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 도착하자, 눈물이 왈칵

맑은물56 2010. 10. 14. 13:41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 도착하자, 눈물이 왈칵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 문화탐방기(2)
10.09.24 14:03 ㅣ최종 업데이트 10.09.24 14:03 박태상 (tspark21)

  
▲ 2006년 8월 말 백두산을 방문했을 때 접한 ‘천지’의 환상적인 물빛 ! 천지에 머물렀던 1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에도 햇볕이 쨍쨍했다가 곧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기도 했다가 또 잠시 소나기가 내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백두산 천지의 날씨로 볼 때, 민족의 영산임이 틀림없었다.
ⓒ 박태상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1년 중 백두산 천지를 찾을 수 있는 때는 딱 4개월 뿐이다. 그나마 쾌청한 상태에서 천지를 볼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 8월 중순에서 하순경이 맑은 천지를 볼 수 있는 소위 '길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쾌청한 천지를 보지 못했다. 다만, 날씨가 좋지 않음에도 천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장백폭포를 본 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백두산에 올랐으나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 때문에 천지표식만 보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2006년 백두산 등정 때는 푸르고 유리알처럼 맑은 천지를 만났는데 무척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올해 최대 화제는 역시 백두산과 관련된 뉴스일 것이다. 우선 백두산이 현재는 휴화산이지만 곧 폭발하여 대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백두산 천지에 괴물로 추정되는 물체가 사진에 잡혔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보도였다.

 

중국당국은 괴물의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에게 400원(중국돈)의 포상을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얼마전 소방 방재청 산하의 국립방재연구소가 백두산의 폭발 위험에 대해 연구조사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방재연구소에 따르면, 백두산의 화산폭발 위험지수는 6 ~ 7.4 수준으로 아이슬란드 화산(지수 5)보다 10 ~ 100배 수준의 위력을 지닐 것으로 예측됐다.

 

지난 4월 유럽에서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에 이어 8월 30일에는 400년 만에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의 타나 카로 지구에 위치한 시나붕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2km 상공으로 치솟았다. 이렇듯 최근 화산 폭발이 이어지고 있어 연구결과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백두산 일대에서 미세한 지진이 과거보다 10배 이상 잦아지고, 천지 주변 지형이 매년 약 3㎜씩 높아지는 등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나면서 백두산 화산 폭발 임박설이 대두되고 있다. 하여튼 백두산은 1702년부터 308년간 휴화산으로 지냈다. 하지만 2014년 폭발설이 나와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있다.

 

또 하나 천지에서 목격된 괴물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다. 2009년 조선족 자치주 연변 엔지시에 사는 하아무개씨가 9월 3일 백두산을 관광하며 천지에서 찍은 사진 2장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찍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국 지린성 기상국 직원들이 괴물 6 ~7마리를 발견했다는 목격담에서부터 1990년대 후반 이후 관광객들이 촬영했다는 사진과 동영상까지, 괴물에 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괴물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천지는 둘레 18.7km, 호수 폭은 남북으로 4.85km이고 동서로 2.35km, 면적은 21.4㎢에 평균수심은 213. 3m의 호수다. 특히 천지는 1년 내내 얼어 있어서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치 않기 때문에 목격자들이 백두산 인근의 동물이나 천지 특유의 자연현상들을 착각했을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일축했다.

 

  
▲ 2010년 8월 22일에 방문한 백두산은 돌발적인 폭풍우로 인해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 여러 명이 동시에 사진을 찍었지만,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사진이 별로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옥천문화원의 정해천 이사의 사진만이 천지의 표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박태상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 탐방기

결국 일행은 백두산의 쾌청한 천지를 보지 못하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벤츠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백두산 휴게소에서 비가 멈추기만을 기다렸지만 더욱 기상은 악화됐다. 천둥번개가 내려치고 소낙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내렸다. 하산해서도 비좁은 온천탕입구에서 비를 피하면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버스도 자주 오지 않았다. 일진이 참으로 좋지 못한 날이었다.  

 

하룻밤을 장백산 산강호텔에서 묵었다. 연변지역의 호텔들이 지은 지 오래되어서 녹물이 나오는 등 낡은 상태인데 비해, 산강호텔은 신장개업한 호텔로 중국에서 가 본 호텔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았다. 백두산에서의 우울한 기분이 호텔방에 올라가니 모두 풀렸다. 여행에서의 3박자인 호텔, 음식, 여행일정 중 모두를 만족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모두가 엉망일 때는 당장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법이다.

