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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야심경 설법-청화(淸華)대종사

맑은물56 2009. 6. 6. 01:51

19870217-반야심경 설법-청화(淸華)대종사 


        반야(般若)란 무엇인가?


반야(般若) 이것은 참 지혜(智慧)입니다. 우리 인간이 축적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서 번뇌를 떠나버린 성자의 참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반야입니다.

따라서 일반 중생한테는 사실은 반야는 없고 성자한테만 반야가 있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있습니다.

반야(般若)는 인도말로하면 ‘prajna' 그래서 인도 말을 따서 한자로 일반 반(般)자, 같을 야(若)자, 이것은 원래 인도 음인데 한문자로 해서 반야라고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참지혜‘ ’해탈의 지혜‘라고 합니다.

 

마하(摩訶:mahã<대(大)다(多)승(勝)묘(妙)>) 이것은 ‘위대하다’ ‘거룩하다’ 는 뜻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摩訶般若) 이것은 거룩한 지혜입니다.

 

바라밀(波羅蜜)이라는 것은 이것도 역시 불교에서 많이 씁니다만 ‘도피안(到彼岸)’이라, 이를 도(到)자, 이쪽은 차안(此岸)이고 저쪽은 피안(彼岸) 아닙니까. 가사 강이나 바다가 있으면 바다 건너 저쪽이 피안입니다. 반대로 이쪽은 차안이라 하고, 다시 풀이해서 말씀하면  우리 중생이 사는 - 번뇌에 쌓인 중생이 사는 - 세계는 차안에 해당하고, 중생이 고해(苦海)를 건너서 저쪽 언덕 이것은  피안 즉 해탈(解脫)의 경계 극락세계(極樂世界) 이것이 피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라밀이라는 것은 도피안이라,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피안에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 따라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한꺼번에 풀이를  말씀드리면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골수인 경’이란 말입니다.

 

심경(心經) 이것은 경 가운데서 제일 골수(骨髓) 제일 중심(中心)이 되는 즉 말하자면 정수(精髓)가 되는 경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피안에 이르는 즉 말하자면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귀중한 경’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무슨 경(經)이든 소중하지 않는 경이 있으리요만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가장 짧은 동시에 불교의 모든 철학을 거기에 함장을 시켜 있단 말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전부 다 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에 써놓은 이것만 풀이하면 나중에는 그냥 술술 자기 스스로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의 골수이기 때문입니다. 내용 풀이를 합시다.


앞서 말씀과 같이 피안에 이르는 -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우리 중생은 지금 죽고 살고 헤매고 번뇌를 일으키고 하는 지금 차안에 있는데, 중생의 그런 고생스런 고생 바다를 건너서 영생의 저 언덕,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경이 즉 말하자면 가장 귀중한 경이란 뜻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똑 같습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보다 더 의미로  깊이 세길 때 관자재보살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나 성자나 우주만유를 모든 것을 자재롭게 조금도 막힘 없이 원만무결(圓滿無缺)하게 관찰(觀察) 할 수 있는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따지고 분별하지만 막히곤 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막히지 않고서 상대유한적이지 않고서 절대적이고 말입니다.

부처님 같이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고 다 알 수가 있고 천지 우주를 다 통달하는 - 일체를 다 아는 자재(自在)로운 지혜 또는 자재롭게 모두를 다 관찰(觀察)하는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도인(道人)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원칙은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을 구제(救濟)한다는 자비로운 보살이라는 거기에만 국한이 안 되고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서 일체 모든 것을 다 알고 생사를 초월(超越)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가지고서 일반 중생을 영원의 저 언덕으로 인도하는 그런 보살 이것이 인제 관세음보살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고난 소리를 다 들어서 말입니다. 고난 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알맞게시리 제도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인데 우리가 의미로 풀이할 때는 일대사를 자유롭게 조금도 막힘이 없이 통달무애(通達無礙)하는 그러한 지혜를 갖춘 보살이 ‘위대한 도인이’ 그 말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도인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깊은 깊을 심(深)자, ‘아주 깊은 피안에 이르는 지혜를 행할 때’ 말입니다.  반야 이것은 지혜입니다. 중생이 따지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이것은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반야하고 지식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일반 중생이 축적한 여러 가지 알고 모르는 이것은 지식에 불과 한 것이고 반야 이것은 참다운 영생(永生)의 지혜입니다.

위대한 도인이 맨 처음에 이와 같이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영생의 지혜를 닦을 때 행할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고 깊은 영생에 이르는 즉 우리 중생의 고난을 떠나서 해탈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하는 지혜를 닦을 때에 어떻게 했는고 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비출 조(照)자, 볼 견(見)자, 다섯 오(五)자, 쌓는다는 뜻의 쌓을 온(蘊)자, 다 개(皆)자, 빌 공(空)자, 오온(五蘊)이, 다섯 가지 쌓여있는 것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은 무엇인가? 오온 이것은 불교말로 하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입니다.

색(色) 이것은 빛 색(色)자, 이것은 물질(物質)을 의미합니다. 수(受)는 받을 수(受)자,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상(想) 이것은 생각할 상(想)자, 이것은 우리 상상(想像)을 이르는 말입니다. 행(行) 이것은 우리 의욕(意慾)하는 힘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 이것은 우리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 드리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이것이 오온인데, 색은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 이것은 정신(精神)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을 한 번에 말할 때 오온(五蘊)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우리 중생이랑 통 털어서 유상(有相) 무상(無相), 유정(有情) 무정(無情) 다 털어서 한꺼번에 말할 때에 오온 그럽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다 털어서 말할 때에 오온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영생에 이르는 그런 지혜를 닦을 때에 맨 먼저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 또는 ‘물질이 공이다’ 하는 공 지혜를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좋다 궂다 또는 너다 나다 하는 그런 것이 있을 때는 불교는 깊은 의미를 우리가 음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 앞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또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이지 사실은 관세음보살이나 도인들이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업장(業障) 정도로나, 중생의 업장 정도로 보니까 지금 밉다 곱다 귀엽다 하는 것이지 정다웁게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못 느끼면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다 비었다고 봐야 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사 이렇게 분자(分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 우주는 다 분자로만 보입니다.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 우주는 그 때는 원자로만 보입니다.

