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 사당·묘와 유배문학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 이상돈(57) 충북지회장한테 여러 차례 전화를 받았다. ▲지금까지 세계일보에 ‘대한민국 통맥풍수’가 연재되면서 충청북도 경상남도 제주도만 빠졌다는 지적과 ▲충북지역에도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묘소와 유적이 많고, 특히 청주에 ‘기인풍수’가 있으니 취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묘와 사당을 답산하기로 약속한 날. 얄궂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전 국토는 속절없는 막바지 장맛비에 사정없이 난타당했다. 이른 아침 청주를 향해 떠난 고속버스 차창에 후두둑후두둑 굵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청주의 ‘기인풍수’는 올해 73세의 오암 이정훈(李廷勳) 선생이었다. 열두 살 적부터 허리춤에 패철을 차고 남의 묘 자리를 뒤져보기 시작했다는 오암은 괴짜였다. 청주대학 법학과 졸업 후 팔자에도 없는 간척사업에 손댔다가 엄청난 재산 거덜낸 뒤 눈만 뜨면 산에 가 있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살아서는 진천이 제일’(生居鎭川)이고 ‘죽어서는 용인이 제일’(死居龍仁)이라 했는데 송강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 14-1 환희산 중턱에 안식하고 있다. 살아서 좋은 땅에 죽어 묻혔다 해서 나쁠 리 없고, 죽어서 좋다는 곳에 산 사람이 산다 하여 그를 것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시문청호송강정공철지묘’ ‘정경부인문화유씨부좌’라고 한자로 쓰인 묘비에 400여년 세월이 겹겹이 얹혀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87호다.
오암을 따라 입수(入首) 용맥을 재러 봉분 뒤에 오른 충북지회 박문서(50) 송미옥(46) 우덕순(50) 박법순(47) 회원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이 중 송씨는 사주명리에 밝은 여성풍수로 간산길마다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지회장이 나경을 꺼내 들었다.
“신술(서에서 북으로 22.5)에서 경유(서에서 남으로 7.5)로 꺾여 다시 신술로 기복한 용맥 아래 신좌(서에서 북으로 15도) 을향(동에서 남으로 15도)으로 용사했네요. 정동향에 가까우며 속기처(束氣處·만두)도 뚜렷합니다.” 비가 내려 질퍽거리는데도 생룡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굴곡이 매우 급하게 드러난다. 혈처 위의 용맥이 굴절 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오면 사룡(死龍)이라 하여 정혈(定穴)을 않는 법이다. 오암의 판정에 동행인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약간 스쳐 지나가는 과맥입니다. 현재의 묘 자리에서 20m를 올렸거나 70m 아래 청룡 분척(分脊)점에 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다행히 북현무가 중첩으로 둘러싸 혈장의 설기를 막으며 좌청룡을 밀어 줍니다. 대대로 아들 후손들의 벼슬이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고는 박문서씨한테 탐색봉(1.5m 정도의 나사형 굴착봉)을 건네준 뒤 속기처 양편 흙을 깊숙이 파 보라고 한다. 견고해 보이던 땅이 단숨에 꺼지며 쑥 들어간다. 인공으로 쌓아 올린 부토(浮土)인 것이다. 그러나 가운데 오목한 용맥의 지하 70cm 지점에서 윤기나는 마사토가 나온다.
“원래 묘 자리는 자시(23시∼01시)나 축시(01시∼03시)에 찾아야 합니다. 산 주인인 산신과 비몽사몽간의 대화로 점지 받는 곳이 제일이지요.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인데 사람도 살아서는 양기운을 받지만 죽어서는 음기운으로 환원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풍수는 감(感)입니다.”
오암은 요즘에도 깊은 산속에 거적을 깔고 가끔 혼자 잔다고 했다. 젊어서 한창 풍수에 미쳤을 때는 오래 묵은 무연고 묘를 파고 유골과 함께 누워 천지간 운기 이동을 감지했다고 한다. 기가 안 좋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떠밀려 쫓겨나기도 했고, 물길이 좋고 바람이 온화한 곳에서는 마음이 편안해 누런 인골과 단잠을 잤다는 얘기를 지나치듯 한다. 이 지회장이 왜 ‘기인풍수’라 했는지를 비로소 알 듯싶다.
