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전체가 변해야만 산다.
황 의 각 (미래한국신문편집고문-고려대명예교수,경제학전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패는 밀착되어있다. 권력기관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불공정한 사회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실의 국가권력은 절대로 정의롭지 못하다. 그 이유는 공의로운 권력이 존중되어야 하는 높은 명분과 필요에도 불구하고 권력행사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 틀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를 통해 볼 때 왕이나 대통령이 되면 정권을 전리품으로 여겨, 정권장악 공신들을 중심으로 권력내부체제(inner-circle)를 구축하고, 백성위에 군림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의 칼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풀뿌리 백성들의 기대를 부풀리는 標풀리즘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사회를 평정하려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며 기존질서를 유지하려한다. “법과 원칙이 작동하는 공정한 사회”를 주창해온 이명박 정권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깊숙이 연루된 부산저축은행사태, 동남권신공항 건설 백지화 조치, 핵심도시배치 지역 간 갈등 등, 모두 권력형 지그재그(zigzag)이다. 국민의 합리적 기대를 깨고 어리둥절케 하는 권력형부패와 조령모개(朝令暮改)식 정책뒤집기를 국민들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5월 중순 대통령의 유럽순방기간 중에 소집된 국무회의가 총 국무위원 18명중 상당수 장관들의 불참 또는 지각으로 정족수 10명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니, 이 나라가 도대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한마디로 제각기 눈치만 보며 권력행사에만 분주할 뿐 국정책임을 중요시하지 않는 정부가 아닌가?
국가통수권자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국민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를 신중히 판단하여 각계로부터 정책합의를 도출하는 지략을 발휘하고 국책과제를 헌신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통솔력과 결단력이다. 그리고 국정을 맡아 실행할 유능한 사람들을 찾아 적재적소에 중용하여 나라살림을 경영하는 일이다. 특히 훌륭한 통수권자는 지혜, 신의, 인애, 용기, 엄정의 품격을 갖추어야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일을 맡아서 할 사람들을 잘 선택해야 한다. 최고지도자가 외모치장보다는 내적품격과 덕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우리 속담의 교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변화되어야 할 것은 정부와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변화되고 바뀌어야 “무너져가고 있는 사회”를 일으켜 세우며 보호할 수 있다. 어느 젊은 판사가 출근길 전철 안에서 성희롱(性戱哢)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법복을 벗게 된 뉴스기사는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통한 윤리도덕을 포함한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전문지식주입위주의 기능교육에만 치중하여온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우리사회에는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국가기관이나 종교계를 포함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 적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늙고 병든 부모들을 돌보지 않고 팽개치는 젊은 자녀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자녀들에게 양육비지급 청구소송을 하는 어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남녀 고교생 2명이 몰래 아이를 낳은 뒤 살해하고 시신을 화단에 묻어버렸다가 1년 만에 붙잡혔다는 엄청난 뉴스보도(5월 13일자)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또 우리사회에는 생활에 실패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매일 무려 30여명이 넘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사회이지만 모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하기야 2년여 전에는 한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실추된 명예와 사회전체의 평가를 계산하여 죽음을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서 젊은이들 가운데 스토아적 자살 미학의 씨를 뿌린 자의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인생의 결산이 “어떻게 죽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책임 도피적 자살”을 “고귀한 죽음”으로 미화하여 자살이 유행처럼 전파되도록 방치하는 우리사회는 반드시 변해야 한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사회구성체들이 기존의 극심한 경쟁과 이익추구만을 목표로 삼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유물론적 세계관을 접고, 머리와 심장과 손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을 지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해오던 우리들의 낡은 생각의 틀을 새로운 긍정적, 창조적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긍정적 생각으로의 선(善)한 변화는 사회질서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 경제 사회 관행의 개선과 변화를 결과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생각의 변화란 사회구성체인 개인의 사고(思考)의 변화와 그 개인들이 조직적으로 운영하는 제도와 실행관행에서의 개선을 포괄하는 것이지, 경제와 정치의 이념적인 근본 체제변경(ideological system change)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회의 변화는 대한민국헌법이 보장하는 작은 정부와 시장경제라는 기본 틀 안에서 운영상의 개선과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지, 민주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집단체제로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집단체제는 효율성과 국민후생의 차원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비하여 실패한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구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북한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자율과 경쟁이 없이 강제적으로 통제되는 배급경제체제에서는 기술혁신의 유인과 생산성의 활력은 소멸된다. 경제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민들의 복지 분배수준은 향상될 수 없다.
흔히들 복지정책은 국가의 소득재분배정책의 일환으로 평등사회(equity society)를 표방하는 사회주의기구의 복지모델이 우월한 것으로 일부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지만, 정부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복지 분배정책은 필연적으로 거짓과 부패에 빠지기 마련이며 종국에는 국가부도의 벼랑에 직면하게 되어있다. 비대해진 권력에 의존하는 정책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며 실패한다. 복지정책의 틀은 이런 점들을 신중히 고려해서 시장경제원리에 부합되게 수립되어야 한다. 최근 우리 정치권의 화제(話題)에서 국민복지 논쟁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다음 대선에서도 복지는 핵심적인 정책논쟁으로 떠오를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최선의 복지정책은 시장경제체제 룰(rule) 안에서 소외계층의 소득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는 각종 실효성 있는 소득 및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물론 북유럽나라들의 혼합형 사회시장 경제체제의 복지정책도 참조될 수는 있겠지만, 이들 나라들이 과다한 복지비지출로 막대한 국가부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예외 없이 비틀거리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틀(framework) 안에서 발전과 변화를 위한 생각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현 집권당과 정부는 곧 터져 나올 “못 참겠다, 갈아보자!”라는 야당의 정치구호에 발목 잡히기 전에 서둘러 분골쇄신(紛骨碎身)하는 변화와 개혁을 강구하지 않으면, 국민기대를 실망시킨 정부로 역사에 기록되고, 차기총선과 대선에서도 재집권이 어려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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