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맑은물56 2010. 2. 6. 13:00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ㅣ • ㅣ§ 제4막님 시와칼럼
| 조회 18 | 10.02.03 16:32 http://cafe.daum.net/neohwangjiyeon/NGQn/88 

 

 

 손가락이 뜨겁다 / 채호기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 (2009,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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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대표적인 그런 시다. 그러나 시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차근차근 따라 읽고 나서, 다음 시인의 말을 읽은 뒤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만큼 공들여 읽을 이유가 없다면 그뿐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뜨겁다’ 그 뜨거운 별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뜨겁다’ 정도만 얼추 이해해도 왠지 환상적인 손놀림이 눈으로 들어오고 손가락으로 그 뜨거움이 전달될 것 같지 않은가?

 

 시인은 말한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몸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로 옮기는 그 순간의 작업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싶어 한다. 백지에다 언어를 쓰는 순간 모든 생각과 느낌이 그 언어로 확정되어버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다시 쓰거나 수정할 수 있는 걸 뭘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몸속에서 숙성되고 있을 때와 백지에 언어로 씌어지기 시작할 때는 분명히 다르다. 백지에 언어로 쓰기 시작하는 순간 생각과 느낌은 뒷전이 되고 언어가 언어를 부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만물과 상응하는 감각적인 몸에서 정밀한 고등 수학 문제를 푸는 이성적인 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한 편의 완성된 시가 또 다른 실재이며, 살아있는 독립된 유기체로 간주되길 기대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절망한다. 백지에 시를 쓰는 순간 나는 언어가 실재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언어를 잊어버린 채 실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나는 가끔 실재하는 어떤 것들이 아무런 난관도 없이 언어화할 것처럼 너무나 순진하게 믿는다.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시 쓰기에 열정적으로 매달리게 한다.”

 

 그는 인식의 주체로서의 몸과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줄곧 시로 표현해 온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박혀있는 자기만의 언어를 끄집어내어 모든 사물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대화의 기록을 다시 시로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냉철한 가슴을 필요로 하지만 일상의 뜨뜻미지근한 손으론 어림없다. 그의 뜨거운 손가락을 가만 따라 가보면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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