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3시경 궂은비가 그치고 흐린가운데,
망해사를
오르고 있는 일광스님과 선근스님망해사 역시 규모는 크지않은 암자같은 사찰로써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세워저 있다.
부설(浮雪)거사 망해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에 중국에서 온 중도(中道)스님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후기의 도장(道藏) 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다. 現 절에서는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부설(浮雪)거사가 세웠다고 밝히고있다. 현재 절에서 부설 거사를 초창자로 여기는 것은 부설 거사가 도를 이룬 곳은 옆동네인 부안 변산의 월명암 이기 때문이다.
불교사에는 전설적으로 인도의 유마힐, 중국의 방온, 한국의 부설거사가 있다.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대승 선언으로 널리 알려진 유마힐. 전 재산을 바다에 버리고 대바구니를 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唐代의 이름난 선사들을 통쾌하게 꺾어버린 선의 고수 방온.
이들 거사의 행적이 높게 빛난다면 부설 거사의 삶은 인간적으로 아름답다.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는 400년전에 쓰여진 작자미상의 불교소설 '부설전(浮雪傳)' 한문 필사본 한권(유형 문화재 제140호)이 전해 온다.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삶이 구전으로 내려오다 소설로 정리 된 것이다. 또한 1916년에 발행된 조선불교월보 대원경(大圓鏡) 제16, 17호에 한문으로 된 부설거사전이 실려 있어 부설거사의 행적이 전해 온다.
부설(浮雪)은 신라28대 진덕여왕 1년(647년) 경주 城內 진(陳)씨 댁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의 이름은 광세(光世)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 재질에 용모가 비범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까지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아가며 곱게 자라나 진씨댁(陳氏宅)에 큰 인물이 났다고 칭송이 자자하 였다. 부설은 글을 배울 때도 한 번 배운 것은 다시 묻는 일이 없고, 아이들끼리 놀 때도 아이 놀이가 아닌 어른들 노는 것 같았으며, 20세가 되던 해에 홀연히 집을 등지고 불국사 원정선사(圓淨 禪師)를 찾아가 중생이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 받고 출가를 결심한다. 그리하여 光 世란 이름을 버리고 부설(浮雪)이란 법명(法名)을 받았다.
부설은 一心으로 정신을 집중, 영희(靈熙), 영조(露照)가 불도를 위한 동반자로따라다녔고 부 설은 영희, 영조와 더불어 法友로서 서로 굳게 맺어져 있었다. 부설은 영희, 영조스님과 중국으로 유학가던 중 배가 난파하여 천신만고 끝에 남해에 오른 후 유학을 포기하고 지리산 토굴에서3년, 천관사에서 3년, 내장사 등지서 10년을 참선수행한 후, 오대산(五臺山)이 문수(文殊)보살 상주도량(常住道場)으로 이름난 곳임을 알고 세 사람은 문수보살을 찾아뵙고 불법의 심오한 妙法을 얻고자 오대산을 향하던 중 변산 만경(萬頃)백연지 (능제방죽)라는 곳(현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에 당도했는데, 날이 저물고 장마라도 질 듯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동네 사람이 구무원(仇無鷺)의 집으로 가서 쉬기를 청하라고 일러 주어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니 주인은 쾌히 승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하룻밤을 자고 가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하늘이 인연을 맺어주고자 했는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리는 봄비에 발걸음을 멈춰야했다.구무원은 늦은 나이에 딸 하나를 얻었는데,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하여 태어난 태몽 때문에 묘화라 이름지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무남독녀 묘화는 말을 못하는 천성(天性)의 벙어리였다. 구씨(仇氏) 내외는 몹시 한 스러웠으며, 묘화는 자랄수록 얼굴은 백옥같고 자태는 연꽃 같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비록 말은 못하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仙女같은 묘화를 본 총각들은 앞을 다투어 청혼하였으나 묘화는 모두 거절하였다. 구무원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덕망이 높고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이 나있어 수행승(修行僧)을 만나면 크게 환영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쉬어 가게 하였다. 세 분 스님을 사랑채에 모시고 도를 닦던 덕담과 불교의 이치를 가르치는 설법을 듣기 소원하던 차에 세 수도승은 법담으로 밤이 깊어만 갔다. 그 날 밤 구무원(仇無鷺)의 안채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묘화(妙花)가 느닷없이 말문이 터져 말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묘화가 말하기를 "부설(浮雪) 스님과 소녀(少女)는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스님을 남편으로 섬기겠다"는 것이다. 부모는 20여 년이란 세월을 말을 못하다가 말문이 터지게 된 것도 대견하지만 '부부인연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단호한 결의에 부설 스님은 황망했으나 몇 날을 거쳐 부녀간의 요청은 이어 졌고, 부설(浮雪)스님도 인(因)으로 하여 과(果)가 따르는 법,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생후 20년 간 말을 안 했던 묘화(妙花)를 차마 어찌 할 수 없어서 "내 앞에 닥친 일도 치우지 못하면서 먼데 일을 치우려고 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며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영희, 영조 두 스님은 오대산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가고 부설 스님은 거사라 자칭하고 묘화의 집에 머무르기로 하고, 두 사람은 모든 흔례식을 올렸다. 이때 읊은 부설 거사의 게송을 보면 수행에 있어 새로운 각오를 엿볼 수 있다.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지 아니하며,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도는 번화로운 거리나 거친 들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제불방편 지재이생(諸佛方便 志在利生) 부처란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혼례를 마친 부설 거사와 묘화는 월미산 아래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며 여기에서 아들 등운 (登雲)과 딸 월명(月明) 남매를 낳았고 한편으론 만경 바닷가에 초막(오늘의 망해사)을 지어 수행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설 거사가 정진하던 초막은 세월이 흘러 지각변동으로 바다에 잠겼다. 남매가 성장하자 거사(居士)는 두 아이를 부인에게 맡기고 이곳에서 참선을 했다.
