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유년시절, 추억의 시렁 첫 칸에 놓인 풀각시
어제 해거름, 앞산을 오르면서 반가운 풀 하나를 발견했다. 각시풀이라는 풀이었다. 어릴 적에 각시인형을 만들어 놀던 풀이었다. 각시풀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 다 장난감이었던 시절이었다. 풀 인형을 만드는데 이 각시풀 말고 지랑풀·무릇·진풀·달래·물구지 등 다른 풀을 사용했던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억 밖의 일이다.
음력 삼월이 지나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기 시작하면 들로 나가 양지 바른 곳에 연둣빛으로 소복이 돋아난 각시풀을 뜯었다. 각시풀은 생김새가 마치 부추 잎을 방불케 한다. 처녀의 머리칼 마냥 보드라운데다 윤기마저 잘잘 흘렀다. 만지면 한없이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다 기분 좋은 풋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한참 동안 향긋한 풀 냄새를 맡고 나서 각시풀을 한 움큼 뜯었다. 그 풀을 길이가 한 뼘 정도 되는 막대기나 수숫대 끝에 갖다대고 실로 칭칭 동여 맨 다음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면 막대 끝에 둥근 머리 모양이 된 풀이 치렁치렁 늘어졌다.
늘어진 풀을 두 갈래로 또록또록 댕기를 땋아간다. 마지막에 빨간 헝겊 따위로 치마를 둘러주고 나면 비로소 풀각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다 할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던 궁핍한 시대, 나의 유년시절에 풀각시는 그렇게 태어난 꼭두였다. 각시놀이에서 주인공을 맡은 '프리마돈나'였다.
사금파리처럼 살 속에서 아프게 빛나는 유년의 시간
충남 논산 출신의 김소엽 시인은 1991년에 상자한 시집 <그대는 별로 뜨고> 속에 실린 '각시풀'이란 시를 통해 잃어버린 시절을 안타깝게 노래한다.
모래 위에 벗어 두고 온 유년의 발자국
허리 잘린 유년의 꿈이
사금파리로 반짝이며 살 속에서 빛나고 있네.
나이 들수록 땅뺏기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서
호드기 부는 것도 잊어버리고
내 유년의 초가지붕 위엔
각시풀만 무성히 자라고 있네. - 김소엽 시 '각시풀' 전문
김소엽 시인은 1978 <한국문학>에 시 '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이다. 이화여대 영문과·연세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김소엽 시인은 주로 기독교 사상이 주축을 이루는 시를 써 왔다. 물론 시 '각시풀'처럼 한국 사람에게 내재한 얼이나 전통적인 정서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김소엽 시인은 각시풀을 유년시절의 아이콘으로 묘사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이런 내 안타까움을 씻겨주는 시편 가운데는 김미숙 시인이 쓴 '풀각시'라는 시가 있다.
![]() | ||||||
|
각시풀로 살고 싶다
솔가지 비녀 꽂아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울음 속에
쪽진머리 될 때까지
조용히 숨어 우는
풀여치 곁에서
때아닌 폭풍우를 밀어내고
소나기처럼 요란한 말매미 울음소리도
밀쳐내고
낮은 바람에도
고개 숙여 옷깃 여미는
산비탈 이름 없는 풀잎처럼.
- 김미숙 시 '풀각시' 전문
이 시는 지난 2000년, 시와시학사에서 펴낸 <피는 꽃 지는 잎이 서로 보지 못하고>에 실려 있는 시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김미숙 시인은 1998년 <시와시학> 봄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현재 경남 마산의 한 유치원장으로 재직 중이라 한다.
시집 속엔 이 시를 비롯해 사랑을 주제로 한 70여 편의 시를 수록했다. 시집 뒤에 해설을 쓴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은 그의 시 세계를 두고 "김미숙 시인에게 있어 시 쓰는 일이란 열심히 사는 일이고, 진지하게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시의 주제가 바로 사랑이고 살아가는 일 그것이기 대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풀각시'라는 시 역시 그런 평가에서 동떨어진 시는 아닐 것이다.
시의 모두에서 김미숙 시인은 "각시풀로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는 각시풀 혹은 풀각시로 살 나이는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나이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이다. 그럼에도 왜 그는 풀각시처럼 살고 싶은가. 추측건대,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울음 속에/ 쪽진머리 될 때까지// 조용히 숨어 우는/ 풀여치"란 다름 아닌 시인의 분신인지 모른다. 시인은 이제 울음을 그치고 풀각시처럼 조용히 살고 싶은 것이다.
팍팍한 삶에 힘과 위안을 주는 유년의 추억
이제는 세월이 흐르고, 풍속·문물도 바뀌어 풀각시에 얽힌 추억은 더 이상 '전승'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겐 아직도 유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아련한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마치 산울림을 듣는 일이나 진배없다. 이를테면 언젠가 저 건너 편 산기슭을 향해 흘러 보냈던 소리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내 귓가에와 꽂히는 셈이랄까.
요즘 아이들의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플라스틱 소꿉놀이도 시간이 지나면 내 추억 속 풀각시처럼 말랑말랑하고 아롱다롱한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가다 보면 더러는 사막도 길이 되는 수가 있는 게 생의 섭리라곤 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 될 듯하다. 인생에서 추억이란 단순한 기억에서 머무는 게 아니다. 때론 삶에 힘을 주고 위안을 주기도 하는 게 추억이다. 요즘 아이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들의 유년시절에서 무엇을 끄집어내 회상할는지.
글을 마치려니, 어디선가 꿈결처럼 각시놀이 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잠시 낯익은 소리의 울림을 따라 추억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각시방에 불써라. 각시방에 불 써라. 신랑방에 불 써라.
각시코가 예쁘냐 음음 신랑코가 예쁘냐 음음
각시방에 불 써라 신랑방에 불 써라.
이 아련한 환청! 내가 벌써 봄날의 쓸쓸함에 감염 되어 버렸는가. 마음이 자꾸만 헐렁헐렁 해진다. 마음의 단추를 더욱 단단히 채워야겠다.
'문학 >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0) | 2008.09.03 |
---|---|
거리에서/ 이원 (0) | 2008.08.26 |
[스크랩] 박경리`산문... `물질의 위험한 힘`... (0) | 2008.08.18 |
[이청준 타계] 끊임없이 '당신들의 천국' 묻던 창작열정 끝내 지다 (0) | 2008.08.02 |
그대, 이제 그대의 천국으로 가시는가 (0) | 2008.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