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나를 찾아 가는 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41

맑은물56 2011. 9. 19. 08:40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141

다시 바꿔서 말하면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가 부처님 공부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자기라 하는 그런 조그만 곳에 갇혀 있지 말고서

우리 마음이 본래로 천지 우주와 둘이 아닌 광대무변한 바로 진리 자체, 사랑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 마음을 그 자리에다 해방을 시켜 놓고서 하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단박에 해방은 안 되겠지요. 그러나 우선 관념만이라도 내가 지금 어두워서 내가 전생에나 금생에 업을 많이 지어서 못 느끼는 것이지 내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부처님께서, 무수한 도인들이, 증명한 것이니까, 그와 같이 만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이다, 바로 그것이 나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지금 괴롭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우리 마음이 근본 마음자리에 가 있지 못하고서 우리 마음이 굴곡(屈曲)되고, 마음이 왜곡(歪曲)되고 우리 마음이 부질없는 미망(迷妄), 무지(無知)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어두워 있는 것입니다. 어느 철인이나 말하기를, 특히 플라톤(Platon)이나 그런 분들이 이제 말할 때도, 인생이라 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보면 태양 같고 어두운 면으로 보면 동굴이라. 태양과 동굴의 비유란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태양같이 밝고 투명하지만 그 무지한 사람들은 항시 마음이 동굴 속에 있는 것같이 어둡단 말입니다.


그 밝은 쪽에 관하여서도 바른 철학, 바른 종교와 대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만 밝고 어디만 밝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훤히 밝은 것인데 어두움은 조금도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 느껴서 스스로 어둠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것은 부처님의 밝은 광명 지혜로 해서 우리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그런 어쭙잖은 잣대로 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시지 말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꼭 부처님의 잣대, 예수의 잣대, 예수의 견해로 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나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나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분들만이 오류(誤謬)가 없습니다. 왜 그분들은 오류가 없는 것인가? 그분들은 우주의 진리를 바로 진리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대로 지금 못 보는 것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 위대한 철인들은 모두가 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거나 보다 애매하게 말하거나 깨달음의 차이 때문에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방향성(方向性)은 다 똑같습니다.


인류의 어두움을 몰아내서 참다운 광명 세계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런 말들을 마음에 두고서 다른 철학서(哲學書)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그 협소하고 옹졸한 자기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 자체, 인생의 본질로 가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그 전에는 우리 인간의 지혜 분별이 발달이 미처 못되어 가지고서 우리가 선택을 바로 못했지만 지금은 인류가 바른 시험을 다 해 보았던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우리가 다 해보았습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도교, 다 보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많은 시험을 했으나 대체로 모두가 시행착오가 아닙니까. 괜히 우리 인간의 생명을 낭비를 했단 말입니다. 짧은 인생인데 몇 십 년씩이나 진리가 아닌 그런 무명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그것 갖고서 우리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가정(無假定)의 원리,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을 한 도리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한 상대 유한적인 무지에 지금도 젖어서 그대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결연히 단호하게 일어서서 참다운 진리를 자기 인생의 근본 신념으로 하고 나아갈 것인가 하는 그런 기로에 있습니다. 어렵지만은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투명하게 훤히 밝힌 가르침을 기료(祈療)로 하고서 거기에 입각한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우리 인생의 말로(末路)는 뻔합니다.


또 죽이고 싸우고 또 갈등되고 하겠지요. 제동장치가 없는 기관차가 가다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 레일을 이탈해서 틀림없이 그때는 파괴되고 탈선이 되고 진구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전철(前轍)을 밟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밖에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 원수는 바로 알지 못하는, 진리를 모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것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무명 때문에 우리가 고생을 받는 지라, 우리 원수는 바로 무명 자체입니다.

 

옛날 철인들이 원수는 산에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자기 마음에 있다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그런 생각을 100% 수용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사색(思索)도 하고 고뇌(苦惱)를 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석가가 거짓말을 했던가, 예수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흔연(欣然)히 자기 몸을 못 박혀서 죽도록 했던가 말입니다.


사실은 성자가 아니면 우리는 남을 심판(審判)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의 허물을 우리가 지금 똑같이 짓고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우리가 음식을 잘 못 먹기도 하고 부모한테 불효하고 말입니다. 우리 범부라 하는 것은 성자의 길로 오로지 나아가지 못할 바에는 모두가 지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이라 하는 가장 무서운 도둑놈, 무명이라 하는 그런 도둑놈 속에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모험을 해서라도 그 무명에서 벗어나서 참다운 성자의 길로 꼭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생명의 낭비요, 또 그렇게 한다고 생각을 할 때에 생명을 낭비한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한테나 나라한테나 인류한테나 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이 바로 진여불성인지라, 진여불성과 더불어서 할 때만이 어느 분야에서나 우리는 어느 때나 가장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건강으로 보나 또는 어떤 면으로 보나, 일반 중생들한테 공경을 받는 정도로 보나 또는 부모한테 효도하는 것으로 보나 어떠한 것으로 보나 그렇게 진여불성과 더불어서, 진리와 더불어서 하는 생활이 가장 위대한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