송강 묘를 내려오며 오암이 신술(서에서 북으로 22.5도)→경유(서에서 남으로 7.5도)→곤신(서에서 남으로 37.5도)→정미(서에서 남으로 72.5도) 방향으로 각(角)을 이루며 내려오다 용맥이 멈춘 곳에 올라선다. 나경을 놓고 꼼꼼히 살피면 활처럼 굽어지며 감아 도는 내청룡 자락이다. 만궁형으로 120도 이상을 번신하며 만두를 형성하는 자리가 바로 천룡(賤龍) 혈처로 형제 간에도 양보 않는 자리라 하지 않던가.
“송강 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자리를 잡아 후손들이 이장한 터입니다. 우암이 누구라고 아무데나 택지했겠어요. 아마도 당판 아래 큰 자리는 먼 후손들의 끊임없는 발복을 위해 남겨둔 자리 같습니다.”
묘 왼편에는 송강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 우암이 주선하여 이곳 진천 땅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로부터 충북지역에 연일 정씨 세거(世居)가 형성되며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사실은 사당 자리가 더 큰 명당입니다. 좌측이 약간 허약한 듯싶으니까 청룡쪽 가까이에 처마를 당겨 짓고 화강암으로 이어지는 뒤편 진혈맥(眞穴脈·응기석)을 우측으로 치우쳐 놓았어요. 땅의 솟음(突)과 꺼짐(陷)을 절묘하게 활용한 안목입니다.”
진천군청 문화체육과 김주철(39)씨 안내로 사당 댓돌 위에 올라선 오암이 앞에 보이는 물길을 살펴보잔다. 얼핏 당문파(일직선으로 빠져 나가는 물길)인 듯싶으나 좌우의 산자락이 지(之)자로 겹쳐 파구가 안 보인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팔짱을 엇비껴 안은 듯 유정하기 이를 데 없다. 활짝 웃는 송강의 영정이 낯설어 김씨에게 물으니 “송강 후손 5대의 사진을 컴퓨터로 합성해 문중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먼 선조의 모습을 알 길 없을 땐 기발한 착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송강기념관 건너편에 ‘사미인곡’을 옛 글로 적은 시비가 있다.
필자는 송강 묘 취재를 위해 진천을 두 번 다녀왔다. 첫 행보 때 찍은 사진이 폭우와 운무로 인해 식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는 그의 기구한 팔자와 인생역정을 반추했다.
후세인들은 송강을 걸출한 시인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암행어사 관찰사(도지사) 대사헌(검찰총장) 좌의정(부총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당대의 뛰어난 정객이었다. 한 사람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인생은 결코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주변여건이 생사고비로 다가오는가 하면, 고난에 찬 좌절의 귀양살이가 한 나라의 가사문학에 금자탑을 쌓는 역사적 성과로 반전되기도 한다.
▲유년시절의 송강은 유복했다. 큰누이가 제12대 인종의 귀인이었고 작은 누이는 계림군(성종의 아들 계성군 양자) 부인이어서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덕분에 후일 명종(제13대)으로 등극하는 경원대군(문정왕후 아들)과 벗이 되어 부러움 속에 자랐다.
▲그러나 한 가문은 물론 국가의 영고성쇠와 기복부침(起伏浮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가문의 융성일 줄 알았던 왕실과의 혈연이 몰락으로 급전되고 만다. 친구였던 경원대군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 매형 계림군은 거열형(車裂刑)으로 참혹하게 찢겨 죽고 형은 곤장 맞아 세상을 뜨고 만다. 어린 송강은 유배길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7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풀린 부자는 세상과 절연하고 선산이 있는 전남 담양에 와 10년을 살았다. 새옹지마라 할까. 송강은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당대 석학을 만나 학문의 깊이를 천착(穿鑿)하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도 교유하여 인적기반을 넓힌다. 결국 이것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된다.
▲그는 서인의 영수로 정계에 우뚝 서 동인의 정치생명을 끊어 놓았는가 하면 동인의 탄핵으로 파직, 복직, 귀양살이를 여러 차례 거듭하기도 했다. 호방하고 숨김없는 성품에다 과한 술이 병이었고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임금에게까지 미움을 사 관직을 내놓고 낙향을 네 번이나 했다.