 

버스에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중국여성들이 매우 드세서 중국남성들 중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는 남성들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여성들이 게을러서 화장도 잘 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북경의 가정은 저녁만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된다고 한다. 또 저녁식사를 마치면 여성들은 TV앞에 앉아 드라마 등을 보고, 남편이 설거지를 전담한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또 북경은 물이 귀해서 매일 샤워를 하는 여성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5~6일에 한번 샤워를 한다고 한다. 한국여성들과는 너무나도 크게 비교가 된다. 서울의 여성들은 하루라도 샤워를 안 하고 화장을 다듬지 않으면 외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중국과 북한의 국경 경계 표시 - 중국 도문의 중국과 북한의 국경 경계를 표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신기했다. 두만강 건너 푸른 숲의 섬처럼 보이는 것이 북한 땅이다.
ⓒ 박태상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 두만강 뗏목배체험 - 두만강에서 뗏목배를 타고 두만강을 선상체험을 해본 것은 한민족으로서 아픔을 느끼게 해준다. 바로 강 건너가 북한인데 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 북한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바로 사라졌다.
ⓒ 박태상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우리 일행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도시인 도문으로 이동하여 두만강에서 뗏목을 탔다. 특히 뗏목배가 북․중 통관다리 밑에서 유턴하여 돌아오면서 북한쪽 땅에 근접했을 때 갑자기 한 명의 북한 군인이 숲 속에서 걸어 나와 잠시 모습을 보이고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급하게 사진기를 켜고 셔터를 눌렀으나 군인의 모습은 숲속에 가려 신체의 일부만이 찍혔다. 역사적인 사진이 될 뻔했는데  아쉬웠다. 

 

오후에는 다시 연길시 예술 중심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제14회 연변지용제와 축하예술 공연을 감상했다.  <정지용시집>과 <백록담>으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은 애초엔 모더니스트로 이름을 휘날렸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일제의 광포한 군국주의가 밀려들었을 때 한글로 편집된 잡지 <문장>을 발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얼을 지키려고 노력을 경주했다.

 

결국 일제 총독부의 압력으로 일본글로 편집을 강요받았을 때 스스로 잡지를 자진폐간하고 붓을 꺾고는 절필했다. 그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상당수의 문인들이 변절한 것과는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붓을 꺾기 직전 지용은 초기 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후기시를 발표했다. 지용의 초기시가 주로 서구적인 경향의 모더니즘풍의 시였다면, 후기 시는 조선의 자연의 아름다움과 내적 깊이를 다룬 산수시 위주였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8월한철엔 흩어진 성진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중략)....

 

가재도 긔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 <백록담> 일부

 

정지용의 시는 난해한 편이라 독자들의 대중화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한방에 날려버린 문화적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88올림픽 직후인 1991년 작곡가 김희갑이 박인수, 이동원 듀엣의 대중가요 <향수>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노래는 이들 듀엣 가수를 한국의 도밍고와 존덴버("Perhaps Love"를 성공시킴)로 만들면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 이제 정지용의 시 <향수>를 모르면 간첩으로 몰리는 형편이 되었고 지용의 고향 옥천은 '한국시의 메카'가 되었다.

 

벌써 올해로 옥천 지용제(5월 14일~16일)는 23회를 맞이하여 지역 축제로서는 선구자역할을 떠맡고 있다. 지용제의 성공은 백담사의 만해 한용운축제, 평창의 이효석축제 그리고 춘천의 김유정축제로 이어졌다. 이제 정지용축제는 세계로 눈을 돌려 제 14회 연변지용제(8월 23일)로 뻗어나가고 있다. 벌써 중국동포 중에서 14명이 최고의 시인에 등극해 조선족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성과에 지용회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올해는 박장길 시인이 시 <얼음꽃>으로 영광스러운 수상을 했다. 당선 축하모임에서 최룡관 평론가와 리성비 시인 등 30여 명을  만나서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 물동이춤 -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의 공연은 매우 수준이 높고 아름다웠다. 특히 ‘물동이춤’은 북한의 유명한 최승희가 안무한 춤으로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도 공연되어 큰 찬사를 받았던 춤이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함께 숙청되었다가 1990년대 말 복권되어 현재는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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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 진달래 춤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의 공연작품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자연환경은 결국 사라지고 진달래가 만발한 봄이 온다는 내용으로 외세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상징하는 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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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다음날 아침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해란강이 길게 흐르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일송정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작곡가 조두남 선생을 찾아 인터뷰한 일화를 전 SBS TV 보도본부장 유자효 시인(지용회 회장)으로부터 우연히 듣게 되어 한국문화사의 이면사에 대해 깊은 공부를 했다.