부처님 같은 불안(佛眼)이라,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그 때는 천지 우주를 광명(光明)으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근원은 어떠한 물질이나 무엇이나 다 순수한 광명 에너지가 꽉차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현미경으로 알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전자(電子)도 못 보고 분자(分子)도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안목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이라, 탐욕(貪慾)이나 또는 성내는 그런 불룩거리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독심(毒心)에 가려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못 보기 때문에 꼭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 네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벽을 세워버립니다. 그런 경계에서 보는 것이니까 자꾸만 시비(是非)가 생기고 여러 가지 견해가 생긴단 말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를 아까 말씀마따나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그런 반야지혜를 우리가 얻을 라고 생각할 때는 맨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 아무리 내가 귀엽지만은 결국은 나를 비롯해서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봐야 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人生苦)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일체의 고액을 다 면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다 비어 있다고 못 보는 한에는 절대로 인생고해를 못 면합니다. 권력이나 또는 지위나 어떤 그야말로 참 특수한 물질이나 이런 걸로 해서는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순간순간 조금 마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못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다운 영생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오온이, 오온 이것은 색수상행식 즉 정신과 물질을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봄으로서 비로소 일체고액을 제도할 수 있고 우리가 떠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나니

 

사리자(舍利子)야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 제일 사리자’ 지혜가 제일 수승한 제자 아닙니까. 인도 히말라야 산에서는 사리조(舍利鳥)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는 굉장히 눈이 아름답고 영롱한 새인데 사리자 어머니가 눈이 영롱하고 미인인데 말입니다. 사리 눈 같이 어여쁜 어머니한테서 나왔다고 해서  그 아들을 사리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가 제일 수승한 분인데 어머니가 사리 눈 같이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사리자라고 부르는데  ‘사리자’야! 그러니까 반야심경 이것은 부처님께서, 어떤 경전이나  누구한테 부처님께서 말씀 했는가 그런 연기유서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직접으로, 그냥 일반 사람한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한테는 그냥 저급한 법문도 말할 수가 있지만 이러한 고도한 불교 철학이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법문은 역시 무어라 해도 지혜 제일, 지혜가 제일 수승한 사리불(舍利弗)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니까 사리불한테 하신 법문입니다.

사리자야 잘 들어라!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색 이것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공(空) 이것은 마음[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공이나 마음은 불교에서는 같이 쓰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내내야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까 공이나 마찬가지 이지요.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정신 따로 몸 따로 합니다. 우리 범부(凡夫)는 몸 따로 마음 따로 합니다. 허나 사실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과 허공(虛空)과 다름이 없고, 또한 동시에 그 반대로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 마음이 공이 물질과 다름이 없으며, 따라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물질이 곧 바로, 이 시(是)자, - 빛 색(色)자, 곧 즉(卽)자, 이 시(是)자, 빌 공(空)자, - 이 시(是)자 이것은 ‘바로’라고 합니다. 바로 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곧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이원적(二元的)으로 구분(區分)한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바로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물질 따로 마음 따로 합니다. 보통은 다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인 것이고 물질 이것은 무생물이고, 마음은 하나의 생명체고, 그와 같이 구분 합니다. 허나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미세한 물질도 역시 그 본질은 마음입니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분석하고 분석해서 다 들어가면 저 물질 끝트머리는 내내야 소립자(素粒子) 아닙니까. 소립자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energy의 하나의 형태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질량(質量)이 있는 물질은 없어지고 저 끝에 가서는 하나의 에너지 형태에 불과 하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작용 때문에 결국은 소립자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물리학은 물질이 본래 공인 것을 거의 증명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보다 앞서서 어떠한 물질이나 아까 말씀마따나 원자나 또는 분자나 모두가 다 근본 요소는 결국은 다 마음이란 것입니다.

이런데서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결국 불교 철학이 성립 된단 말입니다.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인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순수 에너지 위에서 마음 작용 따라서 물질로 보인단 말입니다. 물질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별도로 있다는 잘 못된 관념을 부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념을 못 부수면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성불한다.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마음뿐인 것인데 마음 위에서 마음의 힘이 적당히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이고 말입니다. 

또는 마음을 가진 중생들이 마음 쓰는 그런 힘 따라서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하시기가 곤란스럽지만 사실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를 듭니다만 가사 화분이 두 개가 있어서 양쪽에다 똑 같은 조건으로 화분을 가꿉니다. 가꿀 때에 이쪽 화분한테는 좀 소홀하게 생각하고 저쪽 화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더 준단 말입니다. 하면은 관심을 더 둔 쪽의 화분이 훨썩 더 성장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역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개인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한테 탁태(잉태)하기 전에 우리 존재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의지해서 나오기 전에 우리 존재가 무엇입니까? 형체가 없단 말입니다. 식(識)이라는 마음이 결국은 부동(浮動)하다가 영혼(靈魂)이 부동하다가 부모님 연(緣) 따라서 엄마의 태에 들어가서 사람으로 커나간 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몸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원천은 하나의 식,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 말입니다.

식이 사람이 죽어지면, 몸은 화장하면 재가 되고 파묻으면 흙 되고 하겠지요. 없어지지만은 우리 마음 쓰는 식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식(識)이 부동 하다가 그 식의 파장(波長)과 맞는 부모를 만나면 엄마의 태에 수태한단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물질이 아니지요. 탁태한 뒤에는 엄마의 배안에서 엄마 자양분(滋養分)을 받아서 성장하므로 해서 비로소 인간 형태로 나온단 말입니다.

태초(太初)에 인간도 역시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기세경(起世經)이라, 일어날 기(起)자, 인간 세(世)자, 태초에 인간이 나오는 것을 굉장히 상세히 풀이 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려우니까 지금 사람들은 간과(看過;대충 보기만 하고 버려둠)해서 잘 안 봅니다만 아무튼 우리가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물질의 저 본질, 물질의 끄트머리가 마음인 줄을 못 볼 따름입니다.

항시 예를 듭니다만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   똑 같이 마시는 하나의 물인데도 우리 인간이 볼 때는 그것이 물인 것이고, 귀신이 볼 때는 물을 물로 안 보는 것입니다. 귀신은 물을 불로 보는 것이고, 또 천상사람도 있는 것인데 천상인간은 물을 유리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물을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감로수(甘露水)로 보는 것입니다.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같은 물이지만 우리 식의 정도 우리 식이 얼마만치 정화(淨化)가 됐는가에 따라서 달리 본단 말입니다.

사람이 보면 사람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물로 보는 것이고, 거기에 사는 고기는 자기 집으로 보는 것이고,  헤엄치는 고기들이사 집으로 보겠지요. 귀신은 불로 보고, 천상인간은 유리로 보고, 부처님은 청정미묘한 하나의 광명, 광명이 충만한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물이지만 시각 따라서 달리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는 것만이 절대로 옳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假象)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법문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신 그대로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납득하기 곤란스러우나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행이도 현대 물리학은 방금 말씀마따나 인제 물질의 근원에 가서 텅 비었다는 것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다만 그 비어있는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것만 지금 현대 물리학은 모릅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었지만,

물질이 곧 바로 마음이요. 또한 마음의 작용 따라서 그때는 물질이 되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마음이 곧 바로 물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둘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밖에 어떤 물질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안 되겠지만은, <정리자 주석 : 마음[공]이 마음[공]으로만 존재하고 어떤 물질[색]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성립이 안 되겠지만,>

 우리 중생이 보면 마음이 물질화가 될망정 결국은 내내야 둘이 아닙니다. <정리자 주석 : 우리 중생이 보면 마음[공]이 물질[색]로 보일망정 결국은 내나야 둘이 아니다. 비공비색(非空非色)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들어 내고자하심>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우리 감수(感受)하는 감각(感覺)이나 상상(想像)하는 우리 감정(感情)이나 또는 우리가 의욕(意慾)하는 행(行)이나 또 우리가 분별(分別)하는 식(識)이나 이런 것도 역시 또한 이와 같도다. 그와 똑 같이 역시 물질이 마음이요 마음이 물질이란 말입니다.

