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6일째로 오전에는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1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새벽 4시에 기상하여 4시3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에 모여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걸치고 함께 하는 새벽 예불은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전정각산에 오르기 위해 6시 20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새벽에 짙은 안개가 끼여 등산이 가능할까 걱정하였는데 예정대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어제 순례길 행군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라고 공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동참하였습니다. 등산길 입구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르키며 스님은 ‘탑터’라고 말씀하시면서 탑에 관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죽어가는 여인의 분소의를 입은 곳에 세워진 탑터 

 

“탑 하나는 부처님의 수행 자리를 기리면서 지은 것이고, 또 하나의 조그마한 탑은 버려진 여인이 죽어가면서 부처님이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죽으면 분소의를 저 분이 입어주시기를 소원하였는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아시고 나중에 분소의를 입으시자 그 여인은 곧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 탑입니다. 부처님은 이 전정각산 지역에서 무려 6년이나 수행하셨기에 이곳저곳 부처님이 머무르시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사연이 있어서 산봉우리마다 탑이 세워졌고 마을 근처에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탑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을에서 가까운 탑들의 경우 훼손이 심각한데 이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집수리 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돌이나 벽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다 갔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보듯이 전정각산은 돌산이지만 부처님이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마도 울창한 숲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는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부정한 땅이라는 뜻인 둥게스와리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이 여기로 오길 꺼려했습니다. 지금은 근처 마을사람들이 밥을 짓는데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베어가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대다수가 산의 돌을 깨어서 먹고 사는데 산의 일부분이 사라질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교의 성지로서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전정각산의 바위들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는 도로 포장용 자갈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재는 정부에서 전정각산을 성지로 보호하면서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도록 지원하고 있고 돌 채취도 금하는데도 실제적으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한참 오르다 보니 마을의 짙은 안개들이 엷어지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좋아지는 듯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전정각산을 오르시면서 “작은 가시나무들이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도 살살 달래면서 털고 오세요. 힘껏 잡아채면 옷의 올이 다 풀려서 상합니다” 라고 하시면서 “여기는 나무들도 척박한 곳이라서 외로워서 사람을 잡으니 살살 달래야 합니다.” 라고 덧붙이십니다. 

 

조금 더 오르니 꽤 큰 웅덩이가 보이는데 물이 뿌옇습니다. 스님께서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십니다. 

 


▲ 부처님이 전정각산에 머무시면서 물을 드셨다는 샘터

 

“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도 이곳에서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마셔 볼래요? 배탈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이곳은 석회석 암반이라서 물이 희뿌였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마셨던 우물은 기슭의 이 조그마한 샘터일 것입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물이 없네요.” 

 

조금 더 가니 바위로 둘러싸인 평안해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 

 


▲ 부처님께서 명상하시던 자리의 탑터 

 

“이곳은 바람을 막아주어서 안온합니다. 아마도 겨울에는 여기서 주로 부처님이 머무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와 저기에 탑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명상하던 자리로서 탑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20분 정도 명상 하겠습니다.” 

 

스님은 몸소 바위에 자리를 깔고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간략하게 명상하시는 법을 알려주시고 함께 명상을 하셨습니다. 

 


 

8호차부터 13호차까지 약 250명의 대중이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명상을 하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이곳에 2500여년이 지나 그 제자인 정토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새롭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명상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명상하셨던 이곳에서 잠깐이라도 명상을 해본 것은 인도성지순례의 큰 공덕입니다. 이 잠깐 동안의 명상만으로도 여러분은 본전을 뽑은 겁니다. 나머지는 인도까지 왔으니까 곁다리로 보는 것이예요.”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서 스님께서는 좌선을 풀고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앉았던 바위 밑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명상 중에 따뜻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이래서 그랬나 보다” 하시면서 웃으셨고 많은 분들이 바위 밑을 들여다 보겠다고 모여 들자 “아이고 이것도 구경이라고 난리다!” 하십니다. 

