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화엽
-.발행처 : 도서출판 '창작과 의식'
-.정가 : 7.500 원
[해설]
*풀냄새 진동하는 언어의 기교
/박세문(창작과 의식 발행인, 시인)
시인을 접한지 그러고 보니 4년, 횟수로 말하면 5년이지만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탓이라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실實과 허虛를 찾아야만 했다. 이화엽 시인의 첫 시집 『바닥』을 일독하기 전 나 자신과 우리들이 우선 알아야 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다. 어제와 오늘을 접목하는 기발하고도 순발력 있는 언어에 미각과 촉각, 그리고 시각이란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려우면서 미각이 뛰어난 문장문장 마다 파고든 가슴 일부에서 지워지지 않는가 하면 섬뜩하리 만큼 예리한 시어가 폐부 한 켠에서 점 하나로 낙인되어 독자들로 부터 끌어들임이 있다는 것이다. 유년의 마당은 온통 자폐를 앓는 기형의 언어 투성이다. 외로움이나 소외로만 치부하기에 시인은 그곳에 앉아 셀 수도 없는 가짓수의 언어를 품어다 문장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시도 쓰면서 꿈을 키워나간다. 밖으로 떠난 사람들과의 단절, 그들은 나의 기호들을 장난으로 여겼으며 난해하다는 문장들은 일상과 무수한 괴리를 틀어댔다. 시인에게 유년은 곧 문학이었을 뿐이고 마당은 그에 관한 요소들의 뿌리가 박힌 탐색의 장이었으며 꿈의 정체성이었다.
시인의 마당을 보니 언뜻, 《가끔 등뼈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얼굴하나/》라는 -김기택/곱추-의 구절이 생각난다. 매일 그 자리에 나와 걸식을 일삼는 구부러진 노인의 비상구는 과연 절망의 나락에서 닫혀만 있었을까, 저들은 주인이고 나는 노예라는 강박관념을 노인은 본능처럼 지녔을지 모르나 내부에 존재했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지독한 자신의 부정속에서 움찔대는 것, 살아남아야 하는 투지는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을, 인간의 참된 성을 이루려는 꿈, 바로 변증법을 그의 삶에 인용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어느날 껍질을 깨고 우렁찬 그 무엇이 노인의 등속에서 나와 줄 것을 시인은 유년의 마당을 경험했기에 그가 사라져 갔음의 의미를 실감했는지 모를 일이다.
마당은 그런대로 백지의 공간이었다
수장되는건 때때로 욕망을 쏟아붓는 햇빛도 아니요
속도 추스리지 못한 바람은 어쩌다 와서
잎사귀만큼 제몸을 풀어놓고 달아날뿐
체온이 식지않은 이마와 손톱이 꿈을 지탱한다 아니다
벗어두고간 저들의 허물도 생의 일부,입안으로 고여든다
공간이 있으므로 정물은 존재하나보다 한사코
날아오르지 못하는 호흡과 끼니
부딪히고 으스러져, 존재란 바닥으로부터 자라는것이 아니라
하늘을 품으려 자꾸 균열한다는 진리를 발견했지
시간이 저물도록 돌아오지않는 사람들 대신
입자가 제법 영근 화창한 생의 오후를 골라 옷속에 접어놓고
나이를 긁었던가 울먹울먹 세월이 자라가고 있었다
그의 기억밖으로 걸어가야할 날이 엄습해 온다
띄엄띄엄 걷는일은 두려움이었으며 이제부터 그들을 떠나는 일은
더더구나 위험했다 어지럽다
왜 눈섭까지 괴어오던 본질을 마당속에 묻어두고 왔단말인가
머리칼과 일인칭 정물과 깨지지 않던 공간밖의 고정관념
이미 커버린 다음에야 생각의 바다를 멀리까지 본다
머리위에 달린 하늘의 무게를 삼켜본다
그렇게 유년을 지나왔다
-작품 '유년의 마당' 전문-