 

사리자(舍利子)야! 잘 들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와 같은 그러니까  같은 이 시(是)자 이지만 아까는 ‘바로’라고 풀이했던 것을 ‘이것이’라고 지정명사로 풀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제법(諸法) 이것은 일체 우주의 만법을 얘기합니다.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 만법을 제법 그럽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만법(萬法)이 다 비어 있는 상(相)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 말입니다.


제법공상(諸法空相)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을 천만번 외워도 앞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나 이런 중요한 대목을 놓치면 별로 의의가 없습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온이 -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봐야 쓴다.

이와 같은 중요한 대문과 또한 동시에 모든 법이 즉 앞에서 말한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존(實存)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우리 중생은  실상은 못보고 실존을 못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 비어있는 그 실상 - 실상에서 본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생도 없고 멸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때는 영생하니까, 가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상대적인 것만  본다고 할 때는 -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모다 분별이 있지만,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봐서 물질인데, 물질도 내내야 결국은 마음이니까,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그런 것들이 다 비어버려서 - 다 비어버린 실다운 모습 - 참다운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생(永生)과 똑 같습니다. 영생하는 가운데서 무슨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겠습니까.

사람 몸뚱아리 몇 천번 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생명은 죽지 않고 낳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몸뚱아리만 낳고 죽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이와 같이 낳음도 없고 - 원래 생겨남이 없으니 멸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원을 못 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기 때문에 인제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나오면 나온다 하고 모양이 없어지면 그 때는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생명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서 공부가 툭 틔어서 본질을 보면 그때는 격세즉망(隔世卽忘)이라, 그때는 한번 생을 바꿔도 바뀜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자기 원하는데 가서 자기 멋대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려면 올라가는 것이고 인간으로 올려면 인간세상에 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눈을 비롯해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청정해야지요. 청정하려면 오랜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야 합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잠기지 안하면 우리한테 있는 찌꺼기가 안 녹습니다.

찌꺼기가 녹아버려야 앞서 말씀한 탐심 진심도 안 일어나고 동시에 나(我)라는 생각도 없고 동시에 우리 몸뚱아리나 물질을 떠나서 몸뚱아리나 물질을 구성한 근본 요소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텅 비어있는 모든 법이 공했다는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또한 동시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입니다. 아니 불(不)자, 때 구(垢)자, 아니 불(不)자, 맑을 정(淨)자, 더러움도 없고 맑음도 없단 말입니다. 상대를 떠나버려서 오직 영원히 청정한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불구부정이란 말입니다.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아니 불(不)자, 더할 증(增)자, 아니 불(不)자, 감할 감(減)자, 말입니다. 더함도 없고 또 감하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합니다만 잘못 생각하면 석가모니한테는 불성이 많이 있고, 우리한테는 불성이 적게 있고,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석가모니한테나 우리한테나 누구한테나 불성은 똑 같이 있습니다.

다만 발견하는 정도가 얼마만치 더 많이 발견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천지우주에 충만한 불성을 다 발견한 분이고, 우리 중생은 아직 다 발견을 못했단 말입니다. 그것뿐인 것이지 불성 자체에서는 석가모니한테나 독사한테나 강도한테나 있는 불성은 똑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은 사람 하나 죽는다고 해서 불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든다고 해서 불성이 안 줄어듭니다. 천지 우주가 다 파괴된다고 해도 불성은 안 줄어듭니다.

원자폭탄 핵무기가 우주를 진멸시킨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품 같은 물질만 변동하는 것이지 순수 에너지인 생명자체 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더함도 없고 감함도 없단 말입니다.

 

시고(是故)로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이런고로 모든 법이 다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는 그런 안목에서는 무색(無色)이라,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이 지금 들어보시니까 상당히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법문 아닙니까.

이렇게 좋으니까 매일 매일 외이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중단에서 많이 하는 것인데 반야심경 외이면 저급한 신들은 못 알아먹으나 고급 신들은 알아먹고서 굉장히 환희심(歡喜心)을 내고서 신들이 상(相)을 터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모두가 다 공(空)이라 했으니까 상을 안 털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신들이 상을 털어버리면 그와 동시에 상을 턴 - 그 상이 없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에 - 자비심으로 해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서 중생(衆生)을 가호(加護)한단 말입니다.

또는 어떤 우리 환경이 약간 기분이 사나울 때에 암울할 때는 반드시 우리 분위기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분위기를 구성한 순수한 에너지가 그만만치 조건이 안 맞아서 오염되어 있어서 이런때에 반야심경을 외우면 효험(効驗)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생명을 구성한 자기 가슴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불교 법문은 모두가 다 우선 나를 정화하고 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악은 이것은 우선 자기를 훼손(毁損)하고 남을 훼손한단 말입니다. 선은 그 반대로 자기를 우선 정화시키고 남을 정화시킵니다.


반야심경이 길고 시간이 제한되어 놔서 제가허두만 썼는데 여러분들이 가셔서 잘 읽고, 반야심경 번역본이나 주석본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녹음 앞면 끝>


불교는 법문 심도를 3단계로 구분합니다. 맨 처음에는 있을 유(有)자, 가르칠 교(敎)자, 유교(有敎)라, 유교입니다.

그런께 인제 반야심경 같은 이런 법문은 상당히 마음이 세련되어서 마음이 정화가 되어야 아는 것이지 무식한 사람들은 잘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인제 무식 대중한테는 이런 법문을 않고서 그냥 유교라, 있을 유(有)자 유교는 무엇인고 하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따로 있고 이와 같이 자타 시비를 구분한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 법문은 모두가 다 있다하는 일반 중생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지금도 역시 이런 법문이 어려운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가신지가 2500년 이상, 그 당시 사회는 보다 무식했겠지요. 그런 때는 이런 고도한 법문을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냥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 차원에서 니가 있고 내가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차원에서 인과(因果) 정도는 믿고서 악을 행하면 그때는 죄를 받는 것이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 것이고 그와 같이 선악인과를 따져서 하는 그런 법문 이것이 유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 세간에서 하는 유위교(有爲敎), 일반 도덕이라는 것은 유교(有敎)에 해당합니다. 기독교나 유교(儒敎)는 보통은 유교(有敎) 범주에 들어갑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물질도 있고 보석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것이 유교이고, 허나 유교 이것은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가상(假相)만을 볼 수 있는 중생차원에서 마친 교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다운 것은 못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참다운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는 그때는 인제 지금까지 말씀한 유교는 이것은 참이 아니다. 일체 정신과 물질은 비어 있다. 그와 같은 법문 이것이 반야심경 같은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가르칠 교(敎)자, 공교란 말입니다.

