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논술 따라잡기

김용택 시인, 당신은 <조선일보>의 동지였다

맑은물56 2011. 6. 30. 18:48

김용택 시인, 당신은 <조선일보>의 동지였다
[주장] 전교조 동지 자처한 김 시인에게 묻는다
11.06.24 20:08 ㅣ최종 업데이트 11.06.25 16:07 김영진 (seulk)

  
<교육희망> 585호(2011. 5. 9.)에 실린 김용택 시인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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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발행하는 신문 <교육희망>에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칼럼 하나가 실렸다.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라는 제목을 단 그 칼럼이 나가고 나서 <교육희망> 편집부는 전교조 교사들의 항의로 한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나는 그 칼럼에 대한 반론을 같은 지면에 기고한 바 있다.

 

김 시인은 그 칼럼에서 자신을 평생 전교조 '회비'를 낸 교사라고 소개하면서도 전교조 신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전교조 신문인 <교육희망>은 전교조 조합원 모두가 받아보고 있는 신문이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전교조 기관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말을 하는 김 시인이 과연 전교조 조합원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교조는 친목회가 아니라 노동조합이다. 그래서 그 구성원들은 조합원이고 그들이 내는 돈은 회비가 아니라 조합비다. 나는 그 칼럼에 대한 반론을 통해 그가 낸 돈은 '회비'가 아니고 '조합비'임을 지적해 드렸다.

 

그는 왜 이제서야 자신에게 원고 청탁을 하냐는 불평도 한다. 전교조가 그 유명한 '섬진강 시인'을 몰라보다니 괘씸하다는 뉘앙스다. 참 오만하다. 전교조란 말에 반감이 많다며 '결코 전교조 교사로 살아온 것 같지 않은' 불평을 쏟아놓았다.

 

전교조가 강연 청탁 전화를 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고 불친절하고 일방적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소소한 경험 하나로 자신이 속한 집단을 매도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차치하더라도 전교조에 대해 외부인처럼 말하는 태도는 그의 글을 '쓴소리'가 아니라 '비아냥거림'으로 느끼게 했다.

 

  
<교육희망> 586호(2011. 5. 30.)에 실린 기자의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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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회원'이었다는 그의 무지한 칼럼

 

선생을 하면서 진정으로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전교조에서 만났었다. 오래전 일이다.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런 교사들도 있구나,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고 장학사가 되려는 교사들이 아닌,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걱정하는 교사들이 있구나,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 <교육희망> 5월 9일자에 실린 김용택 시인의 칼럼 가운데

 

김용택 시인은 글에서 "교육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어느 때 떡하니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심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교조 출신 교사는 교장이 되면 안 될 듯싶다. 교육에 온몸을 바치던 전교조 교사가 교장이 되면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몇 안 되는 전교조 출신 교장들이 어떤 학교를 만들고 있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것이다. 나는 반론을 통해 김 시인에게 그들은 교장이 된 지금도 여전히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교사들이고, 그런 걱정을 밑거름으로 학교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교사들이 늘었다. 곤혹스럽다"는 지적도 한다. 교육감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교사들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단언컨대 그가 지적하는 교사일 것 같은 사람들은 지금 진보적인 교육감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다. 몇 안 되는 그 교사들은 진보적인 교육감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 교육감'이 될 수 있도록 교육감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니 김 시인은 자발적으로 '동지'라고 부른 사람들을 조롱조의 말로 뭉개지 않아도 된다. 크게 양보해 그런 말법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러면 김용택 시인이 족벌신문과 그 권력 주위를 어슬렁거린다고 표현하면 되겠다. 진보 교육감은 혼자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 - <교육희망> 5월 9일자에 실린 김용택 시인의 칼럼 가운데

 

김 시인의 이런 지적이 진정성을 지니려면 그가 그런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 '동지'들과 함께했어야 하고 함께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말은 비단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액세서리일 뿐이다. 이에 대해 나는 반론 글에서 이렇게 대꾸한 바 있다(☞반론글 보기).