진정 노을처럼 떠돌아 저녁을 맞던 나는 패배했다라고 자학했던 시간의 하루, 난해하다는 이유로 상처가 깊다는 설명만으로 문장을 들여다 보아주지 않던 마당밖의 사람들,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히 혼자였을 저들보다 시인은 그래도 노을을 등에지고 문학의 허구를 꿈꾸진 않았을 것이다. 마당은 그런대로 치열했고 그래서 아픔과 상처가 동반된 문학이었다. 욕망을 쏟아붓는 햇빛과 바람의 유형은 화자와 불균형을 갖춘 부조하 속의 조화이기도 하다. 적나라한 묘사가 오히려 걸리는 부분이긴 하나 여기서 속도 추스리지 못한 바람은 잎사귀 만큼 제 몸을 풀어놓았다의 행간의 어미로서 서술격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입안으로 고여든다는 표현은 짤막한 바람과 욕망의 햇빛도 생을 같이 누려보고픈 싯적 화자의 간절한 애원일 수 있다. 좀더 관념적인 언어나 형상화된 이미지 구현은 현실성과 타협해 보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있고 자꾸만 움추려 드는 형상들이긴 하나, 역설로 보여지지 않는 삶의 불편한 막을 한 장 두 장 거두어 내려는 시인의 안간힘을 경험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체성으로 접근하기란 작가가 짚어내는 주제의 전달을 어떻게 독자는 받아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구체화란 각자의 독자가 판단내린 감각이다. 때로 이미지란 독자개인이 누리고 있는 삶의 시각에서의 분석이고 접목이라고 본다. 과연 내면에 감추어진 삶의 열정이나 일상의 치밀함과 섬세함의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직설적인 논리로 전제해 달라는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어디까지 작가는 시를 뜯어 분해해야 된단 말인가, 우울한 상처는 혼자 지내온 마당과 뼈들의 부딪침은 자의든 타의든 소외의 공간안에서 침묵하는 인연들과 만나 고통해야만 하는 유년이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상처와 우울은 날아오르지 못하는 언어나 끼니마다 불편하게 호흡되어지는 시간은 시인만의 고민일까, 따라서 어른이 된 지금도 떠나갔던 마당밖의 사람들은 충분히 낯설고 소통이 부자연스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도시와 건물도 이에 속한다고 보여진다. 이는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괴리지만 유년을 지나와서 생각하니 삶은 상처였으나 마당에서 자란 문학은 이를 치료할만한 유일한 단서가 되어 주기에 충분하다.
너의 몸에선 언제나 풀즙이 묻어났어 그러다가
연못위에 가지런히 떠다니는 수초였단다
들어가 이끼와 같은 살갗으로 표류하고 싶었단다
나는 아무길에서나 거침없이 피다 잘린 고장난 날개였어
이대로 너의 연못에 내 가슴이 옮겨가면
푸른잎은 낡은 소문이 끼고 물은 흐려져
그나마 친구 지느러미조차 말라갈까
너의생각은 내가 아니어두 아니어서,
오히려 소리는 물방울무늬의 피아노
-작품 '다시, 낙엽이 된 나무' 부분-
말 할 것도 없이 시인의 시는, 삶은 온통 풀냄새다. 뿌리부터 몸의 전체가 단색인 풀의 유형을 상식처럼 실감할 수 있으나 달리 살아가는 표현의 행간마다 고단한 언어의 기교들을 만나기에 이른다. 아무 길에서나 피어나다 잘리고 보니 자주 고장나는 날개, 누군가에게 다가가 연약한 자신을 내려 놓고 싶으나 다다른 연못엔 풀보다 빼어난 수초의 삶이 그녀의 열등감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 다가가 타협하지 못하는 건 시인의 자학이고 이는 결국 무수한 언어의 이끼를 태동시키기에 이른다. 그래도 꿈꾸는 시인은 날마다 언어의 친절을 연못에 옮겨놓고 자신도 수초처럼 빼어난 면모를 닮으려 한다. 숨막히는 문장의 뿌리를 연못에 담그면 좀더 시간은 간단한 표면위로 떠올라 안도감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해서다. 반면 문학의 정체성은 기정된 사실속에서 또한번 엿듣는 생명의 희구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물을 만지면서 물방울 무늬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희망이다, 푸른잎이 번져 나가는 건 점점 그가 살찐 푸른색으로 문학을 소문내고 싶은 현상이다. 기초공사 부터 단단한 철근으로 메꾼 건물과 간판은 그녀가 배워 온 마당의 언어가 아님으로, 언제나 그들은 그녀에게 단적으로 위협이거나 공포였다. 기억을 풀고 거기 가만히 들어가니 추억이라는 위로가 앉아있다. 그래서 계절의 속도를 자박자박 걸어간다. 벤취와 커피 때로는 마농레스꼬의 처절한 인생을 겻들여 시인은 좀더 인생을 씁쓸하게 마시기도 한다. 언제나 소식처럼 너를 부르고 있다라고 진술한다. 아버지였을까......