허나 텅 비어 있다는 공교 밖에 모르면 그때는 불교를 바로 또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텅 비어 있는 내용은 이것은 허무가 아니단 말입니다. 만약 불교가 텅 비어 있다는 그것밖에 몰라버리면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더 깊이 못 들어가면 반야심경 정도에서 딱 그쳐버리면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단 말입니다.

헌데 텅 비어 있는 그것이 아주 비어 있는 허무가 아니다 말입니다. 텅 비어 있는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또는 기능(技能)이나 모두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다 우리가 열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추리면 4가지 범주로 말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일체 부처님의 지혜, 공지혜(空智慧), 공(空)에 들어 있는 생명이 그때는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하는 그런 의미를 상(常)이라 합니다. 즉 말하자면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영생하는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 상(常)인 것이고,

또는 락(樂)이라, 안락 할 락(樂)자, 그 불성 가운데는 부처님 지혜 가운데는 일체 모든 행복(幸福)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 때문에 상대유한적인 물질 가운데 행복이 있다고 어거지를 씁니다만 사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정신의 혼미(昏迷)뿐입니다.

역시 참다운 행복은 불성 가운데 있는 -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 영원성 밖에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불변하는 불멸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불변의 행복 그것이 안락 락(樂)자, 낙(樂)입니다.

또는 나 아(我)자, 아(我)라, 아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은 작은 상대적인 아(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我)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부가사의(不可思議)한 재주나 지혜나 기능을 부리는 아(我)란 말입니다. 불교 말로하면 신통(神通)도 하고 기적도 부리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신통 기적을 다 부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재주를 다 부리는 것이 아란 말입니다. 나 아(我)자,

또는 맑을 정(淨)자, 정(淨)이라.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흐림이나 또는 어떤 마음의 어둠도 없고서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는, 본래 청정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상(常)과 또는 행복이 다 갖추고 있는 락(樂)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아(我)와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청정한 정(淨)과 이와 같은 이것이 불성 가운데 텅 빈 마음 가운데 꽉차있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다만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꽉차있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영생하고 또는 행복을 다 갖추고 있고 또 일체 것을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말입니다. 청정하고 이렇게 갖추고 있는 이것이 순수한 우리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으면 원래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그때는 이러한 것에 접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자고로 위대한 도인들은 이러한 사덕(四德)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들 증득(證得)한 분들이고, 중생은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권력, 지위, 어떤 이성, 이것저것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원래 갖추고 있는 역량이 방금 말씀한 상락아정이기 때문에 영생과 영생의 행복과 또는 일체 신통과 청정한 것이 원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못가면 우리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지구가 다 자기 것이 되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는 부처인 것입니다. 원래 모두를 갖춘 원만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원만한 부처가 못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스러울 때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지요.

따라서 성자만이,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요한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나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진리만이 우리를 행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행복 또는 영생의 지혜 이런 것을 갖춘 것은 결국 우리 본성(本性) 불성뿐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성에 가고자하는 하나의 교언(敎言)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항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허망한 것이다. 가상(假象)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보는 견해가 가상임을 바로 인식을 못하면 그때는 반성(反省) 못하는 것이고 참회(懺悔)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이 허망 무상한 불교말로해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이걸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를 쫓고 허망한 것을 쫓아서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만 우리 눈으로 보는 것도 허망함을 느껴가지고서, 허망한 것이 아닌 - 아닌 것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영생하는 상(常) 또는 안락(安樂) 또는 신통자재하는 아(我) 또는 청정무비한 정(淨), 상락아정만 이것이 실존이고 영생의 지혜고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본성이 바로 불성이고 지금 못 낫다 하더라도 우리 본성은 석가모니와 똑 같은 불성입니다. 그 가운데는 앞서 말한 상락아정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상락아정의 영생의 행복 지혜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법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빛 색(色)자, 색(色)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이것은  정신에 해당 합니다 즉 우리의 감각(感覺), 상상(想像), 또 의욕(意慾), 또는 분별(分別) 시비(是非)하는 식(識)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오온법(五蘊法) 그러면 우주만유의 법을 총망라해서 오온법 그럽니다. 오온이라. 방금 말씀마따나 인제 정신과 물질을 한꺼번에 포함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모두가 다 오온법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데 우리 눈앞에 분명히 있게 보이는 -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분명히 있게 보이는 - 그 오온법이 다 비었다고 본단 말입니다.

어제도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법문 차원이라는 것이 3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그 맨 처음에는 낮은 차원은 중생 정도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저급한 차원에 맞추어서 하는 법문 이것이 유교라, 있을 유(有)자, 유교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보면 그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고 또는 허깨비 같고 말입니다. 수중월(水中月)이라, 물속에 비친 달 같고 그런 것이지 우리가 보듯이 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걸 느껴야 씁니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 몽(夢)자, 허깨비 환(幻)자, 거품 포(泡)자, 그림자 영(影)자, 몽환포영 같이 우리 현실을 못 보면 그때는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는 인생고를 제도하는 인생고를 떠나는 가르침인데 인생고를 떠나려고 하면 방금 말씀과 같이 일체만유가 우리가 보는 실존적인 것이 사실은 실존이 아니라 이것이 몽환포영이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물속에 비친 달이요 그와 같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지금 같은 과학도 무엇도 없고 문맹만 충만해 있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이상 되는 인도사회에서  부처님께서 ‘모두가 비었다’하시면 그런 말을 알 수가 있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다 알 수 없으니까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 선도 있다 악도 있다 인제 네가 있다 내가 있다 그와 같이 중생차원에서 말씀 했단 말입니다. 허나 중생들의 근기가 좀 익어져서 좀 수련을 거친 다음에는 비었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와 같이 비었다 하는 그런 정도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으면 그것이 허무(虛無)가 되어서 니힐리즘nihilism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요.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실상(實相)이 그때는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맨 처음에 있을 유(有)자 유교, 그다음에는 빌 공(空)자 공교, 그다음에는 부처님께서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실상 그대로 하신 말씀이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비었다 하는 그런 가르침과 중도를 아울러서 합한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말한 바와 같이 공이 즉 색이요 색이 즉 공이란 말입니다. 색 이것은 물질을 말한 것이요 공 이것은 정신을 말한단 말입니다. 즉 물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물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중생은 마음은 못보고 그냥 형체만 본단 말입니다. 도인들은 형체를 봄과 동시에 형체의 근원인, 형체를 이룩한 순수한 그런 힘 순수한 에너지를 본단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인데, 따라서 성인들은  근원적인 순수한 마음을 보고서 마음에 비춰서 물질을 다루기 때문에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겉만 보고서 피상적으로 즉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맹이는 모르고서 겉만 봅니다. 겉만 보니까 사물을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코가 있고 눈이 있고, 형체만 인간은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알맹이는 우리 마음이 아닙니까. 내내야 마음이 나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몸뚱아리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다 해서 집착을 합니다.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거기가 있습니다. 성자는 근원을 보고서 마음을 본체로 해가지고서 마음에 입각(立脚)해 버리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냥 마음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겉만 보고 따지니까 인제 사람 사람끼리 분열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그 인생고(人生苦), 생(生)이요, 사(死)요, 또 헤어지는 고통,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이런 고통들을 이길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쓸 것인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즉 오온 물질과 정신이 우리 중생이 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림자 같이 허망하다. 이와 같이 비었다고 비추어 봄으로써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일체 고액을 없앤단 말입니다.


