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행에세이(23)
호흡명상에 대한 두 관점
호흡명상이란 호흡을 주제로 하는 명상을 말한다. 이때 ‘호흡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호흡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입장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인도의 요가전통이나, 중국의 기공전통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불교의 명상전통이다. 여기서는 호흡을 통한 알아차림과 지켜보는 지혜의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불교에서는 호흡명상을 빨리어[anāpanasati]라는 영어를 사용하고 요가에서는 범어로 [prāṇāyām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나파나사띠[anāpanasati]는 팔리어의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파나(apana)는 날숨이며 사띠(sati)는 알아차림이란 의미이니,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요가에서 말하는 쁘라나야마[prāṇāyāma]는 숨을 확장하고 조절한다는 의미이다.
명상의 대상으로서 호흡, 숨은 동일한데,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 태도는 서로 다르다. 한쪽은 알아차림이 강조되고 다른 쪽은 통제가 강조된다. 불교에서는 호흡을 그대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 알아차림을 중시한 반면에, 요가에서는 호흡을 팽창시키고 조절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요가에서는 점차로 호흡이 멈추어지는, 곧 꿈바까(Kumbhaka, 멈춤, 정지) 호흡을 중시한다. 이것의 목적은 호흡이 멈춤이 길어지면서, 수명을 단축시키는 스트레스와 같은 감정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호흡의 과정이 4단계로서 들숨 다음과 날숨 사이의 멈춤이 강조된다. 중국의 기공에서도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기(氣)를 축적하고 방출하는 관리의 방식으로서 호흡이 활용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반면에 불교에서의 호흡은 호흡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중시된다. 호흡의 과정이 들숨과 날숨의 2단계로 설명하고 그것이 빠르든지 느리든지 어떻게 이루어지든지,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 자각을 중시한다. 통제나 조절은 오히려 금기사항이 된다. 여기서는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중요한 관점이다.
요가에서는 호흡명상은 참나(Ātman)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브라흐만이라는 우주정신(凡)과 개인적인 영혼(jīvātman, 我)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호흡명상을 하면서 이런 철학적인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흡명상을 통해서 이런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면서 호흡관찰을 통해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체득하고 호홉관찰을 통해서 깨어있음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런 서로 두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유사하다. 자연을 잘 개발하여 이용하자는 입장과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입장이 늘 대치되는 것과 유사하다. 현대 심리치료에서도 이런 관점이 대립된다.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문제를 다룰 때,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입장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아니면 문제와 함께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기 보다는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고 허용하는 입장이 더 유용한가? 하는 문제이다.
일단 명상이 심리치료에 응용되면, 신의 문제나 혹은 기(氣)의 존재문제나 아뜨만과 같은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혹은 철학적인 논의들은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쪽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도 실질적인 근거나 논증이 매우 어렵고 믿음의 영역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한 까닭이다.
단지 호흡에 대한 현장적 접근, 실천과 적용의 문제에만 한정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필자는 호흡에 대한 요가의 접근방식과 불교의 접근방식은 서로 존중되는 보완적 관계가 좋겠다고 본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혹은 명상수행의 현장에서 명상을 처음 접하는 초보수행자나 혹은 이해의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환자나 내담자는 지시적이고 좀 더 통제적인 방식이 필요한 경우도 부정할 수가 없다. 반면에 불안과 우울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를 무장정 통제하려는 태도는 역기능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문화 적반적으로 관리와 통제가 매우 심각한 역기능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시점에서, 수용하고 허용적인 불교명상의 방법이 도움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통제와 수용, 집중과 알아차림, 조절과 허용의 양자를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서 양자를 변증법적인 통합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고 본다. 현실적용에서는 좀더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이 더 좋을 싶다. 어느 쪽이 우월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유용하고 왜 그런지를 살펴보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한다.
(* 이글을 쓰게 되는 데는 펫북에서 만난 이형록 ‘요가원 원장님’의 글이 많은 도움과 자극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이원장님의 호흡에 대한 소고는 배움의 길에서 참 유용했고, 현장에서 중요한 한 영역을 담당하여 주시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여기에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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