20년 후 옛 법우(法友)인 영희(靈熙), 영조(靈照)두 대사(大師)가 참례를 마치고 찾아와 부설거사를 측은한 듯 바라보자, 태연하게 미소짓던 부설거사는 물을 가득 담은 병을 처마에 매달아 놓고 두 도반스님에게 병을 깨뜨려 보라고 했다. 두 대사가 병을 때리니 두 개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버렸고 부설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 졌으나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결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매몰되지 않았다. 속에 처하되 그것에 물들지 않았으며 살활 (殺活)자재의 경지에 든 것이었다. 삶이 그대로 수행임을 보인 부설 거사. 그 행적지를 따라가다 보면, 묘화 부인과 가정을 이룬 것은 소승적 파계가 아닌 만물을 포용하는 중생제도의 대승적 실천이었음을 알게 된다.
거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좌탈(坐脫)하였습니다.
目無所見無分別 (목무소견무분별 ;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이청무성절시비 ;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시비도방하 ;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단간심불자귀의 ;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라)
부설 거사가 입적하자 묘화 부인은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출가시키고, 전 재산을 내놓아 '부설원' 을 세우고 부설 거사의 뜻을 받들어 평생 보살행을 실천하다 110가 되어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다. 출가한 등운과 월명은 부설 거사가 창건한 묘적암에 등운암, 월명암 토굴을 지어 위법망구(爲法 忘軀)) 정진 끝에 대성 득도하였다.
부설 거사가 스님이던 시절에는 이름이 묘적암이었던 월명암은 내변산 국립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부설거사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팔죽시와 사부시가 전해지고 있다. 팔죽시는 정비석님이 쓴 김삿갓 방랑기에서 김삿갓이 지은 시로 등장하기도 한다.
팔죽시(八竹詩)
此竹彼竹化去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 가는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는대로 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대로 보고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정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맘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세.
사부시(四浮詩)
처자권속삼여죽(妻子眷屬森如竹 사랑하는 처자권속이 대숲처럼 빽빽이 둘러있고) 금은옥백적여구(金銀玉帛積如坵 진귀한 보배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어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 죽을 땐 오직 홀로 외로운 넋만 돌아가니)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된 뜬 거품이로다)
조조역역홍진로(朝朝役役紅塵路 날이면 날마다 세상사에 골몰하고) 작위재고이백두(爵位纔高已白頭 벼슬 겨우 높아지니 이미 머리는 하얗구나) 염왕불파패금어(閻王不怕佩金魚 염라대왕은 부귀영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된 뜬 거품이로다)
금심수구풍뇌설(錦心繡ㅁ風雷舌 아름다운 글 재주와 혼을 빼는 말솜씨) 천수시경만호후(千首詩經萬戶侯 천편의 시경 재주, 만호후의 권력) 증장다생인아본(增長多生人我本 여러 생에 걸쳐 남보다 내 잘난 것만 더욱 키울 뿐)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된 뜬 거품이로다)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 설령 설법이 뛰어나 구름과 비를 부르고)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 감히 하늘에서 꽃비내리게하고 돌조차 머릴끄덕여도) 건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고(生死苦)를 면치 못하리니) 사량야시허부구(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 모두 헛된 뜬 거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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