해지기전, 이슬 차게 무릎 덮기전에 그보다
그가 여백의 아침을 놓고 사라질지 몰라
잠 한숨 뒤척이기나 했을까 철없이 텃밭을 지나와 질끈
그대 뒤 따르면 기필코 배고플텐데 그래도 나는 즉,
당신이 이유였어 그곳에 주저 하고 있으라 한 뼘 두뼘
시간을 세지 말어라 도도한 당신이여
오만한 햇살만큼 눈 부릅떠라
거기 머물러 있으라
내가 기어코 간다
-작품 '단풍잎이 보낸 온 전갈' 부분-
견디는 햇빛과 이슬의 중심에 서서 바닥은 무릎을 세운다. 제발 관계하는 대상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거나 추구하는 것들의 모호함이 이해되기를 바란다. -그가 여백의 아침을 놓고 사라질지 몰라-의 인용처럼 살고있는 텃밭의 냄새가 관계 안에서도 비롯되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모든 것은 왜 그렇게 낯설기만 할까, 그래서 주저앉아 모든 것은 시를 통하여 맺어두는 시인의 비상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어코 저들이 분석되어지고 인연이 되는 날, 햇살보다 더 눈 부릅 떠 오만해질 수 있다고 소외의 그늘에서 그렇게 오늘도 언어를 키우는 시인이 아닐까 한다. 시인의 내면에 고여있는 기억의 기류들을 꺼내 만져보면 사뭇 전류가 흐르기도 한다. 그건, 시인을 건드리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심장의 물이 뜨겁다기 보다 얼음처럼 차고 시리다. 시가 이루고저 하는 정신의 질서는 햇빛과 바람의 적당한 온도에 구워 말린 고루한 무게가 아니다. 때론 詩라는 물질이상의 형태는 어쩌면 무수한 희노애락의 다툼속에서 상처의 두드러지기다. 아울러 詩란, 문제제기로 인한 정체성 구현의 안위와 조화라면 아이러니한가, 시인의 언어는 고루한 평행선을 벗어나 있다. 정리정돈이 잘 된 포장도로거나 고층건물을 순식간에 오르려는 승강기에 놓여있질 못하다. 어딘지 세련되지 못하고 어눌하기까지한 삶의 밀도가 그렇기도 하거니와 환경적 요소에 의해 미리부터 겁을 내고 한층 세상으로 부터 비껴 앉은 시인의 용기없음이 늘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러나 스스로 이를 소외의 그늘이라 치부하고 그러한 자리매김은 다분히 자위로서 터득한 삶의 실마리다. 그러므로 시인이 주저 앉은 바닥은 생산성을 의미한다. 씨앗을 발아하고 흙으로 빚은 아버지의 언어를 이땅의 모든 생명이라 하는 자연의 개체들의 지배자로서 타당성을 제시한다. 날마다 땅만 보고 걷는다는 시인에게선 도무지 희망의 냄새가 없다. 절대 하늘위에 걸려있거나 바람타고 저절로 달려 오지 않는다는 절망같은 희망은 시인의 바닥에서 부터 고집으로 남는다. 지금 시인의 나이만큼 시간을 키워놓고 보니 아버지의 언어는 충분히 땅의 고정관념을 뚫고 의미를 확대해석 하기에 이른다. 오직 씨앗의 움트고 자라 열매맺는 과정을 아버지는 시인의 가슴의 골을 일일히 파고 이양시켰으며 흙을 고이게 했을 뿐이다.
