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시대에서

[스크랩] 들꽃이야기 - 안승갑선생에 대한 추억

맑은물56 2014. 2. 10. 12:36

들꽃 이야기 -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안 초근(장녀) 지음

 

어렸을 적

멀리 남으로 가는 하얀 신작로에는 민들레며, 제비꽃이 피고 있었다.

 

누각처럼 높은 마루 위에 앉아

고사리 손을 쥐고

나의 아버지는

슬프도록 고운 얘기를 들려 주셨다.

 

지금에사 그것이

있을 듯 없을 것 같은 얘기였음을 안 나는

그토록 빛나는 옛날을 마련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존경하고

하느님 같이 사랑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것 다 몰라도 좋으니

이슬보다도 곱고 애틋한 이야기만을

내게 들려 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아버님에 대한 추억을 쓴 최초의 시이다.

내가 아버님에 대한 얘기로는 맨 처음 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겨울 제삿날이었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어머니는 제사 음식을 만들고, 어른들을 따라 온 조무라기들과 나를 아버님은 넓은 들녘이며 개울이 바라다 보이는 사랑채 마루에 모아 놓고 양지 쪽에 걸터 앉아 나의 손톱을 깎아 주며 슬프도록 고운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 애닲은 얘기들이 ‘성냥팔이 소녀’와 ‘행복한 왕자’와 ‘윌리암 텔’이었음을 나는 20여년이 지난 후에사 알게 되었다.

위 이야기와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준 아버님에 대한 감동은 일생동안 매우 소중하고 찬란한 추억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냥팔이 소녀와 행복한 왕자 이야기에서는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사랑을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의 슬픔과, 슬픈 인생의 아름다움을, 윌리암 텔에선 의로움과, 당당함과, 혁명가나 독립지사의 기개와 용감성,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배웠다.

나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남들에게 늘 ‘큰오빠’ 이야기를 하는 고모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 당시 군속으로 남양군도에 가 있는 아버님을 본 적이 없다. 뒷꼍 맑은 물이 자직자직 배어 나오는 시원하고 작은 동굴을 김칫광으로 쓰게 하려고 큰오빠가 파 놓았다는 고모의 얘기를 듣고 그 시원한 동굴이 좋아서 동무들에게 자랑을 하며, 이건 우리 큰오빠가 파 놓은 거라고 아버님인줄 모르고 큰오빠라 부르며 자랐다.

그 아버님은 내가 여섯 살이 되어서야 노랗게 쉰 머리에 초췌한 빈몸으로 귀국하였다. 그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들어 밤 늦도록 이국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하였다.

아버님은 어려서부터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놓고 한글과 지식 교육은 물론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사찰계 형사에게 추적을 당하였으므로 피신차 충북 음성군 금왕면 전작기수로 갔다. 거기서도 주민들에게 생활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면서도 단합하면 안 될 것이 없음을 암시하며 요시찰 인물인 모인사와 내통하여 다시 미행 추적당하자 이를 피해 남방 군속에 지원하여 포로감시업무를 담당하였다.

일본군은 군사 훈련을 혹독히 시키고 민족적 모욕과 학대를 하고, 민간인 대우를 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자바에 도착하여 포로감시 업무를 하는 중 일본에 반항하는 군속들은 강훈련으로 재교육시켰다. 당시 재교육 합숙을 통해 뜻이 맞는 동지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하였다. 이때 과격한 사람은 다른 나라로 탈출하다가 체포 또는 살상되었다.

열혈에 찬 사람은 유서를 써 놓고 짚차와 기관총을 탈취, 닥치는 대로 일본 사람을 사격하여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전쟁터로 만들어 놓았다. 반역자의 밀고로 고려독립청년당 동지들은 제각기 전속 체포당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언쟁 한 마디 하는 적이 없었던 아버님의 원대한 지성과 침착성은 늘 성급한 이들을 타이르고 지모로 적을 이기고자 했다.

아버님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였고, 광복되자 연합군에 의해 일본인과 함께 전원 전범으로 투옥되었으나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것일 뿐 한국인 군속들은 오히려 일본으로 인한 피해자라고 탄원하여 무죄석방은 되었으나 병들고 지닌 것 없이 6년만에 귀국하였던 것이다.

이 남방에서의 독립운동사는 일본인 학자 우쓰미 아이코와 무라이 요시노리 두 교수의 약 4년 동안의 추적 심방 조사 끝에 이루어진 역작으로, 대왕사 간행 성신여대 이 현희 교수 번역인 ‘적도 하에서의 한국인의 항일 투쟁’이나 같은 작품을 백 남철씨가 번역하여 국문사에서 간행한 ‘적도에 지다’에 드러나 있다.

