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책지성 | 이상의 「날개」

맑은물56 2010. 4. 21. 08:57

신문:169호 책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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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지성 | 이상의 「날개」

박진우 / 영문과 석사 졸업

작가 이상, 그리고 차마 펴지 못한 그의 「날개」

작가에게 있어 문학작품은 스스로를 비춰주는 모종의 거울과 같다. 작가의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사물을 온전히 재현해낼 수 있는 거울로서든, 사물의 이미지를 다소 왜곡시켜 보여주는 거울로서든 문학작품은 작가 내면에 위치한 그만의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준다. 때문에 몇몇 작가는 자기 삶을 의도적으로 재현하고자 쓴 것이 아닐 지라도 자전적 요소로 가득한 문학작품을 생산하고는 한다. 이에 대표적인 작가로 우리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작가 이상(1910-1937, 본명: 김해경)을 떠올릴 수 있다. 이상이 1936년에 발표한 「날개」는 바로 그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문학작품이다. 「날개」는 26년 7개월이라는 그의 짧은 생애에 대한 “무서운 기록”의 일부이자 스스로 감추고 싶어 했던 본래 자아의 이미지를 드러내주는 거울인 것이다. 다만 총체성의 부재 혹은 파편화한 인간사로 요약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작품을 생산한 이상에 걸맞게도 그 거울이 사물을 그대로 비춰주지 않는 것이었을 뿐이다.

작가의 정신 세계를 비춘 거울, 「날개」

이상이 「날개」라는 거울 앞에 서자, 작품의 화자인 무명의 “나”가 나타난다. 나는 특별한 직업도 없이 자기 아내의 경제적 수입에 의존해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이면서 개인으로서의 일상생활도 없는 외부와 단절된 시대의 잉여인간이다. 나는 유일하게 아내를 통해서 세상을 만나고 잠시나마 세상과의 절연을 해제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철저히 아내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어떤 것 하나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모든 것을 아내와 의논해야 하는 나의 모습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어린 아이의 면모와 닮아있다. “만일 내가 그런 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해 내었을 경우에 나는 반드시 내 아내와 의논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에게 발견되는 어린 아이로의 퇴행 욕망은 이상의 우울한 어린 시절을 반영하고 있다. 세 살 때 호적상으로는 아니었으나 백부 김연필에게 양자로 입양되면서 이상은 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 때 이상은 어린 시절 동안 어머니 부재에 따른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겪어왔으며 이 정신적 외상이 이상에게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관 내지 여성관을 심어줬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된 이후에도 어머니 부재 문제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던 이상은 자기만의 상상의 어머니를 창조해냄으로써 어린 날 외상의 고통을 달랠 수 있었다. 이상에게는 두 여성, 금홍과 변동림이 어머니 부재로 인한 그의 정신적 외상을 달래줄 상상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금홍과의 동거생활(1933년)과 변동림과의 결혼생활(1936년)에서 이상은 두 여성에게 집 안주인 혹은 아내로서의 삶보다 집안의 경제적 부담을 책임지며 자기를 돌봐줄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금홍과 변동림은 다방이나 카페에 나가 일을 해야 했고 자식을 키우듯이 이상의 생활을 돌봐주었다. 이상은 두 여성의 노동에 의존하여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십 전짜리 은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날개」의 화자가 자신의 아내로부터 받은 은화에 의존해 무의미한 외출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금홍과 변동림으로부터 얻은 돈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정서적 만족을 느꼈던 이상의 삶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상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만족감을 지닌 채 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날개」의 현실적 배경이면서도 이상의 요구에 따라 금홍이 마담으로 일하기도 했던 다방 “제비”의 파산 이후, 이상은 친구의 고향인 평안남도 성천에서 8월 한 달을 보내게 된다. 이 때 이상은 산촌의 초록 벌판 사이에서 극한에 이른 「권태」(1936)의 한 풍경을 발견한다.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있는지 모를 그 권태의 풍경에서 아이들이 삶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똥누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본 이상은 이것을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라고 표현한다. 잠시라도 삶의 지루함을 잊어보고자 아이들이 똥누기 같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놀이에 응용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아이들이 지루한 생활 혹은 권태의 공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는 그들만의 절박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분열된 자의식과 극복의지