어제는 이 대목까지 했습니다. 오늘 한 시간 동안에 이걸 다하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즉 공에서 본다하면,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수(受)라, 이것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상(想) 이것은 헤아리는 상상(想像)인 것이고, 행(行) 이것은 천류(遷流)라고도 말하고 의욕적인 의식을 또 말 합니다.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 이것은 분별(分別)하는 우리 식을 말하고 우리 마음 작용을 수상행식 그렇게 말합니다.

성자가 바로 보는 그런 공 가운데는 아까 말씀마따나 성인들은 공을 보고 우리 범부들은 공을 못 봅니다. 공 그것이 사실은 실체의 근원입니다. 그런 공 가운데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그런 색(色) 즉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같은 우리가 보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학승들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저위에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가끔 했습니다.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전자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이렇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밖이 다 누렇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쓰고 보면 푸르게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業)으로 중생의 업을 쓰고 보니까 너요 나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중생의 업을 떠나 버리면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실상(實相) 일체만유의 본 모습, 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도인이 본다고 하면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도인이 보는 공 가운데는 색 즉 물질도 없고 또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하는 아프다 또는 좋다하는 그런 촉감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상상하는 것도 인제 그것도 중생의 망상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의욕적인 것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것도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그런 마음 작용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 따라서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고 있는 우리 후각(嗅覺), 혀로 우리가 맛을 보는 미각(味覺) 말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촉각(觸覺) 말입니다.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우리 식활동(識活動) 이런 것도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깨비 보고서 있다고 그럽니다. 허깨비 보고서, 또한 동시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란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 주위환경 여러 가지 물질도 없고, 또한 들리는 소리도 없고, 후각(嗅覺)으로 느끼는 향기도 없고, 미각(味覺)으로 오는 맛도 없고, 또는 촉각(觸角) 몸으로 느끼는 촉감(觸感)도 없고,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分別)하는 일체 좋다 궂다하는 어떠한 법(法)도 없단 말입니다.

법 이것은 우리 법률이란 법이 아니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모든 의식작용(意識作用) 모든 시비 분별 이것이 여기 있는 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본다면 -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이지만 - 바로 본다면 사실은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없기 때문에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라, 우리 눈으로 보는 색(色)이라는 것은 본래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업(業)으로 해서 만들어서 그와 같이 보인  것이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이,

내지(乃至)는 ‘...에서 ...까지’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앞뒤 사이 중간을 생략하고 이어갈 때에 쓰입니다.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무이식계(無耳識界), 무비식계(無鼻識界), 무설식계(無舌識界), 무신식계(無身識界),

 

무의식계(無意識界)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그런 경계도 없단 말입니다. 또

 

무무명(無無明)이라, 무명도 없다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 것이 무명 아닙니까. 무지(無知)나 무명(無明)이나 같은 뜻입니다. 바로 보면 없으니까 내내야 무지나 같지요.

공(空)에서 본다면 그 때는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무지라는 것은 내내야 우리가 이것저것을 판단을 잘 못하는 것이고 또는 실상을 몰라서 무지라 하는 것인데 실상을 다 봐버린 도인(道人)들의 안목에서 무지가 텅 비어서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佛性)밖에 없는 그 자리를 봐버린 사람들이 어디가 무슨 무명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본 근원을 못 본데에 가서 무지 즉 무명이 있는 것이지, 텅 비어서 일체 것을 다 떠나버린 훤히 비춰보는 마음자리에서는 무지나 무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중생 경계에서 무지야 지혜(智慧)야 하는 것이지 지혜고 무지고 다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참 본 근본을 딱 읽어버린 그런 경지에서 무슨 무지가 있겠습니까. 무명도 없고,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라,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무명을 다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명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상대법에서 무명이 있다고 하니까 무명을 떼어내려고 애쓰는 것이지 아, 무명이 원래 없는데 어떻게 무명을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명을 다해버리는 무명을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주;12인연법을 별도 설법하셨기에 여기서는 생략됨>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라, 또한 동시에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해 버리는 즉 말하자면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그와 같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모양의 세계에 가서 죽음과 생이 있는 것이지 모양 떠나버리면 순수한 에너지의 세계 순수한 생명의 세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세계에서 무슨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늙고 죽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 따라서 늙음과 죽음을 다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이 인생고(人生苦)에서 제일 무서운 고생 아닙니까.

권력이 좋다 무엇이 좋다 하지만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란 말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우리 목숨이 죽는다 하는 죽엄의 공포 같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써 죽엄을 떠나버린 생사를 떠나버린데 가서 무슨 죽음의 공포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때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다 없앤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이것은 사제법문(四諦法門)인데 부처님 일대 가르침을 가장 체계 있게 말씀하신 가르침 이것이 이제 고집멸도입니다. 사제법문 아닙니까.

아시는 분들은 다 외워가지고 있는 법문 아닙니까. 사제법문 말입니다. 고집멸도라, 고 이것은 인생고입니다. 즉 생로병사,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것은 생로병사 아닙니까.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말입니다. 태어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런 등등의 것이 인생고인데  우리가 바로 보면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안 늙는 사람 누가 있고 또 평생 한 번도 안 아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고통뿐이다 말입니다.

고통뿐인데 사람들은 고통이 아니라 안락이다. 안락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니까 그때는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그냥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짜증을 내곤 한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삶 이것은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인생은 고다. 인생은 고다. 이것이 고집멸도의 이제 맨 처음입니다. 허나 인생이 고면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 아픈 근원이 있겠지요.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이 집(集)입니다.