그 전까지는 만주나 상해, 그리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만 알려지고 지금도 사실상 국민들이 남방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은 고려립청년당원들이 귀국하기 전에 모임을 갖고 일부는 자신들도 ‘당’을 가지고 귀국하자고 하였으나 ‘독립운동’이란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오로지 순수한 정의심과 애국심 그리고 자주독립의 발로였지 않은가?

국내에는 그렇잖아도 320여개나 되는 정당이 난립해 있다니 우리도 당을 만든다면 숫자만 하나 더 늘려 주는 것 뿐 조국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므로 우린 모두 개인 자격 순수한 마음으로 귀국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정권욕에 차 있었던 몇몇 인사만이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처럼 행세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우국지사였던 이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의 고귀한 정신과 항일 투쟁은 지금까지 묻혀져서 그분들은 하나 둘 저 세상으로 사라져 가서 어둠 속에 잠길 것을 일본인이 조금이나마 밝혀 준 것이다.

이제사 아버님이 써 놓은 이력서를 보고, 또 일본 사람이 쓴 ‘적도에 지다’란 책을 보고서야 아버님이 자바 포로수용소에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하며 네널란드 화가에게서 그림도 배웠으며, 네덜란드 의사에게 서양의학을 배우고, 한국인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고려독립청년당’ 반둥 지부장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조선인민회 반둥 지부장을 하면서 한국인의 권익을 위해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후 반둥대학에서 정치학 공부도 하였다.

귀국 후는 당시 한지의사라고 해서 한방과 양방을 다 취급할 수 있는 의사고시에 독학으로 합격하여 인술을 베풀던 할아버지를 도와 한의학을 배웠다. 그러므로 아버님은 한의학과 함께 네덜란드 내과 의사에게서 배운 양의학으로 궁색하고 무의촌인 시골인 고향을 떠나지 않고 무수한 인명을 살리고 인술을 베풀었다. 그러나, 당신은 과속 트럭에 치어 말씀 한 마디 못하고 약 한첩 못 써보고 의식도 못 차린 채 한창 일할 나이에 명부로 갔고, 그것을 남들이 더 애통해 하였다.

서른 세 살 되던 때는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남들은 트럭에 스피커를 장치하고 예쁜 남녀를 동원하여 선거운동을 하고, 막걸리와 고무신과 돈봉투를 지천으로 뿌렸으나, 아버님은 벽보도 명함만한 모조지에 스탬프로 기호와 이름을 찍어 붙이고, 걸어서 선거운동을 다녔다. 선거운동은 아버님을 출마하라고 간곡히 권유한 청년과 제자들이 자원해서 했다.

낙선하였음은 물론이다. 현재보다도 더 금품공세에 약하고 무지몽매했던 시골이니 선거운동을 해 준 사람들에게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사 준 양말 한 켤레 값까지 모두 합해서 1,500원, 지금 돈으로 15만원 정도 밖에 돈을 쓰지 않았으니 1,500표 득표로 낙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후보자 측에서도 그것은 매우 많은 득표였음을 인정했듯이 물 한모금 대접하지 않은 공정하고 강직한 선거운동이었다. 이는 진실로 그분을 존경하고 흠모한 사람들만의 지지로 다른사람의 몇 천표보다도 더 값지고 당당한 것이었다.

아버님은 어려서부터 주민을 깨우쳤다. 이런 계몽정신과 윌리암 텔의 독립운동가적 정신은 당신을 비겁과 무사안일에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유당 때는 3인 선거 등의 부정선거와 이승만 박사의 독재를 위한 음모로부터 면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의 국가이므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자유당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며, 막걸리 한 잔에 넘어가지 말고 진실로 국민을 위해서 일할 사람을 찍어줘야 한다.”

며 자유당 정부의 언론 탄압과 독재와 부정선거가 옳지 못함을 주민들에게 가르치고 계도한 덕분에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이승만 박사 찬양연설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버님은 정신적 계몽만 한 것이 아니었다. 국정 전반에 대해 건의서를 많이 냈으며 대부분 채택되었다. 인간의 심성도 꿰뚫을 뿐만 아니라 시대나 역사를 보는 눈도 범인보다 몇백년 앞섰기 때문에 경원과 숭배를 받고, 추종을 불허할 선견력과 추진력으로 지역사회에 숱한 업적을 이뤄 놓았다.

예를 들어서 장이 서지 않던 지역사회에 장을 세우고, 강정에 수영장을 개설하여 주민의 편익과 수익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교통불편을 해소하고자 경부선 시목에 기차역을 설치하여 줄 것을 수차례 진정하기도 하였다.

