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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巖(연암)을 생각하며 / 임철순 칼럼

맑은물56 2011. 10. 29. 13:52

燕巖(연암)을 생각하며
임철순 2008년 02월 18일 (월) 00:57:38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바람에 유홍준(兪弘濬) 문화재청장이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었고,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 허망한 결말입니다.

그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서문에는 조선 후기 문인 兪漢雋(유한준ㆍ1732~1811)의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 청장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말은 책 덕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당대의 수장가 金光國(김광국ㆍ1685~?)의 화첩 <石農畵苑(석농화원)>에 부친 발문 중 일부입니다.

원문은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 이비도축야)입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 이 세 가지의 껍데기에 있지 않고, 잘 아는 데 있다(故妙不在三者之皮粕而在乎知)”는 말 뒤에 나옵니다. 유한준이 강조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유 청장이 소개한 말을 ‘눈 감으니 보이시네(2007. 10.10)’라는 글을 쓸 때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ㆍ1737~1805)의 ‘答蒼厓(답창애) 2’라는 편지와 함께 인용했습니다. 그 편지에는 눈먼 사람과 花潭 徐敬德(화담 서경덕ㆍ1489~1546) 선생이 나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뜬 장님이 집을 찾지 못하고 울자 화담이 도로 눈을 감고 가라고 일러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갈피를 못 잡겠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내 집을 찾지 못하는 열린 눈은 망상일 뿐이라는 충고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蒼厓가 바로 유한준입니다. 인물사전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본관 杞溪(기계), 자는 曼淸(만청) 또는 汝成(여성), 호는 著庵(저암) 또는 蒼厓. 처음 이름은 漢炅(한경)이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1768년(영조 44) 進士試(진사시)에 합격해 김포군수 등을 거쳐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南有容(남유용)의 제자로 宋時烈(송시열)을 추앙해 <宋子大全(송자대전)>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 저서로 <著庵集(저암집)>이 있고 화가들의 그림에서 그의 題跋文(제발문)이 자주 눈에 띈다.’

연암이 창애에게 보낸 편지는 <燕巖集(연암집)>에 9개가 실려 있는데, 이 두 번째 편지는 겉만 부드러울 뿐 "야, 이 눈뜬 장님아. 이것도 글이라고 썼니?" 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눈뜬 장님이 집을 찾지 못한 것은 색깔과 모양에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이것이 곧 망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연암은 어린아이 가르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먼저 보낸 ‘답창애 1’은 더 심합니다. “보내 주신 책은 양치하고 손 씻고 무릎 꿇고 앉아 정중히 읽었습니다”까지는 좋았는데, 이내 “문장은 기이하지만 사물의 명칭에 중국말을 빌려 쓴 것이 많고 인용한 전거도 맞지 않는 데가 있으니 옥에 티가 되었습니다”라고 통박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짓는 데도 법도가 있다, 글 쓰는 일은 행상이 제 물건 이름을 외치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연암은 “땔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친다면 온 종일 돌아다녀도 나무 한 짐 팔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소금인지 땔나무인지도 모르고 글을 쓰는 멍청아”-그 말입니다. 못 생긴 여인이 越(월)나라 미녀 西施(서시)를 흉내내 얼굴을 찡그리는, 이른바 效顰(효빈)과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성인군자겠지요. 나이도 다섯 살 적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이런 편지를 보냈으니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고 불쾌했겠습니까. 글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연암은 평생 씻기지 않는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두 분은 원래 친했던 사이입니다. 창애의 스승 남유용은 연암의 장인 李輔天(이보천)과 이종간이며, 그의 아들 南公轍(남공철)과는 둘이 다 친했습니다. 창애의 재종숙 兪彦鎬(유언호)는 연암을 여러 모로 도운 지기였고, 창애의 자형 金礪行(김여행)의 아들 金履中(김이중)도 연암과 소시적부터의 친구였습니다. 함께 산에서 노닐기로 했다가 못 만난 섭섭함, 내일 비가 온다고 길 떠나는 창애를 만류하거나 꽃과 나무 심는 법을 알려 주는 편지를 주고 받던 사람들이 끝내 대립한 것은 문학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道(도)와 文(문)을 구별한 창애는 문예 역시 독립된 가치가 있으며, 그런 문예의 모범이 司馬遷(사마천) 班固(반고)로 대표되는 秦漢(진한)의 옛 글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詞章派(사장파)의 입장에서 문예의 독자성을 주장한 擬古文主義者(의고문주의자)였답니다. 현실 언어와 동떨어진 난해한 문체가 유행했던 그 무렵 문장은 漢, 시는 唐(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연암은 “글이란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며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사실대로 쓰는 데 글의 참 맛이 있지, 먼 옛날에서 그 근본을 가져올 이유가 없다. 漢 唐은 지금 세상이 아니며, 班固나 司馬遷이 살아온다 해도 과거의 자신들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진리도 천년 뒤에는 고대의 것이 되고 만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연암에게 창애의 倣古(방고)는 타기할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창애의 재종숙 兪彦鎬도 “그의 글을 보면 法(법)이 끝내 勝(승)하다”고 修辭(수사)에 치중하는 창애를 비판했다고 합니다.

