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드가야 대탑

 

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5일째, 둥게스와리에서의 첫 새벽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 가사를 수한 500명 대중이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 강당에 모여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니 정말 출가수행자가 된 듯 결연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8km 떨어진 보드가야로 향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욕망을 좇아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모두 욕망에 매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을 끝내고 전정각산에서 하산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쓰러져 수자타의 유미죽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보드가야로 가서 성도에 이르신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새벽 달빛이 밝아 순례단 일행은 “손전등을 끄고 가봅시다”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온전히 달빛에 의존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트기 전의 마을 길을 걸으며 순례단을 위해 무변심 법사님이 달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노래가락을 선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순례단이 지나가는 두르가푸루 마을을 비롯한 4개 마을에 수자타 유치원이 있었는데 갈수록 기술이 발전해 가장 마지막에 지은 라훌라가르 유치원이 가장 잘 지어졌다고 합니다. 새벽 달빛으로 보는 유치원의 작고 아담한 정경 속에 건물을 지은 봉사자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 고행을 마치고 부처님이 건너셨다는 네이란자라강을 건너며 

 

인도는 지금 건기로 네이란자라강이 대부분 모래바닥을 드러냈지만 강물이 얕게 흐르는 곳에 다다른 스님께서 징검다리를 찾아 날아다니듯 훌쩍 건너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건너기가 어려워 스님께서 “신발 벗고 맨발로 건너오세요” 라고 하셔서 일제히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발로 젖은 모래바닥의 시린 기운을 전해 받으니 정신이 또렷해집니다. 

 

스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천국에 이른다”면서 “우리는 발만 담그고 건넜으니 그 발만 천국에 가겠다”는 우스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을 내려와 강 건너편 쪽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건기에는 강 건너편 쪽에만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경전내용이 실제와 꼭 맞다”고 하셨습니다. 강 너머 마을로 들어서니 부지런한 마을 주민들이 새벽부터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몸을 덥히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지나면서 부처님이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시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터를 지났습니다. 탑이 모두 허물어져 있고 쓰레기만 쌓여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셔서 알 수 있었지 자칫하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부처님의 유적지가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 부처님이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탑터

 

스님은 부처님 성도 직전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덕인지에 대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수자타는 부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배고파 쓰러진 수행자에게 유미죽을 끓여 보시했기 때문에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인 줄 알면 너도나도 대접하려 했기 때문”이라면서 걸인에 대한 적선과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인도의 구걸하는 아이들에 대해 주어도 문제이고 주지 않아도 문제였는데, 이 아이들이 거지가 되지도 않게 하면서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시다가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공양처럼 이들 중 부처가 있을지 어찌 아느냐” 하며 웃으셨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던 중에 철문과 벽으로 경계 지워진 공간이 나타났는데, 들어가니 문밖이나 마찬가지로 풀만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자리를 깔고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준비해 준 주먹밥과 단무지 그리고 삶은 계란과 오렌지 등으로 아침식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이 장소를 명상센터 건립부지로 구입했으나, 건축을 총괄할 사람을 못 찾아 몇 년째 계획이 미뤄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로 향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법문을 듣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

 

스님은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를 나서며 문 앞에 80명쯤 되는 많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사탕을 한 웅큼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법문에서 자주 말씀하셨듯이 스님께서는 사탕을 나눠주시며 ‘다음 세상에는 스님의 제자가 되어 인도 불교 부흥을 함께 일구자’고 되뇌셨을 것 같습니다.  

 


▲ 성지에서 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

 

명상센터를 나와 조금 가니까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탑터가 나왔습니다. 순례단은 탑 주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 수자타의 공양탑 주위에 수자타 탬플이 있었는데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뒤 이 절은 지금까지도 힌두교 절로 되어 있습니다. 수자타 탬플 이름은 그대로인데 불교 절이 아니라 힌두신을 모신 절이라고 하니 마음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 수자타의 공양탑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봉독.

 

수자타 탬플을 지나 강변에 있는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로 갔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의 수행터에 이르자 스님은 웃으시며 “500명 제자가 정말 함께 수행을 하였는지 확인해 보자”며 들어가십니다. 당시 우르벨라 가섭은 80세로 이 지역에 명망이 있는 지도자였기에 35살 부처님은 풋내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우르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부처님께 머물 곳이 없다며 거절을 하자, 부처님은 “어떤 자리도 좋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은 부처님을 ?아낼 심산으로 “화룡(코브라 뱀)이 있는 곳 밖에 없다”고 해서 부처님은 화룡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우르벨라 가섭은 ‘좋은 수행자를 잃었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사히 자고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360번의 신통력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루벨라 가섭은 젊은 수행자가 훌륭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해서 쉽게 교화되지 않았습니다.  