새벽부터 저녁동안 소유와 거짓이 없는,
비록 가난하였으나 소처럼 순한 밥과
시간이 무리지어 노닐고 있을
아버지의 마당에 서서 마침내 추위를 벗을거야
꺾이고 부러진 계절의 끝
봄의 서두
차곡차곡 혼돈이 없는 당신의 밭에 심어 주겠지
-작품 '씨앗1' 부분-
시인의 이미지는 산만하다. 캄캄한 동굴안에 갖혀 버리고 조난을 당했다는 억울한 호소를 가끔 하기도 한다. 땅 아래 흙을 뚫고 들어가 이미 갖혀버린 자신은 죽음과 같은 체험에 생각을 투신하기도 한다. 귀를 막고 눈을 감지 않아도 소리는 잃어버렸다, 자위다. 듣지 않고 보지 않음으로 태초의 발아를 꿈꾸려는 의식의 땅에 시인의 발이 묻혀있는 것이다. 누가 시인을 캐다 땅위로 솟게 했는가, 물론 시인의 땅은 아버지로 인해서 일구어진다. 몸은 아버지로 구성되어 있다. 땅위로 솟고보니 온통 아버지의 소리만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비롯된 언어는 땅과 그리고 태초의 바닥은 시작의 개념으로 일맥상통하기에 이른다. 누구보다도 귀향을 꿈꾸는 시인이다. 무수한 소문과 문명의 이기가 복합된 구조는 그녀의 몸에 맞지 않는다. 스스로가 아니라 그들의 용의주도한 색채는 아버지의 양식만 먹고 자란 세포와 분자엔 변화된 식사다. 어쩌다 강요된 외출을 위하여 차려 입노라면 그 어색하고 촌스러움이 서글프기까지 하므로 그녀가 경험한 흙으로 다시 씻어 내야 할 이유다. 그래서 시인의 사색은 아버지의 집 변소뒤에 무작위로 자라는 담쟁이를 내세우기도 하고 호박 텃밭에서 게으르게 뒹구는 달팽이의 느린 사색을 자주 곱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변명과 주장은 퇴색한 가을 나뭇잎의 가벼움이 아니다. 오히려 낡은 것에 대한 예찬은 십구세기말 음침한 벽장안에서 오래 묵혀둔 포도주를 꺼내 제 몸을 데우는 은둔의 작가를 연상케 한다.