▲사람 팔자란 아무도 단언 못할 일이다. 송강은 벼슬에서 물러나 유배길에 있을 때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개인의 불행이 국가적 유산으로 남아지는 전화위복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 같은 유배문학의 자취는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서계 박세당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 비하하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단가 등이 주로 낙향과 귀양살이 시절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사당 입구 신도비 앞에는 우암이 터를 잡아 주고 잠시 쉬면서 꽂았다는 지팡이가 살아 거목이 되어 도 보호수로 잘 자라고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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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영정. 후손 5대의 사진을 모아 합성한 것이다. |
청주의 ‘기인풍수’는 올해 73세의 오암 이정훈(李廷勳) 선생이었다. 열두 살 적부터 허리춤에 패철을 차고 남의 묘 자리를 뒤져보기 시작했다는 오암은 괴짜였다. 청주대학 법학과 졸업 후 팔자에도 없는 간척사업에 손댔다가 엄청난 재산 거덜낸 뒤 눈만 뜨면 산에 가 있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살아서는 진천이 제일’(生居鎭川)이고 ‘죽어서는 용인이 제일’(死居龍仁)이라 했는데 송강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 14-1 환희산 중턱에 안식하고 있다. 살아서 좋은 땅에 죽어 묻혔다 해서 나쁠 리 없고, 죽어서 좋다는 곳에 산 사람이 산다 하여 그를 것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시문청호송강정공철지묘’ ‘정경부인문화유씨부좌’라고 한자로 쓰인 묘비에 400여년 세월이 겹겹이 얹혀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87호다.
오암을 따라 입수(入首) 용맥을 재러 봉분 뒤에 오른 충북지회 박문서(50) 송미옥(46) 우덕순(50) 박법순(47) 회원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이 중 송씨는 사주명리에 밝은 여성풍수로 간산길마다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지회장이 나경을 꺼내 들었다.
“신술(서에서 북으로 22.5)에서 경유(서에서 남으로 7.5)로 꺾여 다시 신술로 기복한 용맥 아래 신좌(서에서 북으로 15도) 을향(동에서 남으로 15도)으로 용사했네요. 정동향에 가까우며 속기처(束氣處·만두)도 뚜렷합니다.” 비가 내려 질퍽거리는데도 생룡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굴곡이 매우 급하게 드러난다. 혈처 위의 용맥이 굴절 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오면 사룡(死龍)이라 하여 정혈(定穴)을 않는 법이다. 오암의 판정에 동행인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약간 스쳐 지나가는 과맥입니다. 현재의 묘 자리에서 20m를 올렸거나 70m 아래 청룡 분척(分脊)점에 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다행히 북현무가 중첩으로 둘러싸 혈장의 설기를 막으며 좌청룡을 밀어 줍니다. 대대로 아들 후손들의 벼슬이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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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의 환희산 중턱에 있는 송강 정철 묘. 우암 송시열이 사당과 함께 잡아 준 터로 또 다른 명당이 좌청룡 내룡맥에 있다. |
그러고는 박문서씨한테 탐색봉(1.5m 정도의 나사형 굴착봉)을 건네준 뒤 속기처 양편 흙을 깊숙이 파 보라고 한다. 견고해 보이던 땅이 단숨에 꺼지며 쑥 들어간다. 인공으로 쌓아 올린 부토(浮土)인 것이다. 그러나 가운데 오목한 용맥의 지하 70cm 지점에서 윤기나는 마사토가 나온다.
“원래 묘 자리는 자시(23시∼01시)나 축시(01시∼03시)에 찾아야 합니다. 산 주인인 산신과 비몽사몽간의 대화로 점지 받는 곳이 제일이지요.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인데 사람도 살아서는 양기운을 받지만 죽어서는 음기운으로 환원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풍수는 감(感)입니다.”
오암은 요즘에도 깊은 산속에 거적을 깔고 가끔 혼자 잔다고 했다. 젊어서 한창 풍수에 미쳤을 때는 오래 묵은 무연고 묘를 파고 유골과 함께 누워 천지간 운기 이동을 감지했다고 한다. 기가 안 좋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떠밀려 쫓겨나기도 했고, 물길이 좋고 바람이 온화한 곳에서는 마음이 편안해 누런 인골과 단잠을 잤다는 얘기를 지나치듯 한다. 이 지회장이 왜 ‘기인풍수’라 했는지를 비로소 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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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사 앞에 선 충북지회 회원들. 왼쪽부터 이정훈 선생, 이상돈 지회장, 박문서씨, 송미옥씨. |
송강 묘를 내려오며 오암이 신술(서에서 북으로 22.5도)→경유(서에서 남으로 7.5도)→곤신(서에서 남으로 37.5도)→정미(서에서 남으로 72.5도) 방향으로 각(角)을 이루며 내려오다 용맥이 멈춘 곳에 올라선다. 나경을 놓고 꼼꼼히 살피면 활처럼 굽어지며 감아 도는 내청룡 자락이다. 만궁형으로 120도 이상을 번신하며 만두를 형성하는 자리가 바로 천룡(賤龍) 혈처로 형제 간에도 양보 않는 자리라 하지 않던가.