옥포교 가설 일화로, 박대통령 시절 국민학교에 다니던 동생(봉춘)으로 하여금 당시 어린이었던 지만군에게 편지를 쓰게 시켰다. 내용인즉

“지만아, 우리가 수학여행을 청와대로 가 보았더니 참 좋더구나. 우리는 등잔불을 켜고 산단다. 그런데 우리 학교 앞에는 개울이 있어서 비만 오면 학생들이 건너다가 떠내려가 죽고하니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서 다리를 좀 놓게 해 다고.”하는 요지였다. 기실 아버님께서 구술하시고 동생이 받아 쓴 것이다.

그러자 박대통령이 어째 그런 곳에 다리를 놓지 않았느냐고 청원군으로 조사를 시켰다. 내 동생의 편지 때문인 것을 안 옥포국민학교의 교감인 아버님 친구분이 놀라서 쫓아오기도 하였다. 결국 대통령 하사금 등으로 다리는 놓여지고 지만군이 내려 와서 테이프를 끊었다. 그 오지인 시골에 각신문사의 차가 깃발을 달고 날마다 달려 와서 내 동생은 매스컴에서 대스타가 되어 있었다. 물론 면내에서도 칭찬이 자자하고 유명하게 되었다. 단 하루 아침에.

그 다음은 제방공사와, 금강 물을 끌어 들여 밭을 논으로 만들어 밭농사보다 편하고 소득도 높은 벼농사를 하게 수로공사를 했다. 이는 당시 국방위원장 출신인 청원군 국회의원에게 만약 이 두 공사를 해 주지 않으면 국회의원에 당선되도록 도울 수 없고, 그러면 당선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득겸 협상을 하여 그를 통해 막대한 정부 예산을 끌어다가 해 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자기의 땅이 수로로 들어갔다고 하여 아버님께 와서 “누가 그런 것 하랬느냐.”고 행패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주민을 위해 헌신봉사하며 원대한 뜻에 산 아버님은 그런 일로 그만 두거나 상심하는 일 없이 늘 의연하게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다음에는 박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중학교 평준화란 소득수준이 낮은 곳부터 실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엔 중고둥학교가 없어서 자녀를 진학시키려면 40리나 떨어진 대전이나 청주로 통학시키거나 하숙을 시켜야 합니다. 왜 못사는 시골 사람들이 잘 사는 도시 사람들에게 돈을 갖다 줘야 합니까? 그러니 이곳 현도면에 중학교를 설립하도록 해 주시되 교육위원회로 이관하지 마시고 즉결처분해 주십시오.”하고,

그러나 대통령은 계통을 밟아 역시 충북 교육위원회로 설립 가능성과 타당성을 조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군수와 교육감이 아버님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때는 중학교를 지방에 설립하려면 먼저 학교 부지를 주민들이 마련해 놓아야 허가가 났으므로 학교 부지를 먼저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아버님은 피땀 흘려서 마련한 텃밭 수천평(죽전리 529 주변)을 학교 부지로 희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옆에 고압선이 지나간다고 채택되지 않자, 다시 먼데 있는 밭(광림기계 옆 죽전리 57번지)을 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면사무소 옆에 가게를 갖고 있던 사람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아버님이 학교부지를 희사해 놓고는 가게를 차려 돈을 벌려는 것이라고 반대하며, 면사무소 근처로 자리를 정하게 하였다. 하지만 부지를 희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지매입 자금을 주민들에게 갹출해야 했다.

그러나, 현도지서에 근무한 적이 있는 군수의 말 대로 당시 그만한 돈이 나올 형편이 안되는 곳이었다. 그래도 아버님은 먼저 큰 돈을 내 놓은 다음 기부금을 걷으러 다녔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사업주로서 재산가가 된 일가 분이 귀국했을 때 만나서 조국과 고향을 위해 매입자금을 희사해 주길 청하여 답을 얻었다.

그리하여 모자란 부지 대금은 나중에 주기로 하고 부지부터 마련하였다. 당시는 부지를 닦는 일까지 주민들이 해야 했다. 그 문제는 제방공사를 한 사업주에게 부탁하여 무상으로 했다. 교사 건축은 교육위원회에서 하였다. 드디어 당시 벽촌이었던 현도에 중학교가 설립되고 주민들은 자녀들을 가까운 곳으로 등교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부지 값은 삼분의 이나 치르지 못했고, 재일교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지주들이 아버님께 지불해 달라고 하였다. 설립 기성회장 책임이란 이유로. 그러나 아버님은 “내가 땅을 희사하겠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내가 가게나 차려서 돈을 벌려는 수작이라면서 그리로 끌고 갔으니 그들에게 받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지를 면사무소 옆으로 정한 사람들은 지주들에게 시달려 이불을 쓰고 드러 누웠다. 어쨌거나 일은 해결되어 아버님은 또 하나의 어려운 일을 해 놓은 것이다.

