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법에 담긴 진리

淸白傳家八百年 / 여초 김응현

맑은물56 2009. 12. 28. 10:10
淸白傳家八百年 / 여초 김응현| 서예(書藝)
이보 조회 15 | 09.12.23 13:37 http://cafe.daum.net/ivoworld/2gWD/2704

백야 김좌진생가의 

안방에  있는 글씨인데 호는 선경인것 같은데~~~.

존함은 모른다.  / 어느 카페 에서..

 

 * 善卿(선경)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字(자)입니다. 여초선생의 작품입니다. / 이보 註

 

 

‘天分博涉’混淆의 大歷程 如初 金膺顯
글씨가 주는 ‘즐거운 놀라움’
-如初 書法의 50년을 생각하며-


이 흥 우 (시인)
家系, 天分, 硏鑽이 합해져

여초(如初 金膺顯)는 1927년 1월생이다. 서울 도봉구 번동(당시 경기도 高陽郡 樊洞)에서 태어났다. 안동 김씨의 명문인데, 조선왕조 말엽의 세도가로 유명한 장동 김씨(純祖妃인 純元왕후의 부친 金祖淳-左根-炳冀 등으로 이어진) 집안과는 여초의 11대조(三淵 昌翕)에게서 갈라졌다. 그러나 여초의 가계 또한 훌륭한 명문이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유명한 청음(淸陰 金尙憲)은 여초의 14대 조부, 청음의 손자들(谷雲 壽增, 退憂堂 壽興, 文谷 壽恒 등)이 두루 정승을 역임하고 글씨로도 알려졌다. 곡운은 전, 예, 해, 행서 등 여러 체의 글씨를 다 잘 썼으며, 특히 자기류의 독특한 예서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신도비는 “우암(尤庵 宋時烈)이 짓고 곡운이 쓰면 그만이라.”는 말이 통했다고 한다. 여초의 12대조인 문곡(壽恒)은 영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전서를 잘 써 정몽주신도비 등 많은 비석의 전서[篆額]를 썼으며, 해서, 행서에는 독특한 개성이 나타나는 글씨가 있다.


문곡의 3남인 삼연 김창흡(1653∼1722, 如初의 11대조)은 율곡 이후의 대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여초의 7대조 화서(華棲 學淳)는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5대조는 순조의 부마, 증조부(梧泉 奭鎭)는 높은 관직(형조판서, 判敦寧院事)에 있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서 음독자결을 한 순국열사이다. 여초의 5대 조모는 순조의 제2녀(福溫공주, 한말의 개결한 서화가 海觀 尹用求는 순조의 제3녀인 德溫공주의 아들)이다.


여초가 태어났을 때, 고양군 번동, 그 집[梧峴丙舍]의 당주는 조부 동강(東江 寗漢, 한말 秘書院丞)이었고, 아버지 번계(樊溪 潤東) 또한 한학자(親王府의 判任벼슬인 ‘典衛’)였다. 여초는 번계의 4남이었는데, 위로 3형제(覲人 文顯, 一中 忠顯, 白牙 彰顯)가 두루 학문과 글씨로 일가를 이루었다.


여초는 자신이 지은 아호인데, 본명(膺顯) 외에 자(善卿)가 있고, 또 여러 당호(無外軒, 碧山廬, 拜石丈室, 南山廬, 景顔齋), 아호(頑如, 頑道人, 頑翁 등)를 아울러 썼다. 배석장실은 송의 미불(米版)의, 완여(頑如)는 등석여(鄧石如, 完白, 頑伯)의 기풍을 엿보이는 것이다.
“천분이 없는 시인이 시단의 최고봉에 서려 해도 천마는 그를 위해서 하늘을 날지[飛翔] 않는다.”는 말이 보왈로(프랑스, 1636∼1711)의 ‘시학’에는 있다. 그림이나 글씨나 시나 음악이나 그 만큼 천분이 중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서예가로서의 여초의 작품세계에, 조상의 핏줄이나 어떤 유전적인 요인과 아울러, 대대로 이어진 그 집안의 환경과 분위기를 가산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서예작품에는 청음, 삼연을 비롯한 그의 선조의 시문(詩文)들이 많다.
물론 한 예술가의 작품의 세계는 천분이나 집안의 내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여초는 옛 서법의 전범을 바탕으로, 더 근대적인 방법론을 추구하며 특수부대의 맹훈련과도 같은 연찬을 거듭했다. 그것이 또한 여초의 천분(천성)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떡잎부터 알 수 있다’


사람이 예술작품을 만나며 느끼는 감흥은 하나의 ‘놀라움’이다. 좋은 음악이나 ‘소리 없는 음악[無聲之音]’이라고도 하는 글씨나, 좋은 시를 대하며, ‘아’하는 공감이나 새로운 감흥을 느낀다. 그것은 하나의 의외성(意外性), 곧 놀라움[驚異]이다.
50년간 여초의 작품을 대하며 느낀 것을 요점을 찍어가듯이, ‘즐거운 놀라움(감흥)’의 과정으로서 정리해 볼 수도 있다.


내가 여초의 서예[書法藝術]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아마도, 6·25 동란 전인 초기 국전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놀라움’까지를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여초의 작품을 보며 처음으로 ‘놀라움’을 느낀 것은 1965년 서울(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제1회 개인전에서였다.


