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십리/ 손순미
십리에 걸쳐 슬픈 뱀 한 마리가
혼자서 길을 간다
희고 차가운 벚꽃의 불길이 따라간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
저 벚꽃 논다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진다
- 월간『현대시학』2011.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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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십리 길이라 하면 전국적으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아래까지 약 십리에 이르는 벚꽃 길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 신작로가 생기면서 화개면장이 주도하여 지역의 뜻있는 유지들의 성금으로 벚나무 1,200그루를 심어 지금의 벚꽃길이 형성되었다. 매년 봄 화개천 따라 양쪽 길이 벚꽃으로 터널을 이룰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꼬옥 잡고 십리 벚꽃 길을 걸으면 한 평생 행복하게 해로한다 하여 '혼례길'이라고도 한다.
젊은 남녀가 꽃비를 맞으며 이 길을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해서 매년 이맘때면 청춘남녀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만큼 이 꽃길은 낭만적이고 인상적이어서 절정기에 한번 찾아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러니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이 사랑했던 이라면 더욱 잊지 못할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어떤 장소와 사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그곳의 빼어난 경치 탓도 있겠지만 대개는 못 잊을 사람과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람과 장소는 서로 맞물려서 그것을 환기하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시인은 그런 벚꽃 길을 생뚱맞게도 ‘슬픈 뱀 한 마리가 혼자서 길을 간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심사가 단단히 뒤틀린 것 같다. 더럽게 좋은 날씨에 염장을 지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분명 누군가를 향한 빌어먹을 그리움일 게다. 촉촉하게 눈시울 붉히는 곱고 애잔한 그리움이 아닌 더럽고 치사한 그리움이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더러운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불온한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진다’고 한다. 저 환한 아름다움에 오히려 내 그리움의 탁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까짓 것 탈탈 비우고 털어내고 싶은데, 사람을 도통 놔주지 않는 지긋지긋하고 몹쓸 그리움. 이건 그냥 손잡고 사푼사푼 콧노래 불러가며 걸어갈 벚꽃 길이 아니다. 저 벚꽃 피고 노는 동안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에 결국 내 격정이 말려들고야 마는 것이다.
권순진
고백 - 손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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