옛날, 등잔불 밖에 없던 시절, 모약골 앞에서 시목 앞으로 돌던 17번 도로는 마차가 다닐 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선동으로 직선화되면서 확대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많은 땅을 수용당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주민들에게 보상해주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땅값을 못 받거나 받아도 싯가의 몇십분의 일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골분들이라 땅값을 신청하는 방법도 받아내는 방법을 모르고, 도시까지 나가야 하므로 그를 위해 일손 놓고 몇날 며칠이고 쫓아다닐 형편도 못 되는 데다 교통도 불편하여 하루만에 집에 돌아오기도 어려웠다. 이에 아버님이 그런 모든 사람들의 위임을 받아 단체로 보상비를 많이 타 낼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 협상하여 일을 처리하여 준 덕에 그 사람들은 편히 앉아서 보상비를 많이 탈 수 있었다.

또, 청주까지 시내버스가 운행되도록 하기 위해 연명날인으로 진정서를 내서 시내버스가 다니게 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한 아주머니는 6.25때 남편이 전사하였음에도 전사확인이 안 된다고 하여 원호혜택을 못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이 5년간에 걸쳐 노력하여 받게 해 준 적도 있다. 이런 식으로 국민들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는 물론 관계 기관에 또는 법적 지도 조언과 서면 작성 등으로 도와 준 일들은 부지기수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사상문제로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복역하던 집안 사람의 무죄 방면을 위하여 200여명의 서명 날인을 받아 탄원하였다. 그리고, 요로를 통해 이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여 아버님특유의 진실감과 인간미 넘치는 설득력으로 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석방시킨 일이 있다. 그 사람은 아버님 장례 때 시신을 어루만지며 “나를 살려 놓고 당신이 돌아가셨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하나, 돌아가시기 전에는 복지회관을 건립한 일이 있다. 아버님 환갑 잔치에 굵직한 인물들에겐 청첩을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400여명의 하객이 와서 대잔치가 되었다. 아버님은 접수된 축하금을 내 놓고, 복지회관을 세우자고 하였다. 그를 위해 건설부 장관을 면담하였고, 강한 추진력으로 드디어 건축허가를 받아내고 말았다.

사실 그곳은 그린 벨트인지라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하루에도 2-3건씩 주례 청탁을 받기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이 타지역 예식장에 나가 막중한 비용을 부담하곤 하는 일이 안 됐어서 주민들이 무료로 예식장이나 행사에 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정종택 국회의원도 흔쾌히 2,000 만원을 내 놓고 도와서 옆의 지서나 면사무소보다 더 멋있고 큰 이층 빌딩을 건설해 놓았다. 물론 주민들의 갹출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님 영결식을 복지회관에서 면민장으로 치른 후에는 주례 설 인물이 없어서 그 건물을 자물쇠로 잠가둔 채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같이 아무리 법적으로 안 되는 일이라도 아버님이 추진하면 반드시 당당하고 훌륭하게 이뤄졌다. 그것은 인품과 언행이 청렴강직하고 온후하며 어질어서 물심양면으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민들을 돕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큰 헌신이지만 교통, 통신비는 물론 기타 비용까지 모두 당신이 썼다. 남들하고 어딜 가더라도 열명이건 스무명이건 성큼 앞장서서 “자-몇 명이야?” 하면서 차표를 모두 당신이 샀다.

안씨 문중 중앙회에도 장관출신이 여러명 있으나, 아버님은 문중 이사를 역임하면서 그들이 추진하거나 해결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을 시원하게 해결하였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아버님이라면 모두 존경하고 있으며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애석해 하며 시향 때마다 아버님 얘기를 하곤 한다.

사람들 중에는 대의를 위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좁은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아버님의 충고나 비판을 달가와 하지 않고, 못되게 굴고 모략하고 쓰러뜨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편이 어떻건 아버님은 웃는 낯으로 그들은 반갑게 대하였다. 범인으로선 흉내내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대인의 풍모를 평생동안 보여 주었다. 아버님은 인간과 세상을 구하려는 포부와 이상으로 늘 여러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도운 것이다.

