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스크랩] 김소월 - 노래가된 詩 " 개여울 / 못잊어 / 님의 노래 /초혼 외"

맑은물56 2009. 5. 19. 16:55
김소월 (김정식)
출생  1902년 8월 6일
사망  1934년 12월 24일
출신지 평안북도 구성
학력  배재고등학교
데뷔
1920년 창조지 '낭인의 봄', '야의 우적', '우과의 읍' ,'그리워' 발표
경력
1926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개설, 경영
1924년 영대(靈臺) 동인
수상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1981년 금관문화훈장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못잊어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초혼 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생애

 

1902년 8월 6일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소월 김정식 시비. 서울 남산공원 소재.
소월 김정식 시비. 서울 남산공원 소재.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다.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작품 경향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평가

조연현은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면서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이라고 평했고,[1] 조병춘은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이라고 했다.[2] 김현은 김소월의 시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고 했으며,[3] 유종호는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이라고 했고,[4] 김용직은 김소월을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라고 했다.[5]

 

주요 작품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현참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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