 

그러나 나는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결단코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우리 교육이 시장판으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한 싸움의 현장에 시인은 얼굴 한번 보여준 적 없었다. 전교조가 위기에 처해도 우리 '회원'은 늘 침묵했다. - <교육희망> 5월 30일자에 실린 필자의 칼럼 가운데

 

  
6월 20일자 <조선일보> ‘진보 교육감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전교조 교사 늘어’란 제목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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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력'이 던져준 미끼를 놓치지 않은 <조선일보>

 

그의 글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는 편협하고 오만하고 무지한 글이었다. 그의 그 글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족벌신문의 전교조 마녀사냥에 철저히 이용되고 만다. <조선일보>에게 좋은 미끼를 제공한 셈이다. 그럴 리 없지만 전교조가 그를 동지로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는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조선일보>는 그의 그 칼럼을 기사에 사설까지 동원하여 소개하며 '전교조 사냥'에 써먹었다.

 

"진보 교육감 권력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전교조 교사 늘어"

 

6월 2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기사보기). 과연 <조선일보>다. 하고 싶은 말을 '문화권력' 김용택 시인이 해주었으니 힘들이지 않고 큰따옴표로 슬쩍 묻어간다. 전교조 교사를 하이에나로 만들어 놓았다. 김 시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그 글은, <조선일보>가 그의 '동지' 전교조를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데 쓰이고 말았다.

 

<조선일보>는 김용택 시인의 글을 전교조 소속이었던 전직 교사의 충정이 담긴 글로 띄워놓고, 전교조가 그런 충정을 못 받아들이는 집단이라고 떠벌리고 싶었을 것이다. 참 교활한 편집이다. 그러더니 21일에는 사설까지 동원하여 이 기사를 다시 받아쓰기에 이른다.

 

  
6월 21일자 <조선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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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오달지게 우려먹은 김용택 시인의 칼럼이 전교조 신문인 <교육희망>에 실린 게 5월 9일이었는데, <조선일보>는 6월 20일자에 그 글이 무슨 새 소식이나 되는 듯이 인용 기사를 싣고 있다. <조선일보> 해당 기자는 그래도 기사 꼴은 갖추어야 된다는 생각은 했는지 균형을 맞춘답시고 '군산의 한 교사'가 <교육희망> 같은 지면에 쓴 반론에서 몇 줄 뽑아 옮겨놓는 아량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군산의 한 교사'인 나의 반론 글에서 인용한 그 몇 줄마저 전교조를 싸움꾼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데 써먹고 있다.

 

그 기사에 인용된 "싸움의 현장에서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김 시인은) 전교조가 위기에 처해도 침묵했다"는 말 앞에는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을 빼놓고 '싸움'만을 도드라지게 해 전교조를 막무가내 싸움이나 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 영악하다.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하다고 한 말은 김용택 시인이 그의 칼럼에다 썼던 말이었다.

 

그 기자, 전교조 조합원만 들어갈 수 있는 전교조 내부 통신망까지 들어갔다 온 모양이다.(<조선>, 전교조 내부통신망 침입 의혹) 거기서 자기가 쓰는 기사의 의도에 맞는 글들을 끌어다놓는 섬세함도 보여주었다.

 

<조선일보> 해당 기자가 쓴 인용 기사는 2/3 정도의 분량을, 김용택 시인의 전교조 '비난'글을 그대로 옮겨와 따옴표 붙여가며 채워놓았다. 그 기사, 기사로서는 함량 미달이나 선전·선동용으로는 그만이다. 제목을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사랑했던 전교조'라고 아주 시적으로 뽑아들고 사실을 왜곡해가며 대중을 현혹하고 있는 사설 또한 선전·선동용으로는 그만이다.

 

김용택 시인의 답변을 기대한다

 

나는 <조선일보>의 편향된 인용 기사와 그걸 받아쓴 사설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 기사에서 다룬 글들이 어떤 글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조선일보>가 인용했던 김용택 시인의 글을 날것 그대로 옮겨놓겠다. 그리고 그의 글을 비판했던 나의 글도 그대로 올려놓겠다. <교육희망> 지면 사정을 고려하여 줄여보냈는데 여기에는 줄이지 않은 글을 올려놓는다.