삶의 지루함은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 「날개」의 화자가 빈 집에서 벌이는 장난을 다룬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의 도구들을 가지고 놀면서 삶의 권태감을 누그러뜨리려 한다. 햇살이 들도록 해 아내의 화장대를 비추면 가지각색의 “병들이 아롱이지면서 찬란하게 빛난다.” 독자에게는 전혀 재미있어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는 나에게 “다시없을 오락”이다. 조그만 돋보기로 아내가 사용하는 휴지를 태워보는 일은 나에게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치 재미있었고”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노는 일에서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재미를 느낀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린 시절에 이상이 실제로 이런 종류의 장난을 혼자서 하곤 했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상이 이런 장난을 즐기면서 심적으로 만족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친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어린 아이의 외로움을 반증하는 한 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실패를 던지고 당기는 식으로 진행되는 포트-다 게임을 반복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상은 어머니 부재를 달래기 위해 자기만의 몇 가지 놀이를 창작하여 허무하게 끝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잠시나마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외로움과 지루함은 이상에게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숙명과도 같았기 때문에 이상은 삶에 대해 어떠한 애착심도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이상이 삶에 있어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드러나는데 실제로 이상은 가깝게 지내던 문우이며 같은 폐결핵 환자였던 작가 김유정에게 동반 자살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날개」의 화자처럼 이상은 죽음이라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의 단호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첫 장편소설 「12월 12」(1930)에서 이상은 자기 운명의 초라한 현실을 고백한다. “자살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살의 기회가 자신을 찾아와도 이상은 똥누기 놀이를 고안해 삶의 지루함을 달랬던 산촌 아이들처럼 혹은 아내의 물건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날개」의 화자처럼 삶의 절망 속에서도 그 절망을 잠시 잊게 해줄만한 놀이 혹은 기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또 다시 절망을 낳을 덧없는 기교였지만 말이다. 「날개」의 화자 또한 “절망-기교-절망”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그래왔기에 익숙하지만 또 다시, 끝내 절망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이 극한의 절망은 「날개」의 후반부에서 나의 주된 심리상태를 이루고 있다. 아내가 자신에게 먹이던 약을 아스피린으로 생각하고 있던 화자는 우연히 아내가 지금껏 자신에게 수면제 아달린을 먹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화자는 산에 올라가 아달린 여섯 알을 먹고 일주일 동안 잠을 잔다. 잠에서 깨어난 화자는 자신이 아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꾸몄다고 생각한 데 미안함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때 화자는 아내와 내객이 벌이는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하게 되고 큰 충격에 빠진 채 집을 뛰쳐나온다.

현실의 인간은 자기만의 기교 ․ 환상 ․ 합리화를 통해 잠시나마 삶의 절망스러움을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마지막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절망을 결국은 피할 수 없다. 미스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나는 자기가 살아온 절망의 시간, 우연히도 작가 이상이 살아온 권태의 시간이기도 한 스물여섯 해를 회상한다. 이 때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거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현실의 절망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법한 자기 존재조차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는 잔인한 것이었다. 자기 존재, 그 존재의 욕망, 그 어느 하나의 본질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혼란한 세계에서 이상은 「날개」의 화자를 통해 자신의 삶에 나타난 절망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을 벗어가고자 「날개」의 화자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날아보잤꾸나”라고 말한다. 화자는 또 다시 잠시나마 그 절망을 잊기 위해 삶의 기교를 부리고 있지만 그 뒤에 찾아올 절망이란 화자가 지금껏 겪어온 것과 다르다. 그러한 이유는 현재 그가 서있는 공간, 백화점 옥상에 기인한다. 이곳에서 가상의 날개를 펴고 비상한다는 것은 화자에게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가 스스로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죽음이 「날개」의 화자에게 찾아올 수 있다. 이번만큼은 이상이 거울 속의 자신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진정 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2월 12」일에서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자신의 최후의 칼, 펜으로 이상은 간절히 원했지만 스스로 이루지 못했던 세상과의 영원한 단절, 죽음을 자신의 또 다른 자아, 「날개」의 화자에게 써내려감으로써 어쩌면 자신에게도 죽음을 안겨주려 했을지 모른다. 날개가 있어 비상의 꿈을 가질 수 있었으나 현실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상은 이렇게 그 가여운 자기의 또 다른 나의 죽음을 위해 그의 최후의 칼로써 「날개」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함주호 / jhfn@khugnews.co.kr


대학원보 신문:169호 (2009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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