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조선시대 여성 예인들 이야기

맑은물56 2007. 12. 24. 15:23
조선시대 여성 예인들 이야기
 
손병문
 
지금을 엄동지절이라 하는데....
 
정해년 작별이 아쉬운 듯 엄동이란 말이 무색하게 평년보다  춥지 않은 날씨입니다.
  
한 해 동안 좋지 않았던 일들은 잊으시고 좋았던 일들은 추억으로 간직 하시며 며칠 남지 않은 올해를 마무리하고 무자년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올해 계획한 것 가운데 이루지 못하였거나  마음속 깊이 갈구하는 모든 것은 인류의 성인이신 공자나  석가나 예수님께 잘못을 아뢰어 죄를 용서받고 소원을 빌어 응답 받는 구리시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언젠가 아내와 연말을 보내고자 우리나라 절 가운데 제일 높은 곳인 해발 1470m에 지은 태백준령의 망경사에서 새해를  맞아 정동진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어보고자 하였으나 흐린 날씨 때문에 동해시 어판장에서 생선회를 안주로 한잔 술에 마음을 달래며 돌아온 일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대자연 속에 세월을 노래하며 한 평생을 살아간 예인(藝人)들은 아마도 수천 번은 울고 수만 번은 웃어야 할뿐더러 수없이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눈물에도 이별의 눈물,  슬픔의 눈물,  참회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 있다고  합니다.

남존여비라는 유교이념이 확고하였던 조선시대에, 여인들은   친가에서는 이름을 불렀으나 시집을 가면 이름마저 부르지  않고 친정동네 이름을 따서 춘천댁이니 가평댁이니 이런 식으로 택호(宅號)로 부르거나 개똥이엄마니, 소똥이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이 어려서부터 따라야했던 삼종지도(三從之道)란  전통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존속적인 지위나 구실을  표시한 규범 가운데 하나로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라“는 말로 여성 스스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는 일이라야  제사(祭祀)지내는 음식이나  밥을 짓는 일뿐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살다 간 세월은 부권중심(夫權中心)의  유교적 윤리인 삼종지도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계율로 순종과  희생과 포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규범은 평등 인권에 너무도  위배된  현실 이었습니다.

한 점의 따뜻한 마음조차 없는 냉혹한 시어머니가 그렇고  남편의 무시와 냉대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굴욕과 심신에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효부와 현모양처로 살아야 한다는 관습규범의 강박감 속에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괴로워하며 한방(閑房)의 고독과 구속에 대한 탄식과 한(恨)으로 가득한 일련의 시(詩)들이 그들의 가시밭과 같은 생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 런지요.

참으로 개탄스러운 악법이요 노예제도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처럼 여인들에게 비인간적인 조선시대에 여인으로 태어나  언문(言文,한글)은 물론 한문(漢文)까지 배우고 자기만의  이름이나 호나 예명까지 지니고 당당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신사임당, 황진이, 논개, 허초희 같은 여인들입니다,

네 분 예인의 친정본관은 신사임당은 평산申씨, 황진이는 장수黃씨, 논개는 단양禹씨, 허초희는 양천許씨 문중의 딸들로  당대 사대부가 양반집 규수였다는 것입니다.

네 분은 거의  비슷한 시기인 선조임금 때의 분들이며 국가가 혼란하고 외적들의 침략하는 등 어려운 시절에 태어난  분들로 현모양처의 신사임당, 송도삼절의 황진이, 구국열녀 논개,  천재시인 허초희 등 네 분은 오늘날에도 절세가인의  예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특히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허초희 난설헌의  재능이  필자는 더욱 더  안타깝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동생인 난설헌 허초희는 초당두부로 유명한 강릉(江陵)의 한적한  어촌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허엽은 별호가 초당으로 그 호가 마을 이름이 되었습니다.

허엽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서경덕과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워 학문에 일가를 이루고 높은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조강지처와 사별하고 두 번의 장가를 더 갔는데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난설헌의 시문은 당대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조선에서는 규중부인으로서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경계의 대상이요 능멸하곤 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해도 사회에 나갈 수 없었던  시대에 인습과 제도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살았던 선구자 같은 의지는 오늘날 사는 여인들에게 뜻 깊은 교훈과 감명을 줄 것입니다.

황금돼지해도 저물어 가는 이때 구리시민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며 난설헌 허초희의 시한 수로 봄을 기다려봅니다.


春 雨(춘우)

春 雨 暗 西 地(춘 우 암 서 지)              
輕 寒 襲 羅 幕(경 한 습 라 막)             
愁 依 小 屛 風(수 의 소 병 풍)  
墻 頭 杏 花 落(장 두 행 화 락)          


부슬부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에 스며들 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 강릉 초당동 경포호수 옆에 있는 허초희 생가     ©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