집(集)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탐(貪)·진(嗔)·치(痴) 삼독심(三毒心)과 우리의 행위(行爲;業)란 말입니다. 우리가 탐심(貪心)부리고 우리가 성내고 우리가 사물을 바로 못보고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행동 그것이 여기 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어리석음이 없고, 탐욕심도 없고, 분노가 없다고, 그러면 고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으로 우리가 어찌 태어났는가? 우리가 정말로 번뇌가 없다고 그러면 사람이 태어날 수가 그때는 없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영생(永生)해 버린다 말입니다. 또는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천상 가서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허나 사람정도의 결국은 탐욕심과 사람정도의 인제 분노심과 사람정도의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사람정도의 그 어리석음, 탐욕심 또는 분노 이런 것이 아직 있기 때문에 이런 업에 끌려서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모한테 우리 영혼(靈魂)이 -업식(業識)이- 즉 말하자면 업에 가린 그런 우리 영혼이 부동(浮動)하다가 거기에 알맞은 부모를 만나가지고 딱 거기에 인제 엄마 태안에 들어가서 그때는 잉태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업이 없으면 극락으로 가면 영생하는 것이고  또는 천상으로 가서 안락스러울 것인데, 업이 무거워서 탐심도 많고 또 성내는 마음,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이런 업이 무겁기 때문에 인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결국은 인제  인간 정도에 맞는 그 정도에 맞는 부모 만나가지고 그때는 딱 거기에 붙어 가지고 인제 인간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여실(如實)하게 그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현대 생리학 보다 훨썩 더 세밀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인생고라고 하지만 고는 그냥 우연한 고가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인간의 탐심, 진심,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 아닙니까. 이것과 여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 이것이 즉 말하자면 집(集), 고를 모으는 원인이단 말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과(因果)가 분명합니다. 고(苦)라는 과(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原因)이 있단 말입니다. 원인을 집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나 인생이 고와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바로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안 태어난 것만 같지 못하고 말입니다.

허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인생이 고가 있고, 고를 모으는 여러 가지 삼독심 같은 번뇌나 우리 행위 업이 있지만 또한 동시에 영생하는 - 고를 떠나서 영생하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안락스런 행복 이것이 멸(滅)입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를 다 멸해 버린 형태란 말입니다.

탐욕이나 진심, 아까 말한 분노하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고서 안락스러운 그런 경계가 이것이 멸입니다. 멸이 없다고 하면 불교는 의의(意義)가 없지요. 따라서 멸 이것은 불교의 이상향(理想鄕)입니다.

불교의 이상향 이것은 멸입니다. 허나 다만 멸이 있다. 거기에 그쳐버리면 불교는 그때는 불교가 못된단 말입니다. 멸(滅)에 이르는 영생의 극락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 수단 이것이 도(道)란 말입니다. 멸에 이르는 길 이것이 도입니다.


도(道)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들어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학도(三學道)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마음을 모아서 통일 시키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智慧)를 닦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계(戒)·정(定)·혜(慧)라, 계율 닦고 또는 마음을 통일 시키고 또는 지혜를 닦고 말입니다. 삼학도! 더 부연시키면 8정도 이것이 멸에 이르는 행복스런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삼학도 또는 팔정도 말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우리 인생고와 인생고의 원인과 또는 인생고를 떠나버린 영생 안락의 그런 세계와 거기에 이르는 그런 방법을 말씀한 것 이것이 인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넉 사(四)자, 진실한 체(諦)자, 그래서 인제 ‘사제’라고도 하고 ‘사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대승, 소승, 밀교, 현교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내내야 결국은 사제법문의 뜻을 이렇게 저렇게 풀이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제법문을 잘 외워두면 무슨 법문을 보나 아, 이것은 어디에 해당하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인생고(苦)와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과 영생의 행복인 멸(滅)과 또는 영생의 행복인 그런 해탈의 길, 인생고를 멸해버리는 길 이것이 도(道)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느껴야 할 것은 멸을 분명히 보고, 인생은 고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러나 인생의 참다운 목적은 멸이다. 영생의 행복이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멸에 이르기 위한 그런 흠모추구(欽慕追求)하는 멸을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 밑에서 도를 행해야 씁니다.

계율 지키고, 도덕적인 행을 안 취하면 멸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 많이 먹고 싸우기 좋아하고 음탕하고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그런 문란한 행동을 취하면 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역시 철저한 도덕적 행동 밑에서 우리가 생활을 해야만 마음이 맑아 온단 말입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그때는 정신이 통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딱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부처인지라 말입니다. 우리마음의 본 뿌리가 멸(滅)을 증(證)하는, 멸과 상응된 영생 극락이 그 자리인지라, 우리 마음을 딱 모아가지고서 자꾸만 마음 뿌리로 가야 씁니다. 마음저변으로 가야 씁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의 겉만 가지고 삽니다. 마음 뿌리는 부처고, 마음의 겉에는 우리 같이 이와 같이  아까 말한 삼독심(三毒心) 부리는 마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 부리는 탐심부리고 진심부리는 그 마음을 자꾸만 억제하고 누르고, 억제하고 누르는 것이 행습이 되면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다 말입니다. 즉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로지 부처님을 흠모(欽慕)하는 한마음, 화두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을 외는... 자꾸만 우리 마음의 저변으로 가야 쓴단 말입니다.

그 저변은 내내야 부처란 말입니다. 불성(佛性)을 인격화(人格化) 시키면 부처님인 것이고 말입니다. 성품으로 보면 불성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녹음 일부 손실.....


분별(分別)시비(是非)해서 체계를 세운 것은 일반 지식인 것이고, 참다운 영원 해탈의 길, 해탈의 슬기는 그때는 반야인데,  지혜와 지식을 구분해서 일반 중생이 알아서 분별해서 아는 것은 지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참다운 해탈의 슬기 이것은 지혜인데 불교 말로하면 반야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내내야 해탈의 지혜란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아까말씀한 바와 같이 지금 쭉 여러분들이 제법공(諸法空)이라는 것을  전제를 두어야 합니다.

제법공 밑에서는 이와 같은 것이 모다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그때는 안 됩니다. 제법공(諸法空) 안에서는 그야말로참 이런 것이 모두 없고 또한 동시에

 

무지(無智)라, 지식(知識)도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따지고 분별하는 일반적인 지식도 없단 말입니다.

또 역시

 

역무득(亦無得)이라, 얻음도 없단 말입니다. 얻음 이것은 참다운 지혜, 반야의 영생의 지혜의 얻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불교말로하면 유위법(有爲法)이라, 또는 유루법(有漏法)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가사 권력이 좋아지고 돈이 많아지고 말입니다. 또 몸이 건강해지고 한다는 그런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비록 생활에는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 닦는 그 자리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법공한 자리에는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상의 지혜로 본다고 할 때는 아까말마따나 고집멸도(苦集滅道)란 그것도 사실은 번뇌가 있다고 했을 때에 고가 있고 무엇이 있는 것이지 번뇌가 다 없어져 가지고 텅 비어가지고 인제 아,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한 세계에 무슨 고가 있고 또는 고의 원인이 있고 또 갔다가 무슨 도(道)가 있고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따라서 일반적인 그런 우리가 안다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상대유한적인 그런 어떤 얻음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와 같이 소득의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예 고(故)자, 연고 고(故)자, 까닭 고(故)자, 이와 같이 상대유한의 얻음이 없단 말입니다.

