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의 예서와 나의 전서
2006년 6월 청재 민승준 작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공자가 물을 찬미한 이유
원문
徐子曰 "仲尼극稱於水 曰. "水哉! 水哉!" 何取於水也?
孟子曰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苟爲無 本, 七八月之間雨集 溝澮皆盈 其也 可立而待也. 故聲聞過情 君子恥之"
해설
徐子曰
"仲尼극稱於水 曰. "水哉! 水哉!"
何取於水也?
서자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자주 물을 찬미해 "물이여! 물이여!"라고 하셨는데
물에서 어떤 점을 높이 취하신 것입니까?
孟子曰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맹자가 말했다
"근원을 가진 샘물은 솟구쳐 나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며,
움푹패인 웅덩이들을 다 채운 후에 앞으로 나아가 사해에 까지 이른다.
근원이 있은 것은 이와 같으니, 공자께서는 이 점을 높이 산 것이다.
苟爲無 本,
七八月之間雨集 溝澮皆盈 其也 可立而待也.
故聲聞過情 君子恥之"
근원이 없는 빗물의 경우 칠팔월 사이에 빗물이 모여 크고 작은 도랑들을
가득 채우지만, 그것이 마르는 것은 서서 기다릴 만큼 금방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군자는 부끄럽게 여긴다.
盈科而進
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흘러간다
이것은 구심의 원칙과 원심의 원칙을 지양하는 현실적 원리이다.
利他的인 태도는 매우 필요하지만, 그러나 현실적 제한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절차를 가지고 시행할 수밖에 없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과,
명분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금방 본 바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군자는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다.
근본이 확고한 사람은 항상 심지가 굳어서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다.
맹자는 이런 점을 물이 흐르는 것에 비유하여 표현했다.
추사의 세한도가 바탕화면에 있는 한국요가 수련원 홈페이지
완당 김정희 촉나라 예서법으로 쓴 대련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또 명월을 부르니 벗이 셋이 되었구나
함께 매화를 사랑하며 같은 산에서 머무네
조선 정조때 규장각의 초계문신이었던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정약용과 함께 벼슬길에 들어서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지냈다.
추사 집안은 노론벽파였고, 심상규는 노론시파였다.
제주도에서 9년여에 걸친 유배형을 살고 온 추사는
얼마 후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에서 풀려난 것이 1848년이고 북청으로 가는 것이 1851년이다.
그 3년 사이에 완당은 제자 하나를 만난다.
그가 동암(桐庵) 심희순(熙淳, 1819-?)이다.
추사보다 23세가 아래인 사람이다.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또 명월을 부르니 벗이 셋이 되었구나, 함께 매화를 사랑하며 같은 산에서 머무네
위의 대련은 바로 심희순에게 써준 것이다.
시의(詩意)도 참 아름답고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북청 시절 추사는 심희순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북으로 온 이후에 어느 곳인들 혼을 녹이지 않으리요마는
유독 영감께 유달리 간절하다오.
요즘 같은 말세에 영감을 만나 늘그막을 즐기며
차츰 흐뭇하고 윤택함을 얻어 적막하고
고고한 몸이 평생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는데,
신명에게 거슬림을 쌓은 탓으로 유리되고 낭패되어,
영감과 작별하고 또 천리변방의 요새 밖에 오게 되었으니 어쩌잔 말이오.”
추사의 마음이 허허로움 속에 절절하게 묻어난다.
1851년이면 추사 나이 66세요, 동암 나이 43세다.
이 무렵 동암은 삼사의 요직을 지내고 있었다.
동암 심희순은 심상규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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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전서는 전서답게만, 예서는 예서처럼만 쓴다.
공모전 교육으로 인해 작품 속에서의 자연스런 조화를 찾지 못하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쓰는 경향이 있어 자유로운 획맛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사실 많은 한국 서예가들이 형식미에 너무 치중해서
본래의 서예 획의 본질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획을 써나가는게 아니라 바르는 듯 자형의 규칙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서를 쓸때 옆으로 넓은 사각형이란 틀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있지 않은가?
틀이란 것은 사실 작품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예술가라면 영원히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가지 만약 대단한 학자인 추사라는 존재를 모르고 추사의 예서 작품을 봤다면?
한국에서 예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추사의 예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기괴하게 지나치게 기교를부렸다고 싫어하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이 글씨를 쓰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기교를 배워서 기교를 버려야한다
팔대산인의 초서글씨는 아이가 쓴 듯 꾸밈이 없는 글씨이다.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이런 거 아닐까?
난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도 없으면서 기교를 부리거나 기법을 충분히 익히지 않고
이미 기교를 익혀 기법을 버린 척 팔대산인 흉내를 내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란 말은 석사 논문에도 거론했었다.
서예에 있어서는 선이 아니라 획이라 해야 한다는게 나의 견해이다.
