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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독서의 계절에

맑은물56 2010. 2. 19. 11:05

고       별
                     독서의 계절, 다독의 즐거움전과 함께

        인간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계절감은 가슴을 향해 들려오는 멜로디이다. 
        유난히 지난 가을부터 들었던 애절한 첼로 소리를 들으며 겨울에 들어선다. 

 가을이 다하면, 아니 겨울이 오면,
 40여 년 된 내가 다니는 학교 건물 하나가 헐리게 된다. 그 건물 아래 사방공사처럼 등을 대고 섰던 통일동산도 같이 사라진다. 지금은 고혹적이다싶었던 선연한 가을 단풍도 다 끝난 시간, 곧 그 가까이 휴식공간이었던 칡넝쿨 늘어진 ‘노아의 뜰’과 고 박순천여사의 호를 따 지은 ‘해암터’의 현판도 내려진다.  

 많은 여고생들의 둥지였던 침묵의 콘크리트 건물 안을 둘러보니 수많은 지식과 헤아릴 수 없는 인내의 시간들이 구석구석, 세월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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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논어 학이편 ‘학이시습지불역열호’에 ‘습(習)’자를 보면, 둥지 위에 새의 깃(羽)이 있다. 새들이 태어나 세상날기를 시작할 때 떨어질까 두려워 둥지로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는 그 연습은 어느 순간, 고공비행의 자신감이 생겼을 적에 자기의 둥지를 찾지 않고 훨훨 날아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 새처럼,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이 곳에서 학습을 하면서 머무르다가 떠나갔는가? 

 그들이 가고가도 여기에 머무른 나로서는 낡음으로 수(壽)를 다하게 된 건물을 보면 볼수록 공간들이 베풀어낸 수많은 공덕에 고개가 숙여지고 그 후락함 하나하나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은 계절의 신발이다.
아쉬움 가득, 지난 가을 나는 학생들을 위하여 ‘독서의 계절, 다독의 즐거움전’이란 이름의 전시회를 작은 현관로비에 마련했다. 다독상 후보를 정해 학년별 대상으로 MP3를 주고 차상위 학생들에게는 도서상품권과 책을 상품으로 주면서 우수 독서록 60여 편을 모아 작은 규모의 도서전과 문방구전을 함께 곁들였던 전시였다. 독서지도의 프로그램으로 각 교실에 연중으로 돌아가는 학년별 필독서인 ‘교실을 찾아간 12권의 책’과 권장도서목록, ‘교내독서헌장’이 함께 했던 시간...., 

조금밖에 남지 않은 가을빛이 커다란 통유리를 타고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 고별 기분이 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십 년 성상의 하얀 건물이 서서히 추억 속으로 들어가고, 공허 속에 허공 만을 내 보일  시간이 다가오는 마당에 연 전시회는 이렇게 해서 학생들을 찾아 나섰던 교실 탐방의 사연들을 어느 공간에서 기억해 낼 수 있을까하는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서운한 빛의 소리가 가슴을 파고 들게 했다. 

전시장꾸미기의 구상을 하면서 운동장으로 나갔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서둘러 도착한 물건들로 쓰레기 취합장은 인간의 갈증을 채워주고 버려진 패트병들과 함께 뒤섞여 나뒹굴어져 있었고 의자도 쓰러진 채 거꾸로 쳐 박혀있고 멀쩡한 액자들이 가을비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있었다. 

 ‘버리는 물건들은 반드시 마구 버려져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던 시간, 그 때 나는, 그들을 현관로비로 하나 둘 인도하여 패트병은 나지막히 오려서 국화를 꽂아 놓고, 학업성취를 위해 헌신했던 쓰러진 나무 걸상은 일으켜 세워 굽조차 깎지 않은 물레 성형된 흙도자를 앉혔고, 먼지에 휩싸인 채 가을비 속에 버려진 연필스케치된 세계과학자들의 액자는 닦아서 이젤 위에 올려 오히려 ‘축하합니다’ 라는 리본을 달아, 책을 읽은 정성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자 가을비 속에 처연했던 과학자들의 버림받았던 인생은 마치 씻김굿으로 위로 받은 듯 나지막한 의자에 놓여진 가을 과실들과 함께 한층 그렇게 전시장분위기를 고조시켰던 시간이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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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의 ‘그리워’,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안소니퀸이 나온 영화 게오르규 원작의 ‘25시’의 대본,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품을 불과 몇 달 안두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륵에 공부하러 갔다가 실족 사망한 한 청년을 안타까워했던 그, 김정훈의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이양하의 ‘나무’, 옛 국어교과서, 월드컵 책자 ‘꿈은 이루어진다’, 금강산 구룡폭포에서 뛰어내린 공석하의 ‘거지화가 최북’, 박목월 시집, 문화인물 박두진, 정주영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어사 박문수, 일본에서조차 많은 동호인을 가지고 있는 윤동주, 니이체의 연인이었던 루 살로메와의 연애 끝에 두이노의 비가를 써 낸 릴케 등의 도서들이 연필깎이, 필통, 책갈피, 다양한 필기도구 등의 문방구들과 함께 다독의 독후감들을 비호한 전시, 

책읽기를 게을리했던 학생들을 각고면려 끝에 탄생시켰던 이 전시회를 만들면서, 책을 읽어가는 학창시절의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장식한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고 정말 좋은 습관은 좋은 생각을 낳고 좋은 생각은 깊이있는 생활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시간이었다. 구경 온 많은 학생들이 상자에 하얀 갱지를 붙여 주사위처럼 놓아둔 것에 깨알같은 소감과 함께 그렇게, 기운이 쇠해 가는 하얀 건물 안 작은 공간에서의 독서 전시는 닷새 동안 이어졌었다.

지금 나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사라진 공룡의 발자국 모양 성큼성큼, 성큼성큼 걸어온 시간 속에서 첼로현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제, 이 겨울 안에서 나는 인간의 둥지가 되어 인간의 삶을 사랑했던 공간으로의 삶과 학교를 지켜냈던 통일동산의 우람한 수문장 프라타나스, 느티나무, 칡덩쿨, 벚나무, 일본목련인 후박나무들 모두, 역사의 풍화작용을 겪으며 어김없는 침식윤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가슴을 파고든 나뭇잎들이 세월의 옷자락에 묻혀 곧 사라질 현관 로비에서, 지난 가을날의 독서전 ‘독서의 계절, 다독의 즐거움전’은 그렇게 늦가을을 지냈으며 흐르는 세월 앞에 시간을 바쳤다. 곧 흐르는 세월 앞에 40여 년의 건물은 신발을 벗는다.

추억의 화환을 여기 올린다.  
►기사작성: 안양 근명여자정보고 교사 박진희

 

출처 : http://news.goe.go.kr/main/php/search_view.php?idx=10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