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시가 있는 풍경> 피리구멍 / 김순일

맑은물56 2010. 2. 10. 09:29
<시가 있는 풍경> 피리구멍 / 김순일

☛서울일보 2010.2.9 (화요일)자.

 

 

            詩가 있는 풍경

   

 

        피리구멍 

                              김순일

 

 

만공滿空스님 머리통 속에는 만 개  수수만 개 번뇌의  옹이가 빠져나간 피리

멍이 벌집처럼 가득한데요 그 피리소리 절집이나 스님들 머리 속에 살겠지

했는데요  글쎄요  피리구멍을 빠져나온 나비 떼가 절집 찾아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요 내가 밥만 먹으면 어슬렁거리며 사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부글부글

끓는 서산 장터로 날아와서는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는데요 머리카락도 보이

지 않는데요 오늘 따라 서산집 언니네 형제네 쌍과부집 주모들의 궁둥이에 진

달래꽃이 만발했는데요  고사리 팔러 나온 갈티 아주메 무 배추 한 바지게 지

고  나온 벌말 아제 콩나물동이 이고 나온 덕지내 할메 시금치 몇 단 벌여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인지댁 생밤 치는 밤골 아주메 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늘

진 제자 골목도 진달래밭인데요 만공스님 머리통 속에서 빠져나온 피리소리를

풀어 마시는 막걸리 맛이 살겁구 살거운데요  흥얼흥얼  나도 피리소리 흉내를

내보는데요  내 머리통 속에도 피리구멍 한 개라도 뻥 뚫리겠는지요.

 

시 읽기

  보이거나 만져지는 사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움과 깨달음의 의미를 독특한 상상력과 튼튼한 시적구조에 철저한 메타포로 보여주고 있다.

  만공스님의 비움을 피리구멍이라고 설정하고, 설법을 피리소리로 명명했다. 깨달음을 위한 수많은 어록들은 나비가 되어 사람들의 머리통이 부글부글 끓는 질펀한 삶 속으로 날아들어 사라져 버렸다. 서산장터의 부산스럽고 원색적인 삶의 현장에서 본능적으로 그럭저럭 순응하고 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인의 구도적 삶을 엿보게 한다.

  '만공스님 머리통 속에서 빠져나온 피리소리를 풀어 마시는 막걸리 맛이 '살겁구 살거운데요' 부분이라든가  '흥얼흥얼 나도 피리소리 흉내를 내보는데요.' '내 머리통 속에도 피리구멍 한 개라도 뻥 뚫리겠는지요.'의 결미부분에서 시인은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구도적 성찰과 지혜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의지일뿐더러 자아의 통시적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한계성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유한의 현 세계를 초월하고 싶어지는 것이며, 현재의 삶을 통해  비극적 자아를 극복하려는 무한에 대한 추구의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인간의 숭고한 신념, 절대적 가치, 영원성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을 통해 무한한 정신적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며, 매순간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자기성찰이 삶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리라.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