아버님은 속된 직함은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생전에 가진 직함이라고는 농가방송 토론 그룹 회장, 학교의 기성회장, 청원군 자문위원, 친목회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같이 공무원도 아니고 실권자도 아니면서 기관장들이 못하는 일, 현행법으로 안 되는 일을 모두 이뤄 놓았던 것이다.

이런 것으로 보아선 아버님이 퍽 완강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렇지 않다. 인품과 실행력과 진실을 가지고 어진 마음과 조리있고 명석한 논리 전개로 상대방을 설득했기 때문에 이상과 신념, 의인다운 포부를 의연하고 치밀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복당하고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고, 아버님이 위엄을 부리는 것이 아닌데도 머리가 조아려지고 말씀에 순응하게 되었다.

아버님의 눈은 자애롭고 이마는 현명하여 이해가 넓고 뛰어난 인물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말소리에는 힘이 있고 앉은 모습은 산악처럼 높고 의연하였다. 그리하여 앞에선 누구나 압도당하고 말씀에는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해학을 즐겨서 사람들을 유쾌히 대하면서도 세심한 관심과 염려를 해 주며, 진실하여서 남녀노소 누구나 존경하고 따랐다. 그래서 장례식 때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땅을 친 문상객이 수십명이나 되었다.

아버님의 농장은 천치농원(天治農園)으로, 아버님은 지상에서도 하늘밭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호는 낙산(諾山), 유래도 멋있었는데 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아버님 기억을 적어 놓고자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다.

아버님은 무슨 일이든지 항상 기록하여 놓았다. 기억이란 기록을 당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지를 써 왔다. 큰동생 용근이가 우쓰미 아이코 교수를 만났을 때 우쓰미 아이코 교수는 아버님의 인도네시아 군속근무 관련 기록이 있으면 찾아달라고 하였다 하는 얘기를 듣고서 쌓으면 40cm나 되는 자료를 복사해서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교수는 놀라기도 하고 고마워하며, 이번에는 아버님을 중심으로 책을 쓰겠다고 하였다 한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많은 자료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이런 철두철미한 자세는 그대로 생활의 철학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아버님의 기록 습관은 어딜 가나 항상 배우려는 자세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보통학교 시절 아버님은 항상 우등상과 개근상을 탔고, 독학으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군속시에는 포로 관리를 위해 네덜란드 말을 유창하게 하였고, 현지 인도네시아어도 잘 하였다.

영국인 포로도 있었기 때문에 영어도 읽고 쓸 줄 알았다. 일본말은 당연히 일본인 이상 잘 하였다. 여행할 때는 관광유적지의 역사와 유래를 공부하여 일행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여행에서는 아버님이 항상 리더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은 30대까진 소설도 여러 편 써 놓았다. 문장은 진실로 가득 차서 소설이나 수필은 물론 편지까지 모두 감동적이었다. 여기에서 아버님의 높은 사상이 우러나오고 있다.

언젠가는 고향에 갔을 때 내 방으로 아기를 안고 오시더니 “수덕사에 가면 견성암(見性岩)이란 바위가 있다 견성(見性)이란 사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시란 사물의 본성을 밝혀 써야 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였다. 나도 모르고 있던 시의 본질을 문학이라고는 배운 적이 없는 아버님께서 주신 감명과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셨으나 30대에 한번 묵화로 소나무를 그려서 장에 붙여 놓은 것을 본 것밖에 없다. 포로수용소에서 네덜란드 화가에게서 배워서 그린 스케치에는 그림과 함께 심금을 울리는 메모가 있다. 서예도 잘 하였으나 동생에게 주자십회문(朱子十悔文)을 한번 써 준 것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고, 가훈도 볼펜으로 그려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러나, 조상들 상석과 비석 글씨는 모두 아버님이 쓴 글씨로 각인하였다.

아버님은 쟁기 날이 한쪽으로만 되어 있어서 흙을 한 방향으로 밖에 갈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자 날을 양방향으로 만들어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하였고 특허까지 출원하였다.

이같이 다재다능하였으나 뜻이 너무 크고 높은 데다, 귀국 후의 사회상은 한가하게 그런 것이나 하고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해방은 됐어도 조국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혼란하고, 좌익은 시골까지 파고 들어 철저히 교육을 시켰다. 우익은 자유의 소중함과,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는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많은 젊은이들이 좌익으로 물들었다.

생활은 온 나라가 일본에 착취당해 궁핍했으며, 국민은 무지몽매하여 자유가 주어졌어도 국운을 융성케 하거나 사람답게 살 줄도 몰랐고, 근면하긴 하나 농한기엔 먹고 놀 줄 밖에 몰랐다. 정치와 사회는 부패했고 민생고가 심했다.

