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자들이 중국 간화선의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주최한 ‘선(禪)의 원류를 찾아서’ 2차 순례단 109명이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중국 영파와 항주 등지의 사찰을 돌며 간화선의 두 주역인 대혜종고 선사(大慧宗日木, 1089~1163)와 고봉원묘 선사(高峰原妙, 1238~1295)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일반인을 위한 간화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불교인재개발원이 지난해 <육조단경> 순례에 이어 올해도 중국 현지에서 선을 체험하는 기획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이번 순례에는 고명한 선승이자 학승으로 존경받는 봉화 금봉암 주지 고우스님과 전 교육원장 무비스님이 동참해 의미를 더했다. 스님들은 각 사찰에 얽힌 고승들의 일화를 소개하며 불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순례 길에 고우 . 무비스님 동참, 中사찰 일화 소개
경내 곳곳 민중에 희망 전한 선지식들의 숨결 오롯
<사진> 불교인재개발원 중국 선적지 순례단이 항저우에 위치한 영은사를 둘러보고 있다. 앞줄 오른쪽이 금봉암 주지 고우스님.
조계종의 대표 수행법인 간화선의 뿌리를 찾기 위한 3박4일간의 일정은 닝보(영파)의 아육왕사(阿育王寺), 천동사(天童寺), 항저우(항주)의 고려사(高麗寺), 천목산(天目山), 선원사(禪源寺), 정자사(淨慈寺), 영은사(靈隱寺) 등으로 이어졌다. 모두 대혜스님과 고봉스님이 주석하며 법을 폈던 공간이다.
고려사는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어 순례에 포함됐다. 10일 영파공항에 내린 순례단이 처음으로 방문한 사찰은 아육왕사다. 인도의 성군 아쇼카왕의 이름을 본뜬 사찰로 대혜스님이 15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머문 곳이다.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도를 묻는 사람이 1만2000명에 달했다고 할 만큼 대혜스님의 지고했던 법력을 증거한다.
대혜스님은 북송 말기에 태어나 남송 초기를 살았던 임제종 계열의 스님이다. 금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에 가담했다가 주화파의 득세로 결국 형주로 유배를 당했었다. 북송은 요나라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침입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마침내 금나라에게 멸망하고 양자강 이남의 절반으로 축소된 영토에서 남송이란 이름으로 연명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 데다 소위 ‘오랑캐’와 굴욕적 화친을 맺으며 ‘중화인’으로서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사진> 아육왕사에 있는 대혜선사 진영.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최악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혜스님은 선의 진작을 통해 피폐한 시대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간화선을 주창한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은 당대의 묵조선(照禪)에 대항해 나타난 역동적이고 직관적인 수행법으로 화두를 타파해 즉각적으로 깨달음을 규명한다는 것이 요체다. 간화선은 조사선의 적자(嫡子)다.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이 누구나 부처라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을 강조한다. 그 자체로 성불해 있기 때문에 계급의 고하에 따라 부처와 중생을 차별할 명분도, 번뇌와 보리를 따로 나눌 필요도 없다.
간화선은 선정을 통해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게 아니라 이미 해탈되어 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보자는 조사선의 전통을 따른다. 곧 패배주의에 물든 송나라 민중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희망이었던 셈이다.
<서장(書狀)>은 대혜스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스님이 당시 사회지도층에 속한 관리들과 나눈 편지를 엮은 책으로 초조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조사선의 전통을 가장 정확하게 계승한 간화선의 면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선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선이 입각한 근본적 입장, 선 수행에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 그릇된 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두 번째로 찾은 천동사는 아육왕사와 함께 대혜스님이 묵조선의 최고 어른이었던 굉지스님과 우정과 교감을 나눈 곳이다. 간화선의 묵조선 비판이 단순히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창조적 회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나라는 문약(文弱)의 시대였다. 글을 숭상하면서 기질은 소심해지고 이민족의 외침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선가에서도 조사들의 선문답과 법어를 사색을 통해 이해하고 음미하는 풍토가 대세였다. 당시에 유행한 송고문학(頌古文學)이 단적인 예다. 선이 삶을 뼈 속 깊이 갈아엎어 다시 세우는 근간이 아니라 한낱 간지러운 풍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진> 아육왕사 사진
대혜스님의 간화선은 유약한 시대정신에 들이댄 활인검(活人劍)이었다. 말끝에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불같이 다그쳤다. 간화선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위험한 경계였지만 일단 넘고 나면 영원한 자유가 보장되는 길이었다. 언어와 분별로 규정된 세계 이전에 맨몸으로서의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피와 땀의 노력에 불교계를 넘어 사대부들도 감복했다.
당대의 숱한 선지식들이 당신을 깨달았다고 인정했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스스로 엄결한 자기검열의 기준으로 치열한 수행과 교화로 시대를 맨몸으로 관통했다. ‘사는 것도 다만 이러하고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하네. 게송을 남기고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무슨 유행인가(生也祗 死也祗 有偈無偈 是甚熱).’라는 열반송에도 가없는 자기갱신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고봉스님은 <서장>과 함께 간화선의 핵심 교재로 평가되는 <선요(禪要)>의 저자다. 스님도 대혜스님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상적 격변기를 살았다.
몽고의 침략으로 남송마저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원을 장악했으며 신유학(新儒學)이 시대의 중심이념으로 자리한 때다. 임제종의 선맥을 이은 고봉스님은 <선요>에서 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특히 깨달음이 완전히 성취된 이후 나온 저작이어서 조사선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천목산 개산노전에 봉안된 고봉선사 금동좌상.
스님은 <선요>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 화두참구에 필요한 대신심(大信心) 대의정(大疑情) 대분지(大憤志)의 세 요소, 일대사(一大事) 등에 대한 가르침을 담았다. 요컨대 <서장>과 <선요>는 조계종의 수행법인 간화선의 본질과 실제를 제시한 매우 중요한 책으로 강원(講院)에서도 필수 교과로 도입했다.
천목산의 개산노전(開山老殿)에서 고봉스님의 금동좌상을 만날 수 있다. 강직한 구릿빛 풍모에서 깨달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선요>는 스님 자신이 일생 동안 실천한 수행과 교화의 구체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어서, 읽으면 마치 스님을 직접 만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의 사찰은 문화대혁명으로 거의 모두 초토화됐다. 오늘날의 절들은 대부분 1990년대 이후 중건됐다. 결국 고승들의 온기가 만져지는 흔적들도 많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나 어떤 다짐으로 순례에 임했느냐에 따라 각자의 마음에 그려진 역사의 윤곽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참가자들과 함께 모든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한 고우스님은 “간화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일갈했다. “옛 사람도, 오늘날을 사는 사람도, 미래의 후손들도 동일한 삶의 양태를 이루며 심지어 짐승과 무정물들도 같은 원리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존재의 원리를 밝힐 수만 있다면 자아와 타자가 다르지 않음을 아는 매순간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매일같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강행군을 마친 불자들을 격려하며 순례 ‘이후’에 대해 환기시켰다.
“여러분들도 이번 간화선 순례가 어려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혜스님을 공부하자는 목적이 뚜렷했기에 지겹고 힘든 여행이었다고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순탄치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존재의 의미를 알고 산다면 삶에서 얻는 보람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중국 닝보 항저우=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