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그대, 이제 그대의 천국으로 가시는가

맑은물56 2008. 8. 2. 00:42

그대, 이제 그대의 천국으로 가시는가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07.31 18:55 | 최종수정 2008.07.31 20:03



ㆍ이청준을 추모하며

쉬엄쉬엄 왔는데도 숨차고 다리 후들거려 ㅅ의료원 영안실 빈 의자에 잠시 앉아있자니 뒤에서 들리는 소리.

-김 선생님, 여기 웬일이세요.
돌아보니 그대가 아니겠는가.
-웬일이라니, 그대 장례식에 오지 않았겠소. 그런데 그대야말로 웬일이오? 이렇게 나와도 괜찮겠소?

-잠시 나왔을 뿐이외다. 뭐 별일 있겠어요?

그렇다. 무슨 별일이 따로 있겠는가. 우리는 평소처럼 낮은 소리로 또 눈짓으로 이런저런 말을 나눴소. 요즘 날씨란 장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둥, 황소도 병에 걸려 자빠지기 일쑤라는 둥, 그야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둥, 기름 값이 천정부지라는 둥, 이승엽이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는 둥.

이 평소처럼 낮은 소리, 낯익은 눈짓 속에 있자니 어느새 숨결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후들거리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멀쩡해지지 않겠는가. 대체 이 편안함이란 무엇인가. 이젠 일어설 수조차 있었소. 뿐이랴. 능히 걸을 수조차 있었소.

그대의 손에 이끌려 영안실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워라. 그대는 어느덧, 거짓말처럼 순백의 꽃밭 속 검은 사진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소. 또 놀라워라. 내가 향을 피워도 아무 말 없었소. 다시 또 놀라워라. 절을 두 번씩이나 해도 모른 척 하지 않겠는가. 그대 이래도 되는 일인가.

하릴 없이 쫓기듯 물러날 수밖에.
밖에는 그대를 보내는 친지들 꿀벌처럼 모여 웅웅거리고 있었소. 생수에, 깡통 맥주에 취해 무성히 그대 흉보기에 정신들이 없어 보였소. 옆에서 누가 듣는 줄도 모를 만큼 신바람이 났소.

이 무구한 자기기만, 이 천진한 인간다움.
나도 신바람이 날 수밖에.
대서양 해안까지 흘러간 제주도 문주란 씨앗을 소재로 소설 한 편 쓰기 위해 멕시코까지 찾아간 이 잘난 소설쟁이가 귀국할 때의 일. 금연의 비행기 속에서 위스키 한 병을 몽땅 비웠다 하오. 이 굉장한 애연가에겐 그 길이 상책이었으니까. 인천공항에 내려도 끄떡없었다고 그는 큰소리쳤다 라고. 주석에서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 얘기를 신바람 나게 했소.

그러자 누군가 대번에 항의했소. 왈, 반만 맞고 반은 틀렸소 라고. 이 목격자의 증언은 이러했소. 인천공항에 내린 이 잘난 소설쟁이는 가방 찾을 생각도 까맣게 잊고 호기롭게 리무진에 올랐다 라고.

나도 어찌 쉽사리 질까 보냐. 재빨리 이렇게 대들었소. 그래도 그는 귀국 직후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2005)를 썼다 라고. 또 덧붙였소. 이 소설쟁이는 소주에 취하기만 하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저기 엉터리 평론가가 있다!"라고 외치기 일쑤였다고.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그는, 키 큰 평론가 김현의 표현으로 하면 제 어미를 팔아 '눈길'(1977)을 썼고, '자생적 운명'을 다룬 천금 무게의 '당신들의 천국'(1976)을 썼소. 조국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다시 그곳을 잊어야 했다'(2007)를 그만이 쓸 수 있었소.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4·3 사건의 합동위령제를 다룬 대작 '신화를 삼킨 섬'(2003)을 썼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욱('당신들의 천국')이 정요섭으로 변장하여 제주도로 간 얘기에 다름 아닌 것.

민족적 악업에 대한 자기 정화력이란 무엇이며 치유의 가능성은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 묻고, 있다 라고 스스로 우기는 이 야생 당나귀 모양 고집스러운 키 큰 소설쟁이 이청준이여, 우리의 국민작가 이청준 사백이여.

< 김윤식 |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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