아버님이 잘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노래이다. 음치라 하면서 듣고 평은 하여도, 노래를 전혀 안 하였다. 단 한번 여름날 저녁 무렵 아기를 안고 자바 민요인 ‘붕가완 솔로(Bengawan Solo)’를 원어로 불렀는데 한 박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 외엔 지금껏 노래부르는 것을 못 봤다.

대신, 이야기는 많이 들려 주었다. 행복한 왕자는 물론, 밭일을 할 때나 저녁에 모여 앉아 콩이나 목화 다래를 깔 때면 안델센의 동화 같은 것들을 준비했다가 한가지씩 해 주었다. 지루하지 않게 하고,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지장보살, 원효대사, 황희 정승, 맹사성, 선덕여왕, 정조비(정조대왕 부인), 선화공주 등 차원 높고 자비로운 사람들의 삶과 인간성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아버님 자신은 레 미제라블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제도가 나쁘면 백성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아버님은 예절교육도 잘 시켰지만 나는 아버님이 들려 주신 이야기들로 하여 높은 품성을 갖게 됐으나, 그로 인하여 도리어 요즘 세상에선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나 뿐 아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 세상 사람이 모두 우리 아버지나 어머님 같은 줄 알고 살다 보면 모질고 각박하고 간교한 사람도 만났다. 그래서 인간과 세상이 싫고, 산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게 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표준은 나의 부모님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두어야 함을 이제사 깨달았으니 늦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님은 고등보통학교까지 외엔 통신강의록 등으로 독학을 해서 단국대학, 반둥대학, 조도전대학 정치과를 청강하였다. 정치에서 민주주의란 한 사람의 천재를 여러 사람이 따라 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실권이 있었더라면 많은 업적과 개혁을 청사에 남겼을 것이나 그렇지 못해 그렇지 못해 진정서나 건의문으로 개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예전 할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관혼상제와 예절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변하여 바빠지고 있었으나 그런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없어서 대부분 옛날 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아버님은 30여년 전 가정의례준칙이 나오기 전에 제사 축문을 한글로 바꾸고, 제사상 진설도도 간략화하여 표준화시키고, 할아버지 이상은 시향으로 모시고, 8촌 이상은 제사를 독립시켰다. 그래서 후에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바 있다. 결국 지금은 대부분 이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상 모시기와 어른 모시기를 소홀히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급변할 것을 30년이나 앞서서 내다보시고 현대에 맞게 개선한 것 뿐이다. 아버님은 오히려 틈만 있으면, 어른 공경하고, 효도하고, 조상을 잘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혼상제에 지나치게 시간과 돈을 쓰는 것도 좋지 않고, 조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명당 자리를 찾아 조상묘를 이리저리 파 옮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였다. 아버님도 많은 사람들의 묘 자리를 보아 주었지만 아버님의 지론은 명당이란 비록 자리가 좋지 않아도 자손들이 매일 폴 뽑고, 잔디 심고 정성을 쏟으면 효성으로 명당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반면 아무리 좋은 명당자리도 정성을 들이지 않고 위하지 않으면 나쁜 터로 변하는 법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합리적인 말씀인가.

그리고, 후손들이 한문을 공부하지 못하여 전통을 잃고, 제례를 지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여 생전에 제례 홀기(笏記)를 번역하여 놓고, 진설도로 축문도 모두 한글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어느날 문의 중학교에서 지각하는 학생에겐 벌금을 내도록 하는 학급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개선하고자 학교장에게 “그렇잖아도 황금만능주의인 요즘 세상에서 어찌 학교에서까지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가?”고 충고의 편지를 보내자 그 학교에서 선생님을 한 분 보내와 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여동생 보영이가 기차통학을 해서 과외수업을 못 받는데도 과외비를 독촉받자 아버님은 얘기를 듣자마자 즉시 문교부로 과외의 부당성을 지적 시정하도록 건의했다. 그러자 학교에선 선생님을 보내오고, 문교부는 그후 과외를 전국적으로 철폐시켰다.

또 남동생 용근이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의 암울한 시국을 개선하고자 학생운동을 하였다가 처벌을 받았다. 총장은 학부형들을 불러 자녀들을 주의시키려 하였으나 서슬 시퍼렇던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인데도 아버님은 총장과 학장들에게 “학생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불만이 무엇인지 들어 봐야 될 것이 아니냐, 전후사정을 무시하고 처벌만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질책을 하였다. 문교부 차관 출신인 총장은 아버님을 시골 양반으로만 알았다가 아버님이 다시 만나자고 학교로 찾아가자 무서운 사람 왔다고 없다고 하라고는 도망가고 말았다고 한다.