연암의 유명한 法古創新論(법고창신론)에 의하면 참신한 표현을 추구한 나머지 기교 위주로 흘러 수사에 치중하면 안 되고, 옛 글을 본받되 변통할 줄 알아야 하며 새롭게 지어내되 典雅(전아)해야 하는데, 창애는 그렇지 못했던가 봅니다.

젊어서 연암에게 그처럼 당하고 앙심을 품은 창애는 기회가 있으면 해코지를 하려 했습니다. 연암이 43세이던 1780년, 淸(청)을 여행하고 돌아와 저 浩瀚(호한)한 역작 <熱河日記(열하일기)>를 쓴 뒤에는 연암이 淸을 흠모한 나머지 오랑캐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창애는 이를 기화로 <열하일기>의 문장까지 문제 삼아 공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결정적인 대립은 연암이 66세이던 1802년에 일어난 묘자리 분규였습니다. 연암이 할아버지 朴弼均(박필균ㆍ1685~1760)의 산소를 포천으로 옮기고 아버지 朴師愈(박사유ㆍ1703~1767)도 이장하려 할 때, 창애는 그곳이 자기 선조 묘의 정자터였다며 묘를 파헤치고, 15세로 요절한 손자의 관을 박필균의 묘 뒤에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결국 연암은 시비를 피해 양주로 묘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과정은 연암의 차남 朴宗采(박종채ㆍ1780~1835)가 아버지의 행장을 기록한 <過庭錄(과정록)>에 소상하게 보입니다. 박종채는 창애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전적으로 젊었을 때 연암이 그의 문장을 인정하지 않은 탓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嗚呼險矣 此吾家百世之讐)”라고 써 놓았습니다.

연암은 30세인 1767년 아버지 장례 때도 지금 서울의 노원구 일대에 묘를 쓰려다가 鹿川 李濡(녹천 이유ㆍ1645~1721) 가문과 송사를 겪었으나, 영조가 손을 들어준 덕분에 이긴 일이 있습니다. 원한이 생긴 땅에 어떻게 묘를 쓰겠느냐며 그곳을 떠났지만, 이유의 손자는 그 뒤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연암이 과거를 회피하고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암은 총명하고 비범했지만, 지나치게 악을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합니다. 예술가의 호방함과 선비의 고매함을 함께 지녔던 연암은 불의와 용렬을 참지 못하는 호오가 분명했고, 관직에 나가서도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평생 지기였던 처남 芝溪公(지계공) 李在誠(이재성)은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요”라고 연암의 祭文(제문)을 썼습니다.

창애는 죽기 1년 전, 그러니까 연암 타계 5년 뒤인 1810년에 쓴 글에서 “才品(재품)이 絶高(절고)하여 그 文이 저절로 경지를 획득했으며 규칙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해학으로 도피하여 文으로 유희를 삼았다. 儒雅(유아)하고 魁傑(괴걸)한 분이라 하겠다”고 연암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글에서는 “처음 下手(하수) 때는 秦漢의 고문만 숭상하여 莊子(장자) 屈原(굴원) 司馬遷 韓愈(한유)를 섭렵하기 50년에 마침내 얻은 것이 없었으며, 늦게사 道는 六經(육경ㆍ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에 있고 四書(사서ㆍ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온축돼 있음을 깨우치게 된 것이 후회된다”고 젊은 날을 돌이키고 있습니다. 젊다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 안타깝고, 남에게는 위험한 일인가 봅니다.

창애도 일찍부터 문장으로 소문이 나서 “향후 백년간은 이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연암과 동시대인이 된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겠지요. 諸葛亮(제갈양)을 만난 周瑜(주유)처럼.

구한말의 학자 滄江 金澤榮(창강 김택영ㆍ1850~1927)은 연암을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작가’라고 칭송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괴테,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연암이 있다”는 말들도 하고 있습니다. 두 분이 우정을 가꾸며 학문과 시를 논했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원수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암의 사상과 정신은 손자 朴珪壽(박규수ㆍ1807~1876)에 계승돼 金玉均(김옥균ㆍ1851~1894), 兪吉濬(유길준ㆍ1856~1914) 등의 개화파에 전해졌습니다. 유길준은 유한준의 고손자이니 후대에 화해한 셈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습니다.