젊은 패기가 있는 각 체의 의욕적인 글씨와 함께 굵은 대에 예서를 칼로 새긴 쌍폭[對聯] 등 색다른 작품이 있었는데, 더욱 의외성, 경이를 느낀 것이 1961년에 쓰고 오석에 새긴 2천 1백 43자의 해서 ‘동강선생 묘지(東江先生墓誌)’(탑본, 이 墓誌는 부친 潤東公이 지음)였다. 그것은 장맹룡비(張猛龍碑)풍의 해서를 쓴 여초의 현대적인 감각이, 그 비석의 글씨가 지닌 ‘넘치는 긴장감의 빡빡함’을 중화시킨 것 같은 글씨였다. 그러면서도 ‘여초의 날카로운 패기가 자신이 파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타고 무디고 단단한 돌에 모가 진[方筆, 장맹룡비 등 北碑 해서의 한 특징) 획의 해서의 굳센 아름다움을 준수하게 파고 새겨간’ 글씨였다. 원래 장맹룡비는 ‘기혼(氣魂)이 충실한 글자의 맺음새와 두드리면 울릴 듯한 굳세고 반듯하고 웅혼한 점획’이 뛰어나다고 한다.


진작, 여초는 글씨와 함께 이미 1940년대 초에 전각(篆刻)을 시작해서 조부 동강 선생의 도장들을 일제의 주머니칼로 새겼다. 그후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 李容汶 수집 印影集)며 중국의 여러 도장(漢印, 吳昌碩의 印影 등)을 독자적으로 새겨가며 배웠고, 79년에는 인영집(『如初印存』, 1백 20여 印影 수록)을 냈다. 여초의 전각은 그 기예와 패기와 글씨의 격이 단단하고도 무딘 돌의 품성과 어울려 특출한 경지를 이룬다.


동강 선생 묘지의 탑본은, 1974년 4월, 자유중국의 대북(臺北) 고궁박물원(‘東方硏書會訪華展’)에서도 전시되었는데 “한 가로획, 한 세로획마다 기량이 뛰어나고 가지런하며, 끝까지 한 획의 엉성함도 볼 수 없고 절로 부드럽고 넉넉하며 그 기세가 다가든다.[一橫一竪 工工整整, 終篇不見一筆草率, 渾厚天成性, 氣勢逼入. 그 곳 中央日報 徐梅屛記]”는 등의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10년 후인, 1975년(11. 29∼12. 5, 東方硏書會展, 관훈동 미술회관)에, 나는 여초의 행서대작(8曲屛 ‘栗谷先生出東門詩’)을 보고 또 한 번의 ‘즐거운 놀라움’을 느꼈다. 그 동안, 가로획이 가늘고, 대체로 청수하면서도 날카로운 맛이 더 느껴지는 여초의 행서에서 은근히 다른 무엇인가를 바랐었는데, 가로 세로의 획이 고르고 한껏 호방한 그 행서는 그런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었다. 굵고 가는 행서의 획이 세차게 움직이고 꿈틀거리듯이 변화하며, 여초가 항상 강조하는 ‘글씨의 일회성’의 참맛이 호방하게 연출된 글씨였다.


다시 10년이 지난 1986년(11. 20∼12. 4, 호암아트홀, 如初 金膺顯展), 나는 그런 호방한 여초 행서의 한 도달점을 만나는 것 같은 ‘즐거운 놀라움’을 경험했다. 초대작(超大作)이라고 할 만한 허암(虛庵 鄭希良)의 ‘혼돈주가’(混沌酒歌, 240×540cm)였다.
여초의 회갑기념전인 그 전시회는, 특히 예서, 행서, 해서와 전서, 초서, 갑골문 등에 걸쳐 여초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했었는데, 두 점의 해서 대작(林椿의 ‘足庵記’ 10曲屛, 白雲和尙의 ‘興聖寺入院小說‘ 8曲屛)이 또한 ‘즐거운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여초의, 그리고 현대 해서의 한 전형을 생각하게 하는 해서였다.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은 북비(張猛龍碑, 孫秋生·始平公 등의 龍門造像記 등)의 뼈대와 힘줄과 살을 단단히 지녔으면서도, 원래 북위의 해서의 모가 진[方筆] 획 끝이 남조 글씨의 영향을 받아 자칫 둥글어[圓筆]진 글씨를 쓴 것이었다. ‘족암기(足庵記)’는 북위 해서(淮南王의 ‘修治古塔銘’의 筆意)를 납작하게 가로 다져진 글자의 맺음새를 따라, 약간 희미한 먹으로, 돌에 새겨져 비바람에 절은 옛 글씨의 맛을 내며 올차게 쓴 해서였다.
50년 간, 수많은 글씨들을 대하며, 문득 문득 ‘즐거운 놀라움’을 느꼈는데, 간혹, 여초의 초기작품(1940년대)을 만나면서, 새삼스럽게 또 다른 ‘의외성’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 ‘떡잎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 상징하는, 여초의 ‘천분’이었다.


그러나 대개 10년마다 내가 느끼게 된 ‘즐거운 놀라움’은, 50년 간을 문득문득 보아온 여초의 글씨에 대한 감흥의 두드러진 글씨의 점(點)과도 같은 것이다. 여초의 서예작품의 가치는 의당 글씨의 획이나 결구·포치처럼 더 지속적인 선이나 면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