 


▲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

 

어느날 성대한 제사를 지낸 후 부처님께 “당신이 보았으면 좋았는데” 하면서 자랑하던 우르벨라 가섭에게 부처님은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으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우르벨라 가섭은 자신의 질투심을 알아차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500명의 제자들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지금까지 사용하던 제사 용구를 모두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물에 떠내려 오는 형님의 제사 용구를 보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염려하여 쫓아온 동생 나디 가섭은 형님의 말을 듣고 300명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막내 동생 가야 가섭 역시 200명의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화룡(코브라) 굴을 바라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머무셨다는 화룡굴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를 지나자 밀밭이 펼쳐졌습니다. 수자타 마을은 땅이 비옥해 논밭이 많았습니다. 물안개가 가득한 논두렁길 위를 오백대중이 묵묵히 한줄로 걸으니 다시한번 장관이 펼쳐집니다. 

 

 

▲ 논두렁길 위를 오백 대중이 함께 걸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자타의 집이였던 곳에 세워진 수자타의 탑을 참배했습니다. 탑을 한바퀴 돌면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 

 


▲ 수자타의 집터에 세워진 탑. 

 

4시간을 걸어 발바닥과 종아리와 어깨가 아플 무렵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오백 대중은 일제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든 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입장을 하였습니다. 

 


 

행렬의 선봉에 스님께서 서시고 그 뒤에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과 향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다시 대탑을 돌아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 그늘 넓은 터에 이르러 예불을 올렸습니다. 

 


 

인도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방문객들도 모두 스님과 정토회 순례단의 예불 모습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 부처님이 앉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예불을 올립니다. 

 

보드가야 대탑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불탑으로 ‘마하보디 수투파’라고도 합니다.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절이 되었는데 미얀마 왕이 거금을 주고 관리 권한을 얻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강변이였어요. 부처님께서는 강변의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으셔서 이곳에서 마지막 정진을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하십니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즉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49일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9일 동안 용맹 정진을 하셨으니까 적어도 49일은 음식을 전혀 안드셨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마지막날 밤에 욕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타화자재천궁이 흔들흔들 했어요. 그래서 자재천왕이 저 인간세상을 둘러보니까 한 미미한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마왕의 세 딸을 보내서 욕망으로 유혹을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락’이 곧 ‘고’임을 아신 것입니다.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곧 고임을 꿰뚫어 아신 겁니다. 부처님의 손끝이 마왕의 세 딸에게 향하자 세 딸은 노파로 변해서 부끄러워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미동이 없자 두번째는 마왕이 일만 군대를 보내서 부처님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 수행을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창과 화살이 부처님 몸에 닿자 다 연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왕은 부처님을 항복시킬 수 없다고 느끼고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수행을 포기하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저 같으면 아무래도 받았을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자재천왕의 자리를 저한테 주면 통일을 금방 이루게 되겠지요? 성평등도 금방 실현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될테니까요. (웃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붓다의 수행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자재천왕이 붓다에게 “해탈이나 열반이란 것은 그런 말만 있지 실제로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자재천왕이 이를 비웃자 부처님께서 “대지의 신이여, 나의 모든 공덕을 증명하라”고 하니까 대지의 신이 일어나서 붓다가 과거 생애에 한량없이 지었던 수많은 공덕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마왕이 부끄러워 도망갔습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수하항마상입니다. 

 

마왕을 항복받고 새벽녘 동쪽에 샛별이 뜰 때 붓다께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주일 간 깨달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소를 조금 옮겨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를 응시하면서 일주일 간 선정에 들었습니다. 세 번째 주에는 보리수 나무 주위를 천천히 행선하면서 열아홉 발자욱을 왕복하며 걸었습니다. 이 대탑의 북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걸었다는 곳에 연꽃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네 번째 주에는 부처님 몸에서 광명이 났다고 해요. 그리고 대탑의 동편 정문 앞에 계실 때 어떤 바라문이 지나가면서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원래 정답이 있는 질문이였어요. 가장 고귀한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윗대로 7대까지 브라만의 피만 섞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가장 성스러원 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바라문이 자기 생각과 틀리니까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 지나가버렸다고 해요.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에 붓다를 친견하지 못한 거죠. 여섯째 주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이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는데 그 때 문차린다 용왕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감싸서 비를 맞지 않게 보호했다고 합니다. 일곱째 주에는 두 상인이 지나가면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두 상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께 공양만 올렸지 법을 청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복은 받았지만 해탈은 얻지 못했습니다. 

 


 

바라문처럼 종교인이거나 지식인은 고정관념이 많아서 법을 듣지 못했고, 사업가들은 돈 버는데만 사로잡혀서 복을 구하느라 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강가강을 건널 때 가난한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법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성도 후 7주간 있었던 이야기를 법사님들이 다 안내해 드릴테니 한번 둘러보세요.