 


▲ 새벽녘 전정각산 위에 올라 힘차게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위에 기대여 단체사진을 찍고 나자 아래 마을 쪽에서 짙은 안개가 빠르게 올라오는데 장관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사진도 찍지 못할 뻔 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시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습니다.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8시 30분부터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장도연 행자님은 추모문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순례객들도 추모문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설거사님! 부를 때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 줄 채비를 갖춘 선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하셨죠. "세상 살이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어디 살든 나는 정토행자이고 정토행자로 살다 부처님 법다이 살다 죽으면 되지..." 언젠가 옥상에서 전장각산을 바라보고 허허 웃으며 하시던 말씀. 지지리도 못 살아 인간 대접 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땀이 많으신 분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땅을 밟으심은 바로 그 이유였습니까? 중학교 건물 콘크리트 친다고 인도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대야에 시멘트를 이고 나르던 당신의 모습.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모습이 수자타아카데미 전정각산과 더불어 더 큰 무게로 가슴을 누릅니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 남아 있는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 설성봉 거사님! 부처님 고행하신 전정각산 바람따라 네이란자라강 흐르는 강물따라 몸 편히 누이시고 고이 가소서! 빛으로 돌아오소서!" 

 

그리고 유수스님의 염불과 함께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척박한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무장 강도의 총격에 숨진 거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빛으로 돌아오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재를 지내고, 설 거사님의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인도JTS를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부다가야의 외국절 스님들 그리고 이 지역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내빈들이 21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가 열리는 쁘락보디홀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인도어로 진행되었고 오늘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하나 신나고 재미있고 멋졌습니다. 

 


 


 


 


 

정말 다채롭고 인상적인 인도 공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때로는 인도 음악에 때로는 한국 전통 음악에 맞추어서 신명나게 즐기는 모습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인도 남자 아이들의 힘차고 멋진 군무에 보살님들의 탄성과 박수가 커 보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태권도 실력도 뽐냈습니다. 한국말로 “하나”, “둘”, “태권” 하는 소리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저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에서 어제까지 관광지에서 보았던 구걸하는 인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교육한 힘은 컸고 기적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한참 신나게 공연을 즐기고 드디어 스님께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먼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면서 감사의 말씀을 하는데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말씀하면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오랫동안 지원해 주셨던 미얀마 스님을 위시하여 근처의 베트남, 방글라데시, 티벳 스님들 그리고 지역 유지들 그리고 학교를 세울 당시 땅을 보시하였던 이곳의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사람들, 하나라도 빠질세라 스님의 세심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1993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3번이나 무장강도가 들어서 설성봉 거사님이 총에 맞고 돌아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부다가야 스님들이 오셔서 위로하였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경찰서장님도 이곳의 치안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15개 동네 1만여명의 주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이제는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결핵환자가 거의 없어졌고 유아 사망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핸드펌프 설치로 식수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둥게스와리  아이들도 교육시키면 다른 도시의 어느 아이들과 똑같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다면 구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듯이 이 아들들도 교육 받으면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부처님처럼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꽃목걸이를 걸고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학교를 세우신 스님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스님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하고 있었을 아이들인데...’ 순례객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 

 


 

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유미죽, 뿌리, 달 그리고 오렌지를 담아서 야외 잔디밭에 조별로 올망졸망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식사를 해봅니다. 

 


 


▲ 인도 아이들처럼 인도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

 

점심식사 후에는 직접 마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약 500명의 순례객들이 각각의 마을로 나뉘어져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위에 올려져 있는 접시와 냄비가 갖고 있는 살림의 전부라고 합니다. 

 

방문한 마을의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때로 몰려와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사탕이나 초콜렛을 원하는 듯 했습니다. 안내해주는 법사님이 “아이들에게 자꾸 무엇을 주지 마세요.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지 마시고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게 해주세요.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희 JTS에 주시면 저희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해주시는데 JTS가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두르가푸르 마을을 방문해 부엌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님. 