도시도 겨울도 우린 이미 벗어버렸다
어디론가 흘러와 있던 어제의 이름들
참으로 오래오래 걸어서 왔노라
그래도 난감하다 불이 꺼져 있었으므로
계단으로 오르는 입구조차 도시를 거부하는가
마을에 도착하고보니 완벽하게 갖힌자의 권리
지붕을 뚫고 닳아오르던 비, 단내가
훅 훅 나던 공기와 햇빛이라 했다
당신의 마을엔 포장도로가 없고
턱시도가 구워 낸 원두커피조차 끓지 않았으나
탁자마다 오십년전 깐소네와
건더기가 흥건한 육수가 윤기나게 흘렀지
플러그가 없는 등불을 내어걸고 이제,
-작품 '낡은 것의 관한 예찬' 부분-
전부 버려야만이 바닥에 이를 수 있다. 이로 인해서 숨어들기가 아닌 시인의 詩는 모두 드러내기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포장도로와 턱시도, 그리고 원두커피로 하루를 위장하고 배부름의 원리에 길들여진 껍질의 찬사에만 놓여있을 이 시대의 우울이여! 그곳에 아직도 발을 담그고 몸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인간군상의 표상이 바로 우리들의 현주소 아니겠는가, 진정 시인의 마을엔 틀니보다 헐거운 기억의 집이 존재한다. 켜 둔 등불아래 시인의 노래는 사뭇 전설이거나 추억이기에 피로했던 하루가 휴식으로 저당 잡힌다. 또 다른 어둠을 이마에 지피고 사랑의 상처를 마을 입구에서 부터 맡았던 그 자유라는 것은 사뭇 가난했으나 오만했다/태엽을 감아주지 않아도 돌아가던 시계 기록이 없어도 천장마다 바닥마다 언어의 심장은/물컵과 부러진 비스킷 김 조각따위 위로 떠돌다 사색의 부스러기가 되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기호중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있었다 그는 묻고 있었다 왜 왜 의미가 사라진다 느낌표가 주눅이 들고 다시 물음표조차 없는 교과서는 파르르 경련처럼 머릿말 부터 호흡이 가쁘다 친구의 아버지가 교과서 대신 무릎을 꿇고 깃발처럼 펄럭이는 그녀의 톱날앞에 수사법을 설명하고 있다 명사와 느낌표와 그리고 그녀의 옷자락을 깃대처럼 부여 잡는다 다시 그녀가 후적후적 복도를 걸어 교무실로 간다 나는 그녀의 톱니처럼 날카로운 치맛속을 무심코 보게된다 걸레질을 당한 바닥에 무릎으로 기어기어서 결국은 그녀의 어두운 대륙을 발견한다. 그녀의 바닥은 컴플랙스다
-작품 '바닥' 부분-
바닥은 시인에겐 간혹 열등감이었다. 그래서 밑으로밑으로 아래로아래로 한없이 구덩이를 파고 무릎을 굽혀 들어간다. 어린시절 학교는 시인에게 전쟁터의 화약고처럼 공포이상의 두려움이다. 선생님은 교탁위에서 자신을 위한 정물화만 그려내라 요구한다. 그것이 비틀어지거나 아니, 그리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입술에 담아놓은 화약이 순식간에 폭발한다. 교실문은 자주 닫혀있고 그곳에 시인의 오기와 고집이 갖혀 지낸다. 그러다 발견한 프로이드, 바로 자신의 열등감을 교탁위의 정물화가 정확히 온 몸에 덕지덕지 칠하고 다녔던 것이다. 모든 정신의 바닥은 무의식으로 부터 일어난다.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시 재수정하는 작업이 詩가 아니라 스스로 자아속에 군림하고 앉아 깨고 부수어서 일궈낸 근본의 자질을 詩, 혹은 문학이라 규정짓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무심코 보게되는 무의식의 단서들은 시인의 사고에 수집되어 결코 자유롭지 않다거나 혹은 무한대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건 시인의 욕구로 부터 발아된 형이상학적 언어의 주술에 의해서다. 좀더 그의 우물을 열고 감상을 빠트린다면 침잠의 세계는 더욱 이미지와의 어울림이리라. 그렇게 해서 바닥은 열등감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다시 한 번 진술하는 시인이다. 그러나 극복의 단계는 누구나 다르다. 시인의 고집은 결국 세월의 형상을 따다 걸어두고 이미지의 유화를 찍어내는 시인의 밭에 우리모두 웅크리고 앉아보자. 이미지는 다소 난해하기도 하나 바닥과 프로이드의 조화로 구색이 잘 갖춰진 무의식의 옷 한 벌을 건질 수 있다. 그건 자연의 유화이기도 하다. 시인의 영감이 오늘도 바다로 산으로 혹은 고향으로 범벅이 되어 죽죽 흘러내린다. 그렇게 바닥에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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