 

그나저나 김 시인은 그 자신과 자신의 글이 <조선일보> 따위에게 이렇게 저렇게 '데코레이션'용으로 쓰일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조선일보>에 글을 써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조선일보> 사랑을 우려할 때 그는 그 말을 진정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알아들으면서도 짐짓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일까.

 

김 시인도 <교육희망>에 실린 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할 지면을 찾기 어려웠겠다 싶다. <교육희망>이 우리 두 사람에게 계속 논쟁할 지면을 내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 기회에 김 시인에게 정식으로 제안한다.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라는 그의 글로 촉발된 논쟁을 이곳 <오마이뉴스>에서 펼쳐볼 것을. 김 시인도 그 글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을 줄 안다.

 

전교조 '회원'이었던 김 시인과 전교조 '조합원'인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전교조가 어떻게 다르고 어떤 게 전교조의 진짜 모습인지 독자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전교조의 속살도 드러내보고 우리 교육도 함께 이야기해보자.

 

김용택 시인은 전교조 교사들에게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김 시인이 사랑해마지 않는 <조선일보>에게 전교조는 늘 '불령분자(不逞分子)'였다. 김 시인의 말을 받아 나는 이렇게 틀어 돌려드리겠다.

 

"한심하게도 당신은 평생 <조선일보>의 동지였다."

 

김 시인의 답글을 기대한다.

 

[희망칼럼]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

김용택(시인)

선생 38년, 학교를 그만둔 지 3년,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이제야 전교조 관계 신문으로부터 난생 처음 청탁을 받았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런 신문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러이러한 신문이라고 청탁자의 설명을 듣고 도대체 어떤 신문인가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나는 전교조란 말에 반감이 있다. 강연 청탁 전화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고, 불친절하다. 일방적이다. 놀랍게도 전교조가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서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심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줄 안다. 무슨 특별한 존경을 받고 사는 선택된 조직인 줄 안다. 그들이 부르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하는 줄 안다. 물론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전교조 교사라면 택시 운전사들이 차비도 안 받았다. 그때를 생각해 보라. 강연료를 일방적으로 정한다. 나의 의견을 말하면 교과서에 실린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몰아붙인다.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이제 한물 간 시대착오적인 가치의 잣대를 들이댄다.

 

오래 전 일이다. 전교조 사무실로 강연을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창고도 이런 창고가 없었다. 복도와 사무실 구석구석에 쌓인 때 지난 유인물들을 보며 나는 경악했다. 저 버려진 유인물들이 내 회비로 만든 것이 아닌가. 사무실은 더 했다. 거기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나 같이 얼굴들은 무심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이러고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정리 정돈 하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평생 전교조 회비를 내고 살았다. 그 돈이 아까웠다. 그렇게 교육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어느 때 떡하니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았다. 어떻게 하든지 한자리 차고앉으려는 그들을 바라 볼 때 나는 심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환멸을 느꼈다.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교사들이 늘었다. 곤혹스럽다.

 

선생을 하면서 진정으로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전교조에서 만났었다. 오래 전 일이다.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런 교사들도 있구나,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고 장학사가 되려는 교사들이 아닌,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걱정하는 교사들이 있구나,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내 곁에 있던 교사들이 해직될 때 나는 사는 것이 무서워 해직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내 교사 생활에 부채가 있다면 평생 아이들에게 잘못한 일과 그 일이다.

 

교사가 위대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 때문이다.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찬 불편한 얼굴을 거두어 들여라. 반성하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부드럽고 착하고 선량하고 정답고 선하고 따사로운 사랑으로 빛나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 그것이 교사로서의 긍지와 그 권위와 위엄을 지키는 일이다. 이 너절한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 

'회원'이었던 김용택 시인에게

-5월 9일자 칼럼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를 읽고

김영진(군산영광여고 교사)

전교조가 만드는 신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단다. 그리고 그 신문으로부터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단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전교조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받아보고 있는 전교조 기관지를 그는 어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까? 전교조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이 아니라 전교조 '회비'를 내는 회원이라서 그랬나?(그가 조합비가 아닌 회비를 내고 산 걸 보면 그에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친목회였나 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누가, 왜 청탁씩이나 했을까?