 

직접 들여다 본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깜깜한지 놀라웠고 염소나 닭과 함께 생활해서 염소 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는가 싶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사진 촬영에도 응하고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였습니다. 순례객이 직접 방문한 집은 모두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이였는데, 인도JTS에서 제공하는 구호물품을 함께 나눠주었습니다. 

 

방문 후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지만 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위생적이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잠깐 시간을 내셔서 JTS에서 수자타아카데미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새책 <지금 여기 깨어있기>를 선물하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인도JTS 활동가들에게 새책을 선물하고 기념사진 촬영. 

 

저녁 식사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저녁 예불 후 강당에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과 더불어 둥게스와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한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

 

스님께서는 각 조별로 나온 의견들에 대해 대답을 해주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3일 됐는데 생활할만 해요? 힘들지만 마을 사람이 볼 땐 학교가 어떻게 보일까요? 궁궐처럼 보입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사는 곳을 보면 왕궁에 사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 곳에 사는데 여러분들은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천당에 가도 며칠만 살면 또 힘들다고 할 거에요. 

 


 

여러분들이 보기에 땅이 넓으니 농사도 제대로 짓고 텃밭도 만들면 좋겠다 제안하셨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왜 땅이 비어있겠어요? 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기 때만 비가 내리고 다른 때는 비가 안 와요. 또 이 지역은 비가 오면 금방 빠져버려요. 좋은 점은 홍수가 절대로 안 난다는 거에요. 학교 운영하는 데에는 좋은 조건입니다. 습지가 없고 물웅덩이가 없으니 모기가 적거든요. 그러나 농사 짓는 데에는 부적절합니다. 지하수 파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식수 정도는 핸드펌프로 파는 것이 괜찮은데 농업용수를 전기로 펑펑 올리게 되면 지하수면이 낮아지고 그러면 그 나마 조금 있는 나무들도 다 말라버립니다. 환경적으로 검토했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또 들판에 물이 잘 공급되는 땅을 가진 분이 말하길 ‘농사 지어서 남는 게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물을 발전기로 끌어 올려서 농사 짓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경제성이 없어요. 늘 주민들이 우리에게 양수기를 설치해달라고 해서 시범적으로 한번 해줬는데 운영이 안 돼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양수기를 결국 방치하더라구요. 집집마다 핸드펌프로 올려서 텃밭 가꾼다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물물 파서 채소를 가꾼다는 건 현실성이 없어요. 

 

여긴 원래 사람 살 수 있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데 왜 사람이 사느냐면 보통 마을은 양민이 100명 살면 한쪽 구석에 천민이 100명이 살아요. 천민들이 양민 동네에 가서 일해주고 먹고 살지요. 여기 산 주위에만 천민 집단 부락이 있어요. 평지에는 천민만 있는 집단 부락이 없어요. 항상 양민 주변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여기 살아보면서 사정에 맞게끔 주택개량을 해야 해요. 제가 주민들에게 물어봤어요. 집짓는 비용을 빌려 준다 치고 1년에 얼마나 갚을 수 있겠느냐 했더니, 1000루피 갚을 수 있다고 해요. 집 짓는데 3만 루피를 빌려준다면 이자 없이 무이자로 빌려준다고 해도 30년 갚아야 해요. 그런데 3만 루피로 집을 지을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15만루피가 드는데 빌려주면 150년 동안 갚아야 해요. 불가능해요. 여러 채의 집을 지으면서 실험해봐야 해요. 돈도 적게 들고 짓는 기술도 간단한 방식으로 연구해야 해요. 

 

그리고 건조한 지역에도 자라는 식물을 개발하는 거에요. 실험농장을 마련해서 지하수를 파지 않고 물을 적게 주고도 자라는, 그래서 황무지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농법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방목은 안 됩니다. 풀이 없어서 소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를 다 먹어버려 나무를 죽이게 됩니다. 

 

학교에서 공사를 계속 하는 것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공사를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마을개발 자원봉사자에요. 학교, 병원, 마을개발 이 세가지 활동 중에서 마을개발이 제일 답보 상태예요. 경험과 아이디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와서 해결해 주었으면 해요.