유홍준 청장은 1년 뒤인 1994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을 내면서 창애의 말을 바로잡았지만, 무엇이든 속편의 교정은 전편의 전파력을 추월하기 어렵습니다. 유 청장은 기억에 의지해 글을 쓰다 보니 착오가 생겼으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 분이 종씨인 데다 발음도 비슷해 조상을 내세운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였다고 해명했습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 갔더니 몽골 여행을 권유하던 교수가 “몽골을 공부하고 가라. 거기서 서울과 같은 즐거움을 찾지 말라.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복하다”고 말하더군요. 글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쓸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쓰는 글이 땔나무인지 소금인지, 연암을 생각하면 글 쓰는 일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다만 이 글이 작년 10월에 쓴 글에 대한 반성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연암과 창애의 관계를 잘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는 것, 남기는 것 (하) - 눈 감으니 보이시네

병원에서 안과 검진을 받던 날, 두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간호사는 안약을 넣어 주면서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15분이 지나자 또 한 번 안약을 넣어 주더군요.

그렇게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동안 불현듯 노산 이은상의 「소경 되어지이다」라는 시조가 떠올랐습니다. ‘뵈오려 안 뵈는 임 눈 감으니 보이시네/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노산이 고안했다는 양장(兩章)시조입니다.

정지용의 시「호수 1」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각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라는 시 말입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그런 표현은 유행가에도 흔합니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 눈을 감아도 그대가 보여 귀를 막아도 그대 숨결이 내 가슴 속에 메아리치듯 들려오죠, 이런 것들 말입니다.

눈을 감으면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안 보이던 것이 새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유명한 글 「답창애(答蒼厓)2」에는 눈먼 사람과 화담 서경덕 선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화담이 집을 잃고 길에서 우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다섯살 때 눈이 멀어 20년이 지났는데, 오늘 아침 밖에 나오자 갑자기 눈이 뜨이고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여서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도 서로 비슷해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화담은 “너에게 집에 가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고 했고,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무슨 일에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이여,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러면 새 길이 열릴 것이니-이것이 연암의 충고입니다. 내 집을 찾지 못하는 열린 눈은 망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은 빛이고 믿음입니다. 인간은 원시시대 이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두려움과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마음 속의 믿음을 형상화해왔습니다. 예수의 초상, 만리장성, 피라미드 모두 다 눈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문명이며 예술 아니겠습니까.

최근 뉴욕타임스가 영화 「밀양」의 이창동 감독을 소개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묘사하는 재능이 있다고 평했습니다. 이 감독 자신도 “나의 최대 관심사는 눈으로만은 볼 수 없는 것을 그려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믿음도 그 중의 하나”라고 「밀양」의 제작의도를 밝혔습니다.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눈이 멉니다. 우리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것, 가진 것을 잃고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 도시가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다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유한준의 말입니다.

도종환의 시 「배롱나무」도 사랑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들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남 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지루하고 먼 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혼자 외딴 섬을 찾아가던 날은/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꽃은 누구를 위해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사랑하면 보인다고/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눈을 뜨든 감든 대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눈을 뜨든 감든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그녀는 항상 그녀/그의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그리움 때문에 눈을 감는 것까지는 좋지만 소경이 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면 과연 그/그녀가 소경이 된 그녀/그를 좋아하고 사랑해 줄까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비현실적인 과장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릴케의 「내 눈을 가리세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을 가리세요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어요/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어요/발이 없어도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어요/내 팔을 꺾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잡습니다/손으로 잡듯 내 심장으로/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러면 뇌가 고동치겠지요/당신이 뇌에 불을 지르면/내 피가 흘러 당신을 실어 나릅니다.’-사랑의 자해공갈과 ‘날 죽여라 죽여’ 수준의 협박이 겁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그럴 때 냅다 물에 빠뜨려 보십시오. 그러면 “아이고, 안 그래도 죽고 싶었는데 잘 됐네, 안녕!” 하고 물 속으로 쏙 들어가겠습니까? 살려고 발버둥치고 개헤엄을 치면서 난리법석을 부릴 것입니다.

그날 검진을 받은 이유는 당뇨 합병증 여부를 알기 위해 안압을 잰 것입니다. 검사를 마친 뒤에도 약기운에 한동안 눈이 침침했습니다. 병원에 올 때 차를 몰고 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지 임 그리워 소경이 되겠다는 엄살이나 응석,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현실은 문학이 아니라 가혹한 것입니다.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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