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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배우 김명민, 좌절과 시련의 힘

맑은물56 2009. 4.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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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은 대기만성(大器晩成)라는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스타라고 여겨집니다. 김명민에게 화려한 청춘 스타의 시절은 찾을 수 없거든요. 어떻게 보면 무명에 가깝던 청춘 시절을 보내면서 겪은 숱한 좌절과 시련 덕분에 강해졌고 지금의 흔들림 없는 대형 스타가 됐습니다.

20대의 김명민 역시 연기자였지만 철저하게 무명이었습니다. 30대에 접어들어 이름 석자를 알리기 시작했지만 그를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소름' 등 영화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뜨거운 것이 좋아' 등의 드라마로 주목 받긴 했지만 그저 괜찮은 연기자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스타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의 타이틀롤로 깜짝 발탁된 거죠. 대형 연기자로 가능성을 알렸지만 대부분 방송 관계자들은 '불멸의 이순신'이 정점일거라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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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명민은 '하얀거탑'과 '베토벤 바이러스'를 거치며 특급 스타 대열에 올라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명민은 숱한 시련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연기 활동 포기의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강해졌습니다. 이제 그는 강한 카리스마와 연기력, 그리고 대중적인 지지도를 겸비한 흔들리지 않는 톱스타가 됐습니다.

김명민은 학창 시절부터 연기 지망생이었습니다. 충암고 재학 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하며 연기의 꿈을 키운 그는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해 연기 수업을 쌓았습니다. 대학 시절 김명민은 학교 주최 연극에서 항상 앞장서는 모범생이었다. 수업은 그다지 열심히 듣지 않았지만 연극 행사는 단 한번도 빼먹지 않았고 며칠씩 밤을 세우길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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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은 1996년 SBS 공채 탤런트로 선발돼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에 뛰어들었습니다. 공채 탤런트들은 주로 자사 드라마의 단연으로 출연하기에 스타로 부각되기 쉽지 않습니다. 김명민 역시 2년여 단역 등 작은 배역만 맡았기에 두드러질 기회는 없었죠. 그러나 김명민은 매일 드라마국을 찾아가 PD들에게 건강음료를 돌리며 인사해 착실한 인상을 남겼다. PD들도 그런 김명민의 착실함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 김명민은 처음으로 매니저를 만나면서 첫번째 시련을 만났습니다. 매니저가 "연기자가 음료나 돌리는 건 값싸게 보인다. 모든 걸 내게 맡기고 따라오라"며 중단시킨 일이었죠. 김명민은 매니저를 따랐지만 오히려 연기 기회는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PD들이 '김명민이 건방져졌다'고 밉게 보기 시작한거죠. 일이 안 들어오니 매니저도 김명민을 방치했고 그 동안 쌓은 좋은 이미지만 잃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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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명민은 어렵사리 영화계에 노크했지만 시련과 함께 시작해야 했습니다. 1999년 영화 '공포택시'에 주인공으로 깜짝 발탁돼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돌연 주인공이 이서진으로 교체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1년여 방황하던 김명민은 MBC TV 드라마 '뜨거운 것이 좋아'와 영화 '소름'을 통해 이름 석자를 알렸다.

특히 '소름'에선 광기어린 살인마 택시기사를 연기해 극찬을 받았습니다. 영화 흥행은 부진했지만 김명민의 실력은 확실히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밝은 빛이 드리운 시기는 잠깐이었습니다. 이후 김명민은 몇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잠깐 반짝 했다가 사라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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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큰 기대를 품고 출연한 노희경 작가의 '꽃보다 아름다워'는 연기자로서 한계를 느끼게 했습니다. 촬영 중이던 영화 '선수가라사대'와 '스턴트맨'이 크랭크업 직전 무산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 무렵 첫아들 재하가 태어났죠. 더이상 연기자로는 당당한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연기 활동을 완전히 접고 이민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김명민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뉴질랜드에 집과 직장까지 다 알아봐뒀습니다.

그때 김명민에게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의 타이틀롤로 전격 캐스팅된 기회였죠. 기껏 찾아놓은 뉴질랜드의 터전을 포기했지만 김명민은 새로운 도전에 활기를 얻었습니다. 김명민의 이순신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김명민이 '스타'라는 수식어를 얻게된 나이는 서른세살이었습니다. 이후 김명민은 1년 간격으로 '하얀거탑'과 '베토벤 바이러스'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한단계 한단계 톱스타로 도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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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김명민을 처음 만난 건 '소름' 촬영을 마친 직후였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인사를 나눴고, 당시 일간스포츠에 있던 코너인 '스타 스토리-김명민 편'을 제가 연재했습니다. 김명민이 자신의 인생사를 죽 들려주면 제가 12회 정도로 구성해서 연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매우 친해졌습니다. 김명민은 한살 많은 제게 스스럼 없이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도 만나면 제게 "형"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김명민의 아우라가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에 가겠다고 답답해 하던 때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 당시에도 김명민은 담담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죠. '불멸의 이순신'의 주인공으로 깜짝 발탁됐을 때에도 그는 담담했습니다. 결연한 의지를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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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을 보면서 무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즘 그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병 환자로 캐스팅돼 연기혼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혼을 불사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체중을 10kg 이상 감량하고 진짜 죽음을 앞둔 환자가 돼 있습니다. 김명민은 시련이 많았던 만큼 강해졌습니다.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앞으로 더욱 거침없이 전진하는 배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