 


 

아이들 문맹퇴치는 100프로 달성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때부터 노동을 해야 농사일이든 노가다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노동을 하지 않아 평생 룸펜이 되기 쉽습니다. 핸드폰도 구해야지 자전거도 타야지 소비성이 더 늘어나요. 이런 걸 보면 제가 교육을 해놓고도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기숙사에 아이들 두는 것도 중지했어요. 여기서 생활하면 자기집에서 생활을 못 합니다. 주간에는 반드시 집에 가서 농사 짓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학교 와서 잘못 물들면 집에 가서 농사를 못 지어요.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농사 일할 바에야 학교 뭐하러 다녔나’ 하는 소리를 듣고, 도시 취업은 쉽지 않아요. 이들이 취직할 수 있는 건 경찰, 군인, 공무원 밖에 없어요. 개인사업을 하려면 카스트가 바이샤라야 되고 아버지가 장사를 물려줘야 되는데 자본과 계급이 둘 다 안 돼요. 공무원은 자리가 있는데 시험 쳐서 걸리는 것도 어렵지만 뒷돈을 대야하는데 학교에서 뒷돈까지 대주기는 어려워요. 공부를 시켜도 이런 문제가 있어요.

 

노동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되면 월급이 두배가 돼요. 동네에 미장하는 일은 수요가 언제든지 있어요. 공사장에서 보조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건 어려움이 있어요. 계속 막노동만 하게 되니까요. JTS에서 건축회사를 하나 만들어도 좋은데 할 사람이 없어요. 

 

마을 주민들도 어차피 소비를 해요. 시멘트, 벽돌, 볏짚도 돈주고 사야 합니다. 싸게 구입하려면 공동 구매를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협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을금고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강도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100루피만 있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에요. 고 설성봉 거사 이후 10년 동안 수자타아카데미 안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서 지금은 또 치안이 좋은 편이에요. 동네에 가보면 집집마다 연장이 전부 JTS 연장을 씁니다. 일하다가 호미든 낫이든 담장 너머로 던지는 겁니다. JTS가 연장 보급은 많이 했어요. (웃음)  

 

도난 사고는 훔쳐가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훔칠 수 없는 시스템이 되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면 왜 줄을 안 서고 무질서하게 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불이익이 닥칠까 싶어서 그런 거에요. 안 주든지, 주면 줄을 세워서 끝까지 주든지 해야 해요. 그리고 다 줄 때까지 못 일어나도록 하고 주면 질서가 잡혀요. 

 

제안해주신 것처럼, 여기서 공부해서 여기서 취직이 된다면 도시로 나가지 않아도 되죠. 이 마을에서 자라서 이 마을에 환원되게 하려면 여기에 수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초 자재가 없어요. 관광사업은 잘못하면 사람을 나쁘게 만들 우려가 있고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교육을 통해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직을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현지 상황을 기반으로 주택개발, 협동조합과 같은 마을 공동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봉사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얘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여기서 멈춰 주어야 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도 한국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고자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은 한국에서는 경제적으로 약자일지 모르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많이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둘째는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면 충분히 나눌 수 있습니다. 1년에 20만원이면 여기 한 아이가 일년 동안 입고 먹고 교육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이 있더라도 아끼면서 소박하게 살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극빈자 한 사람은 살리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에 이미 화려한 궁중 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농민들과 노예들의 고달픈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간파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몸소 소박한 삶을 사시어서 이 모순을 타파하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 경험이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자타아카데미 개교기념식과 마을 방문을 하면서 열악환 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JTS의 사업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순례단이 의문을 가진 점들에 대해서 스님께서 다시한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아, 정말 온갖 고민과 실험을 다 해보셨구나’ 알게 되었고, ‘나도 한번 기여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인도JTS의 사업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스님께서 1시간 동안의 열강을 해주시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부터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10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신 영축산, 죽림정사, 열반하신 후 500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결집한 칠엽굴,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나란다 대학 등이 있는 라즈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