차인연합회 고문)
신운학(화정다례연구원 원장)
설옥자(가예원 원장)

 * 효당 스님(1904~1979)

 현대 우리차 발전 토대 마련

 1904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효당 스님은 15년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6년 다솔사로 출가해 이듬해 환경 선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영남지역에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한 스님은 22년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유학시절 김법린 스님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33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33년 명성여자학교, 34년 광명학원, 36년 다솔사 불교전수강원을 설립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해인사 주지로 주석하고 있었는데 목숨을 걸고 인민군을 설득해 절이 소실되는 위기를 막기도 했다. 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 대표로 선출되고, 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또한 47년 국민대학, 51년 해인중·고등학교, 52년 해인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60년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다솔사에 주석하며 원효 스님의 사상과 교학 복원 연구에 전념했다.

스님은 사천 지역에서 자생하고 야생차 씨앗으로 다솔사 후원에 다원을 조성해 손수 ‘반야로(般若露)’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만들었다. 73년 한국 차도의 입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차도>를 집필했고 77년 1월 15일 국내 최초로 차인들의 모임인 ‘한국차도회’를 발족시켜 우리 차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떤 규범이나 격식, 계층에 얽매임 없이 누구나 차를 즐길 수 있다는 ‘차도무문(茶道無門)’과 다기를 다루는 행위와 그 마음자세를 일컫는 ‘차도용심(茶道用心)’을 바탕으로 한 선차(禪茶)수행을 확립한 효당 스님은 79년 7월 10일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2004. 7. 7 현대불교신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