오직 순수한 지혜만 더 빛나고 할 뿐이지,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菩提薩埵), 보살 보(菩)자, 이끌 제(提)자, 보살 살(薩)자, 강할 타(埵)자, 이것은 보살 이라는 뜻입니다. 인도말로하면 보디살타(bodhi-sattva)인데 한문자 음역으로 해서 ‘보리살타’라 하는 것입니다. 인도 말을 제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보살은 이와 같이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제법공의 지혜를 여러분들이 염두에 딱 두어야 씁니다.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법이 텅 비었다고 하는 그 자리를 본다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안계 눈으로 보는 것도 없는 것이고, 고집멸도도 없고 일반적인 지식도 없고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없기 때문에 따라서 다 몰아서 우리가 그런 얻은 것은 그런 상대유한적인 유루법의 - 유루법 이것은 우리 중생이 느끼는 세계의 모든 법이 유루법입니다. 또는 유위법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소득(所得)이 이런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그렇게 됩니다.

어제 배운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도피안의 지혜, 피안이라는 것은 해탈의 저 언덕이란 말입니다. 차안은 우리가 사는 이런 생사하는 죽고 살고 또는 죄도 짓고 하는 세계가 이 차(此)자, 언던 안(岸)자, 이쪽이고, 피안(彼岸)은 저 피(彼)자, 저쪽 언덕이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떠나서 저쪽 즉 말하자면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가 피안이란 말입니다.

헌데 이 풀이는 피안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영생해탈(永生解脫)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지혜(智慧), 성불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般若)는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바라밀다(波羅蜜多)는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불을 성취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이런 것들이 다 허무하기 때문에 보살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보살은 다만 이런 상대유한적인 지식은 다 떠나버려서 그런 것은 관심도 없이 다만 이와 같이 성불하는 ‘피안에 이르는 지혜에 의지하는 고로’

 

심무괘애(心無罣碍)라, 거리낄 괘(罣)자, 거리낄 애(碍)자, 이런 한자는 어렵지만 불교를 공부할 때 자주 나오니까 외워두면 좋습니다. 거리낄 괘(罣)자, 마음에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다. 무괘애라는 것은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좋다 궂다 또는 마음이 껄끄럽고 막힌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괘애가 없고,

 

무괘애고(無罣碍故) - 이런 마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무유공포(無有恐怖) -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툭 틔어서 천지우주와 나하고 하나가 되었는데 어디 가서 무서움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친다. 상대가 있고 또 귀신도 있어가지고서 나를 해꼬지 한다. 이와 같이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이렇게 보는데서 우리 마음이 두려운 것이지 생사(生死)를 떠나버린 사람, 내 몸뚱아리는 원래 허망한 하나의 거품으로 보거니 이걸 누가 칼로 찌른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에서 천지우주의 유위법은 다 비었다는 것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거리낌이 없고, 마음이 거리낌이 있어야 공포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너다 나다 좋다 궂다 또는 산다 안 산다. 아프다 안 아프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괘애 때문에 공포가 있는 것이지, 괘애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공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포가 없는지라,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하고, 멀 원(遠)자, 떠날 리(離)자, 자빠질 전(顚)자, 넘어질 도(倒), 꿈 몽(夢), 생각 상(想) 말입니다.

전도몽상 거꾸로 된 꿈같은 생각을 멀리 떼어버린단 말입니다. 멀리 여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면서 거꾸로 보는지를 모른단 말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내가 지금 거꾸로 보는 구나. 이것 정도는 느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고서,

이와 같이 이런 마음의 공포가 없어지면 그때는 마음이 툭 틔어서 마음이 열려서 우리가 평소에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그야말로 참 멀리 여읜다는 말입니다. 멀리 떠나버리고서,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꿈속에서 보는 것이 다 사실 같습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먹고 하는 것이 참말로 생각 되지만 꿈 깨고 나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요. 그와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결국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거꾸로 보는 생각을 멀리 여의고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멀리 여의고서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구경 이것은 궁구할 구(究)자, 마칠 경(竟)자, 열반을 우리가 성취한다 말입니다.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열반은 무엇인가? 열반은 이것은 이상향(理想鄕), 극락(極樂), 진리(眞理), 도(道), 부처경계,  불교의 이상적인 경계, 이것이 열반입니다.

열(涅)자 이것은 해감(앙금흙) 날(涅), 극락갈 녈(涅), 보통은 ‘날’자로 쓰나 불교적일 때는 극락갈 열(涅)로 씁니다.

반(槃)자 이것은 즐길 반(槃)자, 또는 소반 반(槃)자,

열반이것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진리(眞理)나 또는 도(道)나 또는 법성(法性)이나 부처나 이와 같이 통용하는 말인 것입니다. 하여튼 불교 이상향(理想鄕) 말입니다.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전도몽상(顚倒夢想) 때문에 꿈같은 거꾸로 보는 생각 때문에 결국은 열반에 못 가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모두를 텅 비었다고 보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여러 가지 그런 꿈같은 전도몽상 거꾸로 보는  뒤 바뀐 생각을 우리가 떠나서 열반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극락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부처를 우리가 이룬단 말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뿐만 아니라 과거(過去) 부처님이나 또는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모든 부처님이 삼세제불 아닙니까.

삼세 모든 부처님도 역시 - 다만 아까 말한 보살뿐만 아니라 -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에 의지 했다는 것입니다.

삼세 부처님도 또한 똑 같이,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고로, 역시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반야에 의지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에 의지해야 씁니다. 반야가 무엇인가? 반야는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해탈의 지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는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또한 바꿔서 말하면 모두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이러한 현상들이 다 비었다고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면 다 비었다고 보는 것이니까.

마치 전자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부 전자로만 보이듯이 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면 우주가 텅 비어서 부처님의 광명만 가득 찬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옳은 것입니다.

전자 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자나 원자로만 보이듯이 번뇌가 떠나버린 부처님의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면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청정 미묘한 광명으로만 가득차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바로 보는 것입니다.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도 역시 아까 보살과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 즉 말하자면 영생에 이르는 피안에 이르는 그러한 반야에 즉 지혜에 의지한 고로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아름다울 아(阿)자 클 아(阿)자, 김맬 누(耨), 누자 인데 지금 모다 ‘아뇩다라’ 합니다만 사실 이 발음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원래는 ‘누’자입니다. 인도 음도 역시 nu그래서 누인데, 아름다울 누(耨), 많을 다(多), 비단 라(羅), 석 삼(三), 이것도 아름다울 막(藐), 석 삼(三), 또 보살 보(菩), 이끌 제(提), 이것이 이끌 제인데 인도의 보디bodhi, 인도 말로해서 보디라고 하는데 부르기 사나우니까 ‘보리’라고 발음합니다만 역시 한문으로 본음은 제(提)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무상정편지(無上正遍智)·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라, 없을 무(無)자, 윗 상(上)자, 위없는(최상의, 비할 바 없는) 정편(正遍)이라, 바를 정(正), 두루 편(遍), 지혜 지(智), 위가 없이 바르고 보편적인 그러한 지혜, 따라서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란 뜻이지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 다시 위없는 다시 비교할 수 없는 또는 모든 지혜가 다 포함된 지혜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상도(無上道), 무상지혜(無上智慧),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또는 무상정편지(無上正徧智) 말입니다. 무상(無上) 위가 없고, 바를 정(正)자, 두루 편(徧)자, 바르고 두루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완전히 증득(證得)하면 부처 아닙니까. 성인(聖人)이고 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와 같이 얻는다.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 즉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지혜에 의지하는 고(故)로, 그 지혜가 무엇인가? 아까 말한 제법(諸法)이 공(空)한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지혜란 말입니다.