 

전직 교사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이 너절한 세상 속에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참 시인다운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결단코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우리 교육이 시장판으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한 싸움의 현장에 시인은 얼굴 한번 보여준 적 없었다. 전교조가 위기에 처해도 우리 '회원'은 늘 침묵했다. 그런 그가 교직을 그만둔 뒤 3년이 흐른 시점에 전교조가 만드는 신문에 뜬금없이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고 사랑 고백을 해놓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전교조 사무실에 강연을 오신 적이 있다고 한다. 복도와 사무실 구석구석에 쌓인 때 지난 유인물을 보며 그는 경악했단다. 그는 지회 사무실에 온 것일까 지부 사무실에 온 것일까. 그가 소속되어 있던 임실지회는 지회 사무실조차 없이 지회 간부들이 임시 장소를 찾아다니며 회의하고 지회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는 임실지회 사무실이 허름하지만 존재했다. 그때 그 지회 사무실에 온 것일까. 지회에는 상근하는 전임자가 한 명도 없다. 학교 일이 끝난 지회 간부 선생님들이 모여 폭주하는 지회 사무를 처리한다. 지부에도 겨우 서너 명의 전임자가 가공할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있다. 계선사업, 연대사업 등을 하며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의 최전선에 그들이 서있는 것이다. 그가 본, 때 지난 유인물은 그들이 놀다가 남겨놓은 게 아니다. 사무실을 방문하는 조합원이나 학부모, 연대단체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남겨둔 교선자료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에게 교과서에 실린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몰아붙였을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아주는 '섬진강 시인'에게 그런 무례를 범했을까? 궁금증은 잠시 덮어두고 그가 말하는, '일방적으로 정하는 강연료'라는 지적에 대해 변명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전교조는 외부 강사를 초청할 때 강연료로 20만 원을 드리고 있다. 전교조 내부 강사에게는 강연료가 지급되지 않는다. 교과서에 실린 시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분들 모두 강연료로 그것밖에 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강연료가 적어서 강연을 못 하겠다는 분을 나는 아직 뵌 적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연 요청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불친절했다면 그건 고칠 일이겠다. 전교조 사무실에 근무하는 전임자들의 얼굴이 무심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말이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 했다. 그들의 고된 업무와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잘 알기에 말을 못 할 따름이다.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도 설쳤다고 한다. 그렇게 교육에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어느 때 교장이 된 걸 보고 그는 심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 전교조 출신 교사는 교장이 되면 안 되나? 그들이 교장이 되면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일을 멈추기라도 한단 말인가? 전교조 출신 교장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가? 우리 전북에도 전교조 출신 교장이 있다. 겨우 대여섯 명이다. 그들이 어떤 학교를 만들고 있는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것이다. 그들은 교장이 된 지금도 교육을, 아이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교사들이다. 그런 걱정을 밑거름으로 학교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그 교장들 여전히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걱정하며 살고들 계시니 '동지'께서는 배신감과 환멸 내려놓으시고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생각하며 계속 밤잠을 설치셔도 된다. 진보 교육감과 함께 일하는 교사들이 늘어서 곤혹스러워 하실 필요도 없다. 진보 교육감은 혼자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그는 얼마 전 한 '부자신문'에 시를 연재했다. 오랫동안 그는 그 신문의 '동지'였다. 그러나 시인이여, 아는가. 그 신문은 당신이 강조한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 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적이다. 그런 부조리한 신문과도 영혼을 섞는 시인이 '교육을 지키고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생급스레 '동지'라 부르며 지청구를 날리니 그저 황당할 뿐이다. 듣그러운 소리 접고 시인이여, 제 눈의 들보부터 뺄 일이다.

 

'희망 칼럼'에 절망 칼럼을 싣는 <교육희망>이 자꾸 절망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