언젠가는 어머님이 다른 여자에게 돈을 빌려 준 일이 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이 죽어서 사업도 안 되자. 약삭 빠른 사람들은 재산을 차압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절망에 빠졌다. 다른 채권자들은 볶아대고 욕하고 흉봤으나 어머님은 고기를 몇 근 사 가지고 가서 위로를 해 주고, 안됐다고 가엾어 하셨다. 그런 어머님께 아버님은 “돈 받으러 가지도 마라.”고 하였다. 손자병법에서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않는다’와 같은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까와하지도, 미련도 없었다.

청상과부가 된 숙모에게는 당신 몫의 집과 논을 내 주었다. 경제관념이 철저하시고, 돈이 있어야 함을 잘 아시고 우리에게도 경제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물욕에 어두워 의리나 인정을 잊고 하루 아침에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과 달리 아무리 억울하고 손해가 나도 소용없는 일은 일찍이 단념하였다. 그래서 손해를 끼쳤더라도 절망과 비운에 처한 사람을 가혹히 대하거나 악착같이 굴지 않고 넉넉하고 따뜻하게 대하였다.

한번은 어머님이랑 셋이서 버스를 탔는데 “차비 좀 깎아 볼까?” 하였다. “깎아 줄까요?”하며 우리는 기대를 안 했으나 아버님은 “한번 해 보지 뭐”. 차장은 아버님의 멋진 호남형 얼굴이 짓는 선량한 미소를 보곤 한 마디 말씀에 말없이 깎아 주었다.

내가 만삭이었을 때 아버님이 집에 와서 분만하라는 걸 폐끼치기 싫어서 사양하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 왔다.

“진통이 오거든 시를 생각하여 보아라. 옛날 여자들은 외딴 집에서 산모퉁이 밭을 매다가 혼자 들어와 아기를 낳기도 했다.”

나의 분만에 대한 불안에 위안을 주려고 쓴 말씀이다.

인도네시아에 포로감시 군속으로 갔다 온 사람 중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사람이 모잡지에 자바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자기들의 공로자인 양 날조하여 보도시킨 적이 있다. 아버님은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순국한 세 동지의 공적들을 알리고 기리는 글을 잡지사에 보냈으나 위신 때문인지 금품공세 때문인지 그 잡지사에선 정정 보도하지 않았다.

자바에서 자바에서 포로감시원으로 계실 때 서양 포로들이 그 힘든 생활 속에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휴가 중이나 외출 중엔 여자를 만나러 다니곤 했으나 아버님은 여행을 다녔다. 거기서도 따르는 아가씨는 많았다.

아버님은 네덜란드 군인이 주인 포로의 여성 가족 막사를 담당하였다. 아버님은 네덜란드 말을 바로 유창하게 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로부터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아버님은 포로들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고 친절하게 하고,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잘 돌보아 주고, 먹을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포로의 힘을 길러 자립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포로 가족 꼬마들에게는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네덜란드 아가씨들이 아버님을 많이 따랐고, 그 덕에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과 함께 수감되었을 때는 매주 네덜란드 여성들이 아버님을 면회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님은 여자들과 인간적인 대화나 친함은 표현하셨으나 일생동안 도덕성을 잃지 않으시고 여자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한번은 친구들이 일부러 어디선가 예쁜 여자를 방에 넣어 주고 몰래 엿보았으나 의연히 대화만 할 뿐 손 하나 잡지 않아서 그 방면에 구제불능일 정도로 초연한 것으로 공인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같이 대단한 의지가요 인격자였다.

담배는 안 피웠으나 술은 매 끼니마다 혹은 일하는 틈틈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혈액 순환과 식욕 촉진 등 건강을 위해서일 뿐이다. 내기로 말술을 들고도 이긴 주량을 갖고 있지만 누가 아무리 권해도 결코 석잔 이상을 드는 법이 없었다. 범인으로선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가 고급 양주를 사다 드리면 그 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오래오래 아꼈다.

우리들이 자랄 때 경제사정도 나빴지만 딸들은 차별하여 진학시키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자식의 교육은 엄마가 해야 하므로 딸일지라도 고등교육까지는 시켜야 된다며 우리들을 진학시켰다.

아버님은 꽃도 좋아하였다. 내가 아기였을 때 시골인데도 자연석으로 꾸민 멋진 정원에 미모사와 백합과 넝쿨장미와 창포꽃이 있었다. 그리고 왕진비도 받지 않고 십리 이십리 다녀 오는 산길에서 은초롱이나 용담등을 캐다 심어서 이런 꽃들은 물론 해당화와 자귀나무와 달맞이꽃과 벽오동들을 보며 자랐다.