하여튼 이것을 머리에 딱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혼미가 안 온단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지혜, 제법이 공한 실상, 그것으로 본다면 아까 말과 같이 보살도 그런 지혜에 의지한 것이고 삼세제불도 역시 그와 같은 제법이 공한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상도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고지(故知)라, 고로 알아라, 고로 알지라, 이와 같이 보살이나 부처나 제법이 공한 지혜에 의지 해서 무상(無上)도리(道理)를 성취했으니까 그대들은 알아라.

어제도 말한바 이것은 부처님께서 지혜제일(智慧第一) 지혜가 수승한 사리불(舍利弗)한테 말한 법문입니다.

지혜가 수승한, 같은 제자도 아무리 신통은 많이 하지만 지혜가 수승하지 못하면 이런 법문은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지혜가 제일 수승한 사리불존자한테 이런 법문을 했단 말입니다.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는 이것은 

 

대신주(是大神呪)요. 이것이 바로 큰 신통스런 하나의 주문(呪文)이란 말입니다.

주문이라는 것은, 가사 ‘옴마니반메훔’도 주문 아닙니까. 하여튼 우리 인간의 말로해서 표현할 수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뜻을 갖춘 짤막한 글 이것이 주문입니다.

보통 말로해서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하나의 리듬이나 음으로 해서 심수오묘(深邃奧妙)한 무량의 뜻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문인데 반야심경 즉 말하자면 이와 같이 제법이 공한 자리를 볼 수 있는 이런 지혜가 바로 이것이 큰 그런 모든 신통을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주문이고,

 

시대명주(是大明呪)요. 이것이 모든 지혜를 밝힌 하나의  주문이며, 명주며,

 

시무상주(是無上呪)요. 이것이 또한 위가 없는 주문이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 다라니가 많이 있고 여러 가지 별별 복잡한 주문이 많이 있지만 그런 주문 가운데서 제법이 공했다하는 오온이 공했다하는 좋은 주문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위없는 주문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며, 이것이 무등등(無等等)이라, 없을 무(無), 같을 등(等), 그럽니다. 같음이 없는 주문이단 말입니다. 동등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최상이기 때문에 이와 버금할 수 있는, 이와 맞먹는 주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등등은 동등한 주문이 없단 말입니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라, 능할 능(能), 제할 제(除), 한 일(一), 끊을 체(切), 괴로울 고(苦),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한단 말입니다.

내 몸이 귀중하다, 니가 귀중하다, 내 자식이다, 누구다, 모다 재산이 좋다,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인데, 이 몸뚱아리 이것이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없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능히 일체의 인생고를 다 제거 하는지라, 따라서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진실로 참되고 헛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지혜(智慧)가 참되고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입니다. 진실불허라.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고로 반야바라밀다 즉 말하면 피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의 주문을, 주문을 압축해서 이렇게  지금 말한다고 하면 그 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지금까지 배워온 반야심경의 진리를 말입니다. 하나로 딱 뭉쳐서 주문으로 표현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의 그런 이와 같이 많은 진리를 다 모아서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해서 표현 한다고 하면

 

즉설주왈(卽說呪曰), 곧 지금 말하는데, 곧 주문으로 말하면,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보디사바하(菩提娑婆訶)라, 이것은 들 게(揭)자인데 들 ‘걸’이라고도 합니다. 이것도 역시 인도 말을 그대로 음역하기 위해서 이런 한문자로 한 것이고, 같은 음도 한문 투로 하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다 딱 안 맞아버렸지만 하여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들먹이면.....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보디사바하(菩提娑婆訶)라, 들 게(揭), 임금 제(帝), 할미 파(婆), 이것은 ‘파’인데 ‘바’라고 발음합니다. 반야바라밀도 역시 ‘파’자인데 음편(音便)되어서 ‘바’라고 발음합니다.

그다음 비단 라(羅), 중 승(僧), 보리 보(菩), 끌 제(提), 세상 사(娑), 할미 파(婆), 꾸짖을 가(訶), 사바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사는 번뇌에 때묻은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 반야심경의 전부 뜻을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하면 결국은 이렇게 표현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교에서 오종불번(五種不飜) 그래서 짤막한 말에 의미가 함축성이 많아가지고 다섯 가지 종류는 번역하지 말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가사 인도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라든가 또 이와 같이 아주 심수오묘해서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주문은 번역하지 말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을 아니 하지만 사람들이 하다 호기심이 있어 놔서 번역을 억지로 시도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어떻든 여러 가지 한 경우가 있으나

아제아제는 ‘돌아가세 돌아가세’ 돌아간다는 것은 내내야 진리의 바다 진리의 고향이 되겠지요. 바라아제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바라승아제 이것은 ‘모두 다 함께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보디’ 이것은 ‘진리’ 아닙니까.

‘사바하’는 어떤 주문에나 보통 붙어 있습니다. ‘도를 성취한다.’ 다시 정리하면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모두 함께 가세’

그렇게 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무상대도가 사바하인데, 사바하고 보리인데, 무상대도인 보리를  성취하세, 이렇게 풀이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저것 많이 보고서 그 가운데서 제가 느껴서 제일 좋은 대문(大文)으로 한 것이니까 꼭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다함께 가세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세!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공양 시간이 되어서 공양 들어야지요.


반야의 지혜 앞서 말한 오온개공의 지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 이것은 오온이 비어 있는, 오온은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정신과 물질은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지만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그런 것이 가득찬 온전히 가득찬 그 자리가 즉 말하자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텅 비어 있지만 사실은 불성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에는 불성뿐만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그걸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외운다 하더라도 그냥 외이기만 해서는 별로 공덕이 없습니다.

우리 관념상(觀念上) 천지우주는 텅 비어 있는데 다만 불성만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와 같이 느끼면서, 느끼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외셔야 씁니다.

참말로 있는 실상(實相)은 방금 말마따나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인데 다만 허무(虛無)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실상 그것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이란 말입니다. 

그런 우주에 충만한, 내 몸 가운데나 어디에나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의 미묘한 광명, 그 가운데는 지혜도 행복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무한의 광명을 이렇게 이미지image로 생각하면서 인제 부처님의 명호나 또는 화두도 하고 또는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운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그때는, 참말로 그때는 우리가 그런 광명, 부처님의 그런 불성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불성광명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속 빠른 공부 방법인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자기스스로도 인제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더 예뻐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출처 : 물처럼 바람처럼...
글쓴이 : 범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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