 

그러니까 49일 동안 법열을 느끼는 시간을 갖고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최대한 98일 동안 밥을 안 먹었다고 볼 수 있죠. 일곱째 주의 첫 번째날에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면 적어도 91일 동안 공양을 안드신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단식을 해도 적어도 언제까지는 가능하겠습니까? 석달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석달을 해보려고 했는데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70일까지는 단식을 해봤었어요. 20일만 더 해봤으면 죽는지 사는지 점검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웃음)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파리한 몸으로 바로 성도하시면 이 고행이 성도의 원인이라고 오해를 하겠죠.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시고 성도를 하신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여기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이어서 당시의 부처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경전 독송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상상을 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밀려왔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그룹별로 법사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대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들을 둘러보고 벽화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다시 대탑 앞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각자 108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불교도인들이 많았고 사람들마다 절하는 방식도 다양해서 전세계의 불교도인들이 모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청년들에게 무차린다 용왕과 부처님의 일화를 설명해 주고 계신 유수 스님

 


▲ 대탑 주위에 그려진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보수 법사님

 

그리고 대탑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성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할 수 있었음에 기쁜 마음이 되어 활짝 웃을 수 있었습니다. 

 


▲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단체사진. 공양물을 올린 13호 차량의 순례단과 함께.

 

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순례객을 위해 따뜻하게 물을 데워주어서 오랜만에 샤워도 하고, 저녁식사도 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예불을 드리고, 지이바카 병원 2층 홀에 모여 JTS 활동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 

 

현지인 활동가 및 한국인 활동가 소개 후 JTS 21년의 성과를 ppt로 보고, 활동파트별로2014년 3대 뉴스를 전해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육팀의 3대 뉴스는 출석률 높이기, 정부학교 지원, 특별수업 강화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영양식을 줄 때에만 출석율이 높아지고 다른 날은 낮아서 알고보니 아이들이 여러 학교에 등록해놓고 여기저기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 오지 않으면 스웨터를 주지 않는다고 했더니 출석율이 매우 높아졌다고 합니다. 매달 개근상 선물을 주는 등 유치원부터 학교 다니는 습관을 익히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부학교에 대한 문구류 지원 및 아이들의 학습능력에 대한 주기적인 체크를 한다고 합니다. 또 아이들이 학교오는 걸 즐거워할 수 있도록 태권도, 전통무용, 현대무용, 티비시청 등 다양하 특별수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도록 하고 있답니다. 

 


▲ 현지 활동가들로부터 인도JTS 사업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시간

 

마을개발팀의 3대뉴스는 우리마을 서로돕기, 주민생활환경 개선, 소득창출사업이였습니다. “내가 할게요” 라는 뜻의 “함까렝게”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쉬람단이라고 말하는 공동울력을 통해 도로,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마을청소 쉬람단을 만들어 내집앞은 자기가 공사하고 청소하도록 가르치고 있답니다. 핸드펌프 수리를 작년에 성지순례를 온 두 청년의 후원으로 신규 8회, 수리 135회를 했다며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물레공장을 만들어 소득창출사업을 하고 있는데, 물레 중급반을 졸업한 분들이 유치원 교복을 900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을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최동호님은 “인도의 마을이 한국의 60~70년대 생활과 비슷하니, 그때의 아이디어들을 많이 내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했습니다. 

 


▲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인 활동가들

 

그리고 이번 인도성지순례 스텝으로 참가한 전 인도JTS 선배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21년 인도JTS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지바카 병원 초창기부터 21년 동안 함께해 오고 있는 진료담당 까메스와르, 유치원때부터 수자타를 다녔고 지금은 지이바카 병원의 모자보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삼부. 유치원 교감선생님인 인드라짓, 노동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전체 시설을 담당하고 있는 바브랄, 노동학교 출신이고 급식, 자전거를 담당하고 있는 아룬의 인사가 있었습니다. 

 


▲ 9년간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활동하셨던 장영주 행자님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젊은 청년들이 해외 봉사에 지원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는 질문에 각각의 활동가들이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어 다년간 인도JTS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광화 행자님은 JTS의 경험을 자료화하는 작업을 했었고, 장영주 행자님은 9년간 있으시면서 급식 관련일부터 시작해서 마을 가구조사를 통한 기초자료 만들기 작업을 했고, 또 의식이 개선될 수 있도록 뭔가 꺼리를 만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주법사님은 초창기에 파견이 되어서 주로 학교 짓는 일을 많이 하셔서 한국에 오면 십장일을 해보겠다 할 정도였다고 하셔서 모두들 함께 웃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전정각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수자타아카데미 21주년 개교기념식을 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매일 매일이 꽉찬 순례 일정인데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