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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행도 길다 시의 본질은 짧음이다

맑은물56 2011. 1. 21. 09:52

10행도 길다 시의 본질은 짧음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1.01.14 00:12 / 수정 2011.01.14 01:09

짧은 시 운동 펼치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일곱 번째 시집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들. 동인 결성 2년 만에 7번째 동인 시집 『칠흑 고요』를 냈을 정도로 활동이 왕성하다. 시는 모름지기 짧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지론이다. 앞줄 왼쪽부터 이지엽·나혜경·김길녀·나기철 시인. 뒷줄 왼쪽부터 함순례·오인태·윤효 시인. [대전=김성태 프리랜서]

2007년 4월 전남 강진에서 열린 영랑시문학제. 울산에 사는 정일근 시인이 서울의 문우(文友) 윤효 시인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시는 어째 모래알을 씹는 느낌이다. 물기와 울림이 있는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자.”

윤씨는 반색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이날 ‘취중 결의’는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정씨는 집요했다. 서울 예장동 ‘문학의 집·서울’에서 열린 김남조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윤씨를 마주치자 대뜸 장충동 족발집으로 이끌었다.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논의했다. 다시 의기투합한 두 사람, 나기철(제주), 복효근(남원), 오인태(진주), 이지엽(서울), 함순례(대전) 시인 등 ‘팔도 시인’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왕 운동을 할 거라면 전국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은 이렇게 생겨났다. 그들이 일곱 번째 동인시집 『칠흑 고요』(고요아침)를 냈다. 첫 시집을 낸 게 2008년 3월이니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왕성한 생산력이다. 동인들은 시집을 내면 꼭 워크숍을 연다. 시집을 자체 평가하고 다음 시집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다.

 10일 오후 대전 은행동 계룡문고. 전체 9명 중 나기철(58)·윤효(55)·이지엽(53)·오인태(49)·김길녀(47)·나혜경(47)·함순례(45) 시인 등 일곱이 모였다. 남원의 복효근(49) 시인은 이날 밤늦게 합류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정일근(53) 시인만 불참했다.

 이 자리를 찾아가 ‘짧은 시 운동’의 의미를 물었다. 동인들은 “요즘 시에 대한 반성이 짧은 시 운동의 출발”이라고 했다.

“중후장대(重厚長大)하거나 현란한 언어만을 보여주는 시를 써서는 메마른 논 같은, 독자들의 가슴에 물을 제대로 댈 수 없다”는 것이다.”(윤효) “시의 본질은 짧은 데 있다. 긴장과 함축, 절제된 언어를 보여주되 진술된 시행보다 몇 배 넓은 인식의 지평, 감동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나기철)

 김종삼·박용래 등 탁월한 선배 시인들이 선보인 적 있는 시편들이다. 채송화 동인의 짧은 시는 10행 안쪽을 목표로 한다. 이지엽씨는 “17자인 일본의 하이쿠보다는 길고 45자인 시조보다는 짧은 정도가 아닐까 한다”고 했다.

 이번 동인 시집은 그런 미학의 결정체다. 동인들의 신작 시는 물론 초대시 등 70여 편이 실려 있다. 강우식 시인의 초대시, ‘물’은 선시(禪詩)처럼 여백이 크다. ‘살면서/물먹지 않은 이/어디 있으랴’. 전문이다. 싱긋 미소가 지어진다. ‘산마루부터 따라온 강아지 한 마리, 닫힌 대오리 창호 두 발로 긁어대고 있다’. 권덕하 시인의 초대시 ‘싸락눈’은 싸락눈을 창호지 긁는 강아지에 빗댄 착상이 절묘하다.

 동인들은 짧은 시가 독자는 물론 동료 시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했다. 키 낮은 꽃 채송화처럼 소박하고 알기 쉬워 주부나 노인, 독자 누구에라도 사랑 받는다는 것이다.

 나기철씨는 “초대시 청탁을 바라는 동료 시인들도 많다”고 했다. 함순례씨는 “짧은 시를 쓰다 보니 삶 자체도 변했다”고 했다. 담배를 끊었고, 술도 줄었단다. 이쯤 되면 거의 ‘생활수칙’ 수준이다.

 동인 시집은 짧은 시 운동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초대시를 실어 왔다. 한 번이라도 시를 준 적이 있는 시인이 120명을 넘는다. 김남조 시인이 동인의 고문을 맡고 있어 세 차례 초대시를 내놓았다.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동인들이 지역 문인들을 동인 시집에 끌어들여 운동을 확산시키는 모양새다.

 오인태씨는 “짧은 시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선문답에 빠지지 않는 시를 오래도록 쓰고 싶다”고 했다.

대전=신준봉 기자
사진=김성태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