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시어 풀이]
님의 침묵 : 영원한 진리의 말 없는 말. 초월적인 존재의 음성.
정수박이 : '정수리'의 뜻.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작품 개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율격 : 내재율
어조 :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 영탄적 어조
심상 : 서술적 심상
구성 :
- [1~4행] : 임과의 이별(기)
- [5~6행] : 이별 후의 슬픔(승)
- [7~8행] : 새 희망에의 의지(전)
- [9~10행] : 불구의 의지의 사랑(결)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이 말하는 바 '님의 침묵'은 작중 인물 '나'의 삶에 절대적일 만큼 소중한 어떤 것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킨다. 제6행('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까지는 그러한 상실의 경험에서 오는 슬픔을 노래한다. 이 부분에서 님은 지극한 사랑의 대상인 연인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님은 '나'에게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서를 하였고, 님의 입술에 닿았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았다. 그러나 그 님은 떠나가고 말았다.
제7행 이하의 부분은 이러한 이별에서 오는 절망과 슬픔을 새로운 희망과 기다림으로 극복하는 믿음의 노래이다. 이와 같은 시상의 바탕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는 생성, 변화를 거듭하며 따라서 영원한 만남과 밝음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헤어짐과 어둠도 없다는 불교적 깨달음이 놓여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님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님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 때의 님을 꼭 조국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님을 조국이라는 말로 바꿔 넣으려 하면 여러 가지 해석상의 무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시가 노래한 '님이 없는 시대'는 분명히 참다운 정의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시대이며, 식민지 시대와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꺼지지 않는 참다운 가치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것을 위한 헌신적 사랑과 믿음을 노래한 데에 이 작품의 근본되는 뜻이 있다.
[평가]
1. 만해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님'의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님의 의미는 다양하다. 표면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이요. 친구,부처 등으로서,역사적으로는 조국이나 민족의 의미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님은 결국 사람의 삶을 삶답게 해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생명체의 근원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포괄적인 개념 정의가 될 것이다.
2. 4행에서 '날카로운'이란 시어를 사용한 의미는?
▶임과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온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뜩할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게 찾아왔고, 그리하여 나의 삶의 지표를 다르게 변화시켜 놓았는데, 그만 임이 가고 없다는 상실의 재확인이다. 즉 정신적 충격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이 시에서 역설적으로 표현된 부분을 찾아라.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때를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갔지마는 나는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4. 이 시와 한용운의 다른 작품『알 수 없어요』의 귀결점은 동일하나 출발점은 다르다. 서로 다른 출발점의 차이를 창작 동기와 비교하여 100자 내외로 쓰라.
▶ 『님의 침묵』은 님과의 이별을 인식하고 그 이별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데에서 출발하였고,『알 수 없어요』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을 통해 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5. 제1행의 '아아'와 제9행의 '아아'에 함축되어 있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각각 한 단어로 쓰라.
▶ 제1행의 '아아' : 슬픔 제9행의 '아아' : 기쁨
<해설> 제1행의 '아아'는 이별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을, 제9행의 '아아'는 헤어짐은 곧 만남이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법열(法悅)을 함축하고 있다.
6.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에 담긴 역설적 의미를 20-30자 내외로 쓰라.
▶ 나는 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여 님 안에 존재합니다.(또는, 나의 마음은 님 이외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7. 제9행에서 '님은 갔지마는'이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주관적 의지에 해당된다. 주관적 의지가 드러난 부분의 처음과 마지막 어절을 쓰라.
▶ 그러나 ∼ 믿습니다.
[지은이]
한용운(호는 만해 : 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통감과 서경을 통달했지요. 1896년 서당에서 교사가 되어 아동을 가르쳤고, 1899년에는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돌아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1904년 봄에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달을 머물다가 초여름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머물면서 참선과 수도를 하던 그는 1908년 일본 여행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고, 유학중인 최린과 사귀었지요.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보고하기 위해 측량 학교를 세우고, 송광사,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불교 개혁 운동과 독립 운동에 앞장선 그는 1911년 한일 합방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독립군에게 민족 독립 사상을 북돋워 주고, 망명중인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과 만나 독립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1913년 {조선 불교 유신론}을, 1914년에는 {불교 대전}을 간행하는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지요.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18년 윌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편집자 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잡지에 논설과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을 발표하고 이후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하나로 참여하여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발표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옥중시 「무궁화를 심고자](1922), 장편 소설 {죽음}(1924), 시집 {님의 침묵}(1926)을 잇달아 간행했습니다.
1933년부터 서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하면서 장편 소설 「흑풍], [박명」 등을 짓고, 불교에 관한 논설과 수필을 발표하던 그는 1944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8세 때 의병에 가담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기개 있고 고매한 삶은 오늘날까지도 민족 지도자요 선각자의 표상으로 살아 있습니다.
한용운의 시는 '소멸'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소멸의 시학 또는 모순의 시학이라고 합니다. 그에게서 모순은 소멸을 통해, 소멸은 다시 모순과의 변증법적 갈등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극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순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님의 소멸이라는 극적인 발상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사회 의식을 소멸과 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한용운은 고전적 정신과 불교의 가락을 체득해 은유적 방법을 확립하고,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호한 상상과 퇴패적 감상주의가 주조를 이루던 당대의 시적 풍토를 뛰어넘어 그가 간 길은 귀중한 우리의 자산입니다. 그는 종교 의식과 예술 의식의 교차점에서 개인과 사회를 접맥시키고, 이것을 다시 역사 의식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이 점이 바로 한용운이 대시인으로 칭송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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