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로망스 No.2 F장조
베토벤은 "로망스"란 이름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두 곡 썼는데
1번이 G장조, 지금 들으시는 2번이 F장조이다. 2번 F장조가 먼저 작곡되었지만 출판순서에 의해 G장조가 1번이되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자살을 생각하고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있었다는데
극도의 절망감을 극복한 심정을 이러한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예후디 메뉴인
메뉴인은 네 살 때 바이올린을 잡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주활동을 하다가, 마침 미국에 들른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에네스쿠를 따라 파리에 갑니다.
스승은 몇 년 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독일의 아돌프 부쉬를 소개해줍니다.
메뉴인은 1927년 10세의 나이로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통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습니다.
그는 1936년 아들에게 안식년을 주기 위한 어머니의 배려에 따라 연주활동을 멈췄습니다.
메뉴인은 컴백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연합군 진지와 적십자 캠프를 누비며 무려 500여 회의
자선공연을 했습니다.
늘 마지막곡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로 끝냈다고 합니다.
메뉴인의 용기와 사랑은 전후에 더욱 빛납니다. 그는 전후 나치 협력자라는 이유 때문에 베를린 필
의 상임지휘자 직을 박탈당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옹호합니다.
그를 스위스 루체른으로 초청해 베토벤, 브람스의 곡을 함께 녹음하고 명반들을 내놓습니다.
메뉴인은 “푸르트벵글러가 겉으로는 히틀러에 협력했는지 몰라도, 베를린 필의 유태인 단원 30여명
을 무사히 해외로 도피시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근에는 푸르트벵글러를 나치주의자로만 보기 곤란하다는 시각이 우세해졌습니다만,
당시 메뉴인으로서는 엄청난 비난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메뉴인은 1951년 일본 공연 때 젓가락을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포크와 나이프처럼 집고 자르는 공격적인 서양 식탁문화와 달리 동양의
상 위에는 섬세한 평화로움이 녹아 있다고 해석했죠. 그는 “어릴 적부터 젓가락질을
할 수 있었다면 내 연주는 두 배 이상
뛰어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메뉴인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 인간을
선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바흐의 샤콘느를 시스틴
성당에서 연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질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한 기자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사람에 달린 문제”라고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어떤 분은 음악을 통해 천국을 경험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음악이 좋은
스트레스 또는 이완제로 작용해 심신의 건강을 돕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꼭꼭
닫고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음악도 소음일 뿐이겠지요. 여러분은 좋은
음악을 가까이 하며, 늘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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