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숙의 난'으로 득 본 사람 따로 있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09.11.17 10:11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미실(고현정 분)의 죽음을 계기로 드라마 < 선덕여왕 > 의 전개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선덕여왕의 즉위(632년)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여왕의 말년에 벌어질 '비담의 난'(647년)을 암시하는 복선을 벌써부터 깔고 있다. 설원(전노민 분)이 비담(김남길 분)에게 "어머니는 널 왕으로 만들려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비담이 미실의 자리에 앉아 세종·설원·하종 등을 지휘하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16일에 방영된 < 선덕여왕 > 제51부에서는 미실이 사망한 때(61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로부터 최장 십 몇 년 뒤에 벌어진 사건들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묘사했다. 631년에 발생한 '칠숙의 난'과 그 이듬해에 발생한 선덕여왕의 즉위를 미실의 죽음과 연관 지어 간략히 처리한 것이다.
선덕여왕의 즉위과정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드라마에서 미실의 죽음은 화려하게 처리하고 정작 핵심인 선덕여왕의 등극은 이처럼 '졸속'으로 초라하게 처리해버렸으니, 이런 경우야말로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의 즉위를 미실의 죽음에 딸린 부수적 사건으로 처리함에 따라 두 사건의 배경 및 의의까지 미실의 죽음에 파묻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시청자들이 2개의 역사적 사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두 사건은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그것들은 어떤 의의를 띠는 것이었을까? < 삼국사기 > 및 필사본 < 화랑세기 > 를 근거로 두 사건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미실 죽음과 아무 관련 없는 '칠숙의 난'
< 선덕여왕 > 의 16일 방영분에서는, 미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칠숙(안길강 분)이 충동적으로 제2의 쿠데타를 결심하고 여기에 석품(홍경인 분)이 가세하여 '칠숙의 난' 혹은 '칠숙과 석품의 난'이 발생했다고 묘사했다. 주모자인 칠숙은 괴성을 지르며 덕만공주(이요원 분)에게 달려들었다가 유신(엄태웅 분)과 비담의 칼에 찔려 울분을 삼키고 말았다. 석품 역시 분을 삼키고 쓰러졌다.
하지만, 미실의 죽음과 칠숙의 난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었다. 필사본 < 화랑세기 > 제16 풍월주 보종 편에 따르면, 미실은 아들 보종이 풍월주가 된 이후 즉 610년대 중반 이후에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 즉위 전년도인 631년에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칠숙이 미실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 우발적으로 난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 화랑세기 > 기록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쿠데타의 전개과정 역시 < 삼국사기 > 기록과 명확히 상치된다. < 삼국사기 > 권4 진평왕 본기에서는, 진평왕 53년(631) 음력 5월에 칠숙과 석품의 반역을 사전에 간파한 진평왕이 칠숙을 체포하여 구족(九族)과 함께 그를 멸했으며, 국경까지 도주한 석품은 처자식이 보고 싶어 나무꾼 차림을 하고 몰래 집에 돌아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를 보면, 칠숙의 난이 실제로는 구체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으므로, 오늘날로 말하면 내란음모 혹은 내란예비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드라마 속 칠숙은 괴성을 지르며 덕만에게 달려들었지만, 실제의 칠숙은 괴성은커녕 찍소리도 못한 채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53년간이나 집권한 진평왕(재위 579~632년)이 칠숙의 난 이후 8개월 뒤에 사망한 점으로 보아, 칠숙의 난은 연로한 진평왕의 죽음이 임박하여 덕만의 집권 준비가 진행되던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직접적 배경은 진평왕의 건강문제로 인한 정국 불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칠숙의 난' 통해 정국 주도권 장악한 김춘추·김유신 가문
< 삼국사기 > 기록에서는 사전에 칠숙의 난을 진압한 주체가 진평왕이라고 했지만, 위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진평왕이 사건처리를 직접 주도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김용춘·김서현이 사건처리를 주도했다'는 설과 '김춘추·김유신이 사건처리를 주도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5공 정권의 비자금 공급책' 이원조를 연상시키는 화랑 염장이 칠숙의 난 이후에 조부령(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 김춘추·김유신에게 '비자금'을 제공했다는 < 화랑세기 > 제17세 풍월주 염장 편의 기록을 볼 때에, 위의 두 학설 중에서 김춘추·김유신 주도설이 신빙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숙의 난을 처리한 쪽에 권력과 돈이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설은 실질적으로 똑같은 말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김춘추는 김용춘의 아들 또는 조카이고, 김유신은 김서현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설을 취하든 간에 김춘추 가문과 김유신 가문이 칠숙의 난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선덕여왕 집권기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여왕의 양 날개가 되어 한 사람은 외교를 맡고 한 사람은 군사를 맡게 된 데에는 칠숙의 난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 집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득세를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진골 신분인 김춘추의 대권 장악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선덕
드라마 < 선덕여왕 > 에서는 미실의 죽음과 칠숙의 난을 계기로 반대파를 제압한 덕만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즉위식을 치렀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은 < 삼국사기 > 기록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뜻 보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문장이지만, < 삼국사기 > 권5 '선덕여왕 본기'의 서두에는 미묘한 문장 하나가 있다. "왕(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국인이란 것은 '국(國) 즉 도성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상징되는 고급 귀족세력을 가리킨다. 국(國)이란 한자는 한때 '도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의 < 삼국사기 > 기록에 의하면, 덕만은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전임자인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또 후임자인 진덕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법리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후계자'라는 지위에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은 자'라는 지위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 화랑세기 >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서는 진평왕 생전에 이미 덕만이 후계자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덕만은 진평왕 사후에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어느 경우에도 귀족세력의 지지나 옹립이 있어야 왕위에 오를 수 있겠지만,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임자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의회(귀족세력)의 의결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것은 질적으로 분명히 다른 일이다.