획은 그 자체로 살아움직이는 것인 반면
선은 많은 선이 모여 면이 되고 그 면이 모여 입체가 되어 형이 드러나는 것이다.
서양미술에서 말하는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 선이다.
난 서예에서는 획이라고 하고 싶다
조화.
한국에선 한 글자 한 글자는 잘 썼지만 전체가 잘 어울려지지 않는 작품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젠 한 글자 한 글자는 이상하고 삐뚤고 기울어지고 기외하더라도
전체가 잘 어울려 맛을 내는 작품을 고민한다.
이런 고민이 필요하다.
혼란함 속에서 규칙찾기
전서와 예서에서 행서의 기운을 살리기
획과 획이 끊어지지 앟고 연결되는 맛, 즉 행서의 기운을 실어본 것이 공통점이 아닐까?
어떤 이들은 정판교은 그림은 아주 좋은데 글씨는 너무 지나치다라고 한다.
5체를 섞어 아울러서 그렇다. 자칫하면 난잡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질서를 찾는다면?
중국작가들도 다 훌륭한 작품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맛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추사는 예서에서 행서맛을 살리고 리다.
나는 전서에서 행서맛을 살려 보고 싶었다.
기운생동, 자연스런 살아있는 느낌을 추구한 것이 공통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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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경
출처 : http://cafe.naver.com/hanmorning/240
일찍이 들으니, 우임금은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曾聞大禹飮而甘 嗜酒全身十二三
증문대우음이감 기주전신십이삼
- 심수경(沈守慶), 〈차임석천감자운(次林石川甘字韻)〉,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
해설
이 글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수경(1516~1599)이
자손들에게 술을 경계시키는 뜻으로 지은 시 중의 일부입니다.
술은 하(夏)나라 때에 의적(儀狄)이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맛이 좋으므로 우(禹)임금에게 바치자 우임금이 맛을 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술로 인해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며 의적을 멀리하고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임금이 이미 술로써 나라를 망칠 사람이 있을 것을 알았다면,
처음 제조했을 때에 어찌 엄형으로 다스려 온 세상에서 근절시키지 않고 물리치기만 했단 말인가.
이는 너무 관대한 처분이 아니었던가.
후세에 주지(酒池)ㆍ조제(糟堤)가 생긴 것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여, 술을 국법으로 금지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1) 주지(酒池)ㆍ조제(糟堤) : 술로 만든 연못과 누룩으로 만든 언덕.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총애하던 달기에게 미혹되어 주지와 조제를 만들어
온갖 향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멸망하였다는 고사가 있음.
술은 기분좋게 하는 마법의 물입니다.
술 酒 글자는 술통에 마개를 닫아놓은 형상입니다. 술은 왜 기분을 좋게 할까요?
그것은 일종의 죽음과 비슷한 것입니다. 죽음은 네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이 육체를 벗는 것입니다.
땅몸을 벗어나 하늘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아름다운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죽음이 그것이지요.
두번째 죽음은 성적인 액스타시 입니다.
쾌락이 온몸의 세포를 엄습하는 그 순간, 사람은 괴로운 표정을 짓게 되며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죽음은 의식의 망각입니다.
잊는 순간 죽은 것입니다.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죽어있습니까? 아니면 살아있습니까?
예전에 전강선사가 대중들에게 물엇던 추상같은 질문입니다.
네번째 죽음은 취하는 것입니다.
취한 상태는 명료했던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으로 각성이 사라져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왜 좋은가? 그의 삶이 너무나 버거웠기 대문입니다.
머릿속은 온갖 번뇌로 난무하고 있기에 그것의 망각은 편안함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망각일 분-근원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래서 깨고 나면 더 후회스럽고 고독감과 허무감이 밀려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또 술을 찾습니다. 술은 조금씩 육체를 망가뜨리다가 나중에는 영혼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맑고 투명한 여러분의 눈 빛 속을 탁한 술기운으로 가득 채우려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보다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술의 노예가 아니라 만물의 신령한 주인입니다.
술 한잔 해야 글씨가 써진다는 서예가도 있습니다.
멋있나요? 추래한 것입니다.
술을 모르고 어찌 예술을 알아?
라고 일갈하는 원로서예인도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의 알콜중독을 가리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 맑은 정신으로 붓을 휘두를 수 없습니까?
왜 신성한 각성으로 예술의 춤을 출 수 없습니까?
태양이 술을 먹고 떠오르는 것이 아니며 낙엽이 술에 취해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과음하여 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바람에 나부끼는 꽃무더기보다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하늘가를 수놓고 지나가는 기러기때보다 멋진 서예를 지어낼 수 있습니다.
고유한 당신만의 기운을 느끼세요.
그것을 이 세상에 자랑스럽게 분출하세요!
[출처] 서예원리-살아있나요?
(한치선의 아침명상)
작성자 을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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