“송강 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자리를 잡아 후손들이 이장한 터입니다. 우암이 누구라고 아무데나 택지했겠어요. 아마도 당판 아래 큰 자리는 먼 후손들의 끊임없는 발복을 위해 남겨둔 자리 같습니다.”
묘 왼편에는 송강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 우암이 주선하여 이곳 진천 땅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로부터 충북지역에 연일 정씨 세거(世居)가 형성되며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사실은 사당 자리가 더 큰 명당입니다. 좌측이 약간 허약한 듯싶으니까 청룡쪽 가까이에 처마를 당겨 짓고 화강암으로 이어지는 뒤편 진혈맥(眞穴脈·응기석)을 우측으로 치우쳐 놓았어요. 땅의 솟음(突)과 꺼짐(陷)을 절묘하게 활용한 안목입니다.”
진천군청 문화체육과 김주철(39)씨 안내로 사당 댓돌 위에 올라선 오암이 앞에 보이는 물길을 살펴보잔다. 얼핏 당문파(일직선으로 빠져 나가는 물길)인 듯싶으나 좌우의 산자락이 지(之)자로 겹쳐 파구가 안 보인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팔짱을 엇비껴 안은 듯 유정하기 이를 데 없다. 활짝 웃는 송강의 영정이 낯설어 김씨에게 물으니 “송강 후손 5대의 사진을 컴퓨터로 합성해 문중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먼 선조의 모습을 알 길 없을 땐 기발한 착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송강기념관 건너편에 ‘사미인곡’을 옛 글로 적은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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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뒤 산신석에서 본 내룡맥. 양 옆은 부토이나 중앙 혈맥이 뚜렷하다. |
필자는 송강 묘 취재를 위해 진천을 두 번 다녀왔다. 첫 행보 때 찍은 사진이 폭우와 운무로 인해 식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는 그의 기구한 팔자와 인생역정을 반추했다.
후세인들은 송강을 걸출한 시인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암행어사 관찰사(도지사) 대사헌(검찰총장) 좌의정(부총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당대의 뛰어난 정객이었다. 한 사람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인생은 결코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주변여건이 생사고비로 다가오는가 하면, 고난에 찬 좌절의 귀양살이가 한 나라의 가사문학에 금자탑을 쌓는 역사적 성과로 반전되기도 한다.
▲유년시절의 송강은 유복했다. 큰누이가 제12대 인종의 귀인이었고 작은 누이는 계림군(성종의 아들 계성군 양자) 부인이어서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덕분에 후일 명종(제13대)으로 등극하는 경원대군(문정왕후 아들)과 벗이 되어 부러움 속에 자랐다.
▲그러나 한 가문은 물론 국가의 영고성쇠와 기복부침(起伏浮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가문의 융성일 줄 알았던 왕실과의 혈연이 몰락으로 급전되고 만다. 친구였던 경원대군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 매형 계림군은 거열형(車裂刑)으로 참혹하게 찢겨 죽고 형은 곤장 맞아 세상을 뜨고 만다. 어린 송강은 유배길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7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풀린 부자는 세상과 절연하고 선산이 있는 전남 담양에 와 10년을 살았다. 새옹지마라 할까. 송강은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당대 석학을 만나 학문의 깊이를 천착(穿鑿)하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도 교유하여 인적기반을 넓힌다. 결국 이것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된다.
▲그는 서인의 영수로 정계에 우뚝 서 동인의 정치생명을 끊어 놓았는가 하면 동인의 탄핵으로 파직, 복직, 귀양살이를 여러 차례 거듭하기도 했다. 호방하고 숨김없는 성품에다 과한 술이 병이었고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임금에게까지 미움을 사 관직을 내놓고 낙향을 네 번이나 했다.
▲사람 팔자란 아무도 단언 못할 일이다. 송강은 벼슬에서 물러나 유배길에 있을 때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개인의 불행이 국가적 유산으로 남아지는 전화위복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 같은 유배문학의 자취는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서계 박세당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 비하하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단가 등이 주로 낙향과 귀양살이 시절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사당 입구 신도비 앞에는 우암이 터를 잡아 주고 잠시 쉬면서 꽂았다는 지팡이가 살아 거목이 되어 도 보호수로 잘 자라고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사랑과 우정의 교차로
글쓴이 : 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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