 

당시 북간도에 거주했던 작곡가 조두남은 자신을 찾아온 청년 윤해영으로 부터 가사를 넘겨받아 한국인의 명곡 <선구자>를 작곡했다고 한다. 사실 작사가 윤해영은 조선족으로서 해방직전에 일제의 만주국 구축을 찬양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여 이름을 더럽힌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까지도 작곡가 조두남 선생은 윤해영의 행적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유자효 기자에 의해 조두남의 <선구자>는 다시 클로즈업(KBS TV 뉴스파노라마)되어 대중가요처럼 애창되었다. 이때부터 <선구자>는 우리민족이 애창하는 가곡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가곡 <선구자> 뒷얘기를 들으니 더욱 윤동주의 생가를 빨리 보고 싶었다. 사실 몇 차례나 용정을 방문하고 대성중학교를 둘러보고 했지만 가장 감동을 받았던 것은 윤동주의 모교인 동지사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보았을 때였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윤동주 문학비는 일본인 중에서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한푼 두푼 모금해서 건립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중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윤동주를 위해 모금을 통해 시비를 건립했다는 것은 비판적 성찰에 의해 반성을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 2월에 지용회(당시 이근배 회장)는 유봉렬옥천군수의 도움으로 윤동주 문학비 옆에 정지용시비를 건립했다. 

 

사실 윤동주는 대학 16년 선배였던 지용의 시를 읽고 지용과 같은 훌륭한 민족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지용의 문학비보다 윤동주의 시비가 10년 먼저 모교에 건립된 것이다. 사실 필자는 대학에 다닐 때 윤동주의 '서시' 문학비를 매일 바라보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워왔다. 그런데 교토의 동지사대학에서 또 다른 윤동주 시비를 접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 했겠는가?   

 

윤동주는 1917년 12월에 현재의 길림성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용(민족주의자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아명은 해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1908년 명동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그것을 발전시켜 명동소학교로 키워나갔다.

 

윤동주는 1925년 이 학교에 입학하였고 1931년에 졸업한 후 1932년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는 이미 17세밖에 안된 나이인 1934년 <삶과 죽음>, < 초 한 대> 등의 시를 창작했다. 1935년에는 평양 숭실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1936년 폐교되자 다시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을 하였다. 이 무렵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하였다.

 

1941년 연전을 졸업한 윤동주는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70부를 발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것을 자필로 3부를 만들어 그 하나를 연전 2년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는 일본으로 떠났다.

 

1942년 일본 동경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던 윤동주는 그해 가을에 선배 정지용시인이 졸업했던 기독교 대학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편입을 하였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올랐다가 교토 압천 경찰서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금되었다.

 

이후 1944년 2월에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그해 3월 31일 재판정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그동안 오촌 당숙 윤영춘이 송몽규를 형무소에서 면접했을 때, 송몽규로부터 매일처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느라고 피골이 상접했더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도 일제의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 <서시> 일부

 

  
▲ 연변작가협회 소속 시인들 - 평론가 최용관 선생, 시인 리성비 선생 등 연변의 원로중견 시인들을 오랜만에 만나 조선족의 대표술인 고려촌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면서 한국과 연변 문단의 교류문제를 협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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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탐방기

  
▲ 일송정 -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룽징에 있는 소나무 정자. 룽징시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있으며,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로 유명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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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생가 앞에서의 ‘연변지용제 탐방단’ - 박찬웅 옥천 군의회 의장, 유자효 지용회 회장, 이재하 옥천군 문화예술과장 등 정지용과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길림성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앞에서 단체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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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에는 시인 윤동주의 삶에 대한 숭고한 자세와 진지하고 섬세한 시작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것이 시인 윤동주의 삶의 자세이고, 모든 죽어가는 것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그의 시 창작 태도인 것이다.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부조리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비판할 수 없다. 결벽증 환자 이상으로 순결했던 조선 청년 윤동주만이 불의와 잔혹성으로 일관했던 일본 군국주의에 온몸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7월 15일 오후 일본의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대표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는 기자회견을 열고 교토 지방검찰청이 1944년 3월31일자 윤동주 판결문을 최근 공개했다고 밝혀서 다시금 윤동주의 옥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판결문에는 윤동주가 같이 붙들려 똑같이 징역 2년의 실형 판결을 받은 조선인 유학생 송몽규와 함께 "(1942년부터 조선인에게 적용된) 징병제도가 조선의 무장 독립에 필요한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타나 있으며,  윤동주에게는 이 밖에도 일제가 조선어 과목을 폐지한 사실을 비판했다는 혐의도 적용됐다.

 

용정을 벗어나 연길공항에 도착하여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다음 일정은 북경 중앙민족대학으로 이동하여 제2회 정지용문학세미나에 참석하여 주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북경의 호텔에 돌아왔으나 윤동주의 <별헤는 밤>과 <또 다른 고향>이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 대성중학과 윤동주 시비 윤동주는 1932년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에는 평양 숭실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1936년 폐교되자 다시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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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연변 백두산탐방기

덧붙이는 글 | 여행은 8월 22일부터 8월 28일까지 다녀왔습니다. 제14회 연변지용제와 제 2회 북경정지용문학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탐방하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 조상들의 수많은 항일역사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이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탐방 내내 조두남작곡의 <선구자>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