선덕여왕이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직전에 발생한 칠숙의 난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덕만의 위상이 위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칠숙의 난을 진압한 핵심 세력이 김춘추·김유신 가문이었음을 고려할 때에, 이 사건을 통해 힘이 막강해진 두 가문이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여왕의 등극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평왕 말기 정국불안 배경으로 발생한 '칠숙의 난'
훗날 김춘추가 추대절차를 거쳐 등극한 것은, 그의 신분적 한계(진골)로 인해 형식적으로나마 귀족세력의 동의를 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칠숙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힘에 크게 의존한 선덕여왕은 등극 과정에서도 양가(兩家)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의 힘에 크게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본다면, 선덕여왕의 즉위과정에서부터 훗날의 신라 정치구도가 이미 상당 정도로 잉태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춘추·김유신 가문이 선덕여왕 시대에 국정을 주도하고 김춘추가 선덕여왕 사후 7년 뒤에 진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가문이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 즉위라는 사건들을 거쳐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 선덕여왕 > 제51부에서 미실의 죽음과 연관되어 압축적으로 소개된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 즉위라는 두 사건은 실제로는 미실과 아무 관계없이 진평왕 말기의 정국불안을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또 드라마 < 선덕여왕 > 에서는 두 사건을 장래에 발생할 비담의 난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 이 두 사건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득세 및 김춘추의 등극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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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에 방영된 < 선덕여왕 > 제51부에서는 미실이 사망한 때(61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로부터 최장 십 몇 년 뒤에 벌어진 사건들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묘사했다. 631년에 발생한 '칠숙의 난'과 그 이듬해에 발생한 선덕여왕의 즉위를 미실의 죽음과 연관 지어 간략히 처리한 것이다.
선덕여왕의 즉위과정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드라마에서 미실의 죽음은 화려하게 처리하고 정작 핵심인 선덕여왕의 등극은 이처럼 '졸속'으로 초라하게 처리해버렸으니, 이런 경우야말로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의 즉위를 미실의 죽음에 딸린 부수적 사건으로 처리함에 따라 두 사건의 배경 및 의의까지 미실의 죽음에 파묻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시청자들이 2개의 역사적 사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두 사건은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그것들은 어떤 의의를 띠는 것이었을까? < 삼국사기 > 및 필사본 < 화랑세기 > 를 근거로 두 사건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미실 죽음과 아무 관련 없는 '칠숙의 난'
< 선덕여왕 > 의 16일 방영분에서는, 미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칠숙(안길강 분)이 충동적으로 제2의 쿠데타를 결심하고 여기에 석품(홍경인 분)이 가세하여 '칠숙의 난' 혹은 '칠숙과 석품의 난'이 발생했다고 묘사했다. 주모자인 칠숙은 괴성을 지르며 덕만공주(이요원 분)에게 달려들었다가 유신(엄태웅 분)과 비담의 칼에 찔려 울분을 삼키고 말았다. 석품 역시 분을 삼키고 쓰러졌다.
하지만, 미실의 죽음과 칠숙의 난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었다. 필사본 < 화랑세기 > 제16 풍월주 보종 편에 따르면, 미실은 아들 보종이 풍월주가 된 이후 즉 610년대 중반 이후에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 즉위 전년도인 631년에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칠숙이 미실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 우발적으로 난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 화랑세기 > 기록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쿠데타의 전개과정 역시 < 삼국사기 > 기록과 명확히 상치된다. < 삼국사기 > 권4 진평왕 본기에서는, 진평왕 53년(631) 음력 5월에 칠숙과 석품의 반역을 사전에 간파한 진평왕이 칠숙을 체포하여 구족(九族)과 함께 그를 멸했으며, 국경까지 도주한 석품은 처자식이 보고 싶어 나무꾼 차림을 하고 몰래 집에 돌아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를 보면, 칠숙의 난이 실제로는 구체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으므로, 오늘날로 말하면 내란음모 혹은 내란예비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드라마 속 칠숙은 괴성을 지르며 덕만에게 달려들었지만, 실제의 칠숙은 괴성은커녕 찍소리도 못한 채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53년간이나 집권한 진평왕(재위 579~632년)이 칠숙의 난 이후 8개월 뒤에 사망한 점으로 보아, 칠숙의 난은 연로한 진평왕의 죽음이 임박하여 덕만의 집권 준비가 진행되던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직접적 배경은 진평왕의 건강문제로 인한 정국 불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칠숙의 난' 통해 정국 주도권 장악한 김춘추·김유신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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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정권의 비자금 공급책' 이원조를 연상시키는 화랑 염장이 칠숙의 난 이후에 조부령(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 김춘추·김유신에게 '비자금'을 제공했다는 < 화랑세기 > 제17세 풍월주 염장 편의 기록을 볼 때에, 위의 두 학설 중에서 김춘추·김유신 주도설이 신빙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숙의 난을 처리한 쪽에 권력과 돈이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설은 실질적으로 똑같은 말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김춘추는 김용춘의 아들 또는 조카이고, 김유신은 김서현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설을 취하든 간에 김춘추 가문과 김유신 가문이 칠숙의 난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선덕여왕 집권기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여왕의 양 날개가 되어 한 사람은 외교를 맡고 한 사람은 군사를 맡게 된 데에는 칠숙의 난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 집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득세를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진골 신분인 김춘추의 대권 장악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선덕
드라마 < 선덕여왕 > 에서는 미실의 죽음과 칠숙의 난을 계기로 반대파를 제압한 덕만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즉위식을 치렀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은 < 삼국사기 > 기록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뜻 보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문장이지만, < 삼국사기 > 권5 '선덕여왕 본기'의 서두에는 미묘한 문장 하나가 있다. "왕(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국인이란 것은 '국(國) 즉 도성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상징되는 고급 귀족세력을 가리킨다. 국(國)이란 한자는 한때 '도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의 < 삼국사기 > 기록에 의하면, 덕만은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전임자인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또 후임자인 진덕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법리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후계자'라는 지위에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은 자'라는 지위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 화랑세기 >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서는 진평왕 생전에 이미 덕만이 후계자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덕만은 진평왕 사후에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어느 경우에도 귀족세력의 지지나 옹립이 있어야 왕위에 오를 수 있겠지만,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임자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의회(귀족세력)의 의결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것은 질적으로 분명히 다른 일이다.
선덕여왕이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공식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직전에 발생한 칠숙의 난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덕만의 위상이 위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칠숙의 난을 진압한 핵심 세력이 김춘추·김유신 가문이었음을 고려할 때에, 이 사건을 통해 힘이 막강해진 두 가문이 귀족세력의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여왕의 등극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평왕 말기 정국불안 배경으로 발생한 '칠숙의 난'
훗날 김춘추가 추대절차를 거쳐 등극한 것은, 그의 신분적 한계(진골)로 인해 형식적으로나마 귀족세력의 동의를 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칠숙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힘에 크게 의존한 선덕여왕은 등극 과정에서도 양가(兩家)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의 힘에 크게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본다면, 선덕여왕의 즉위과정에서부터 훗날의 신라 정치구도가 이미 상당 정도로 잉태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춘추·김유신 가문이 선덕여왕 시대에 국정을 주도하고 김춘추가 선덕여왕 사후 7년 뒤에 진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가문이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 즉위라는 사건들을 거쳐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 선덕여왕 > 제51부에서 미실의 죽음과 연관되어 압축적으로 소개된 칠숙의 난과 선덕여왕 즉위라는 두 사건은 실제로는 미실과 아무 관계없이 진평왕 말기의 정국불안을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또 드라마 < 선덕여왕 > 에서는 두 사건을 장래에 발생할 비담의 난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 이 두 사건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득세 및 김춘추의 등극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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