벽오동은 줄기도 잎도 모두 녹색이고 품격이 있다. 거기다 내 방 창앞에 있어서 바람도 없는데 “툭-”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잎이 지면 어느새 절기가 하나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가을은 그렇게 왔다.

아버님은 어느날 내게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 따위는 먹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만 쪼아 먹는다.”

고 하였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고귀한 삶과 인품을 말씀해 준 것이며 참된 사랑, 고귀한 삶을 말해 준 것인지 잊을 수 없다.

자유당 때 세상이 썩어 있던 시절, 한 젊은 기자가 아버님을 찾아와서 역사적으로 희생된 일을 가지고 보도하겠다고 약점을 삼더란다. 그 때 아버님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이가 ...., 이 세상에 어찌 약점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차비가 없으면 좀 달라고 할 것이지 남의 약점이나 잡고 다니면 되겠는가?”고 타일러 도리어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사과했고, 아버님은 차비나 하라고 돈을 후히 주어 보냈다.

6.25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식객으로 살았다. 그중에는 월남한 군수 같은 분들도 와서 시국을 논하고 친교를 했다. 피난민 중에는 취직을 시켜 살게 만들어 준 사람도 있지만 일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살 길이 막막한 사람에게는 관상보는 법을 가르쳐 주어 먹고 살게 하였다. 그중 하나는 신탄진 장바닥에 앉아서 관상을 봐 주고 귀가할 때면 일과처럼 아버님께 들렀다. 아버님은 술상과 저녁을 차려 오라고 해서 춥고 굶주린 그에게 음식과 위로로 몸과 마음을 모두 푸근하고 배부르게 하였으므로 오래도록 돌아갈 줄 모르고 연방 허허허허 웃었다.

부모님은 주민들의 집에 오는 사람은 모두 후히 대접하였다. 아버님의 이런 성품 때문에 어렵던 시절 손님을 대접하느라고 어머님은 몸과 마음에 고달픔이 많았다.

부모님은 애경사에는 꼭 가서 축하와 위로는 물론 부의를 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지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집 애경사에는 오지 않고 자기네 행사에는 청첩장을 계속 보내올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아버님은 일체 타산을 않고 반드시 가서 인사를 하였다.

아버님은 관상 외에도 동양철학 전반에 걸쳐서 일가를 이루고 깊은 취향을 갖고 있었다. 오행과 역술에 능하였으므로 궁합이나 작명, 택일도 해 주고 점을 쳐 주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의술에도 주역을 응용하여 더 많은 효과를 보게 했다. 우리 집엔 할아버지 대부터 불임증 환자에게 잉태를 시키는 비방이 있었다. 이 약을 복용할 때 철학적인 방법을 가미시키면 모두 임신을 하며, 아들딸을 원하는 대로 낳을 수 있었다.

당신이 운명하기 전후해서 용근이가 유학중인 일본 오사카를 향해서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그 무렵 100살이 다 된 친척 할머님의 약을 지어 주며 “마지막으로 아주머님께 효도하겠다.”며 약값을 받지 않았다. 어머님께는 “나 일본 가서 죽을지도 몰라.” 한 것이 이미 당신의 운명을 예지하였던 것 같다.

아버님은 말씀으로는 물론 당신의 생활태도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나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가훈을 내려 주었다.

1) 이 순간을 일생처럼 살자

2) 반성하자

3) 참되게 살자

4) 남을 돕고 웃으며 살자

5) 남을 용서하자

그리고 당신께서는 정말로 그대로 살았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늘 냉정하여 지나친 애정은 자식교육에 도움이 안 된다며 잔정을 표현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정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성적으로만 대해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아버님을 원망도 하였으나 냉정함 뒤에 보다 크고 깊은 사랑이 있었다.

예수와 석가 등 성자들은 인간을 너무 고차원적으로 교화만 시키기 때문에 생산적인 면과 생활, 그리고 현실적인 실행과 지도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러나 아버님은 몸소 일하고 자비와 용서도 베풀었고, 현실적으로도 중생을 계도하고, 도움을 주고 무지로부터 슬기와 실천력을 가르쳐 주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성자를 따르라고만 하지 말고 너희도 성자 이상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러 온 목사는 공자나 석가도 흘륭한 성인들이므로 예수만 믿으라고 하면 안 된다고 오히려 아버님에게 설교를 듣고 가곤 했다.

한번은 도벽이 있는 동네 소년이 연장을 가져 간 것을 알고는 그 어머니를 조용히 불러서 “옛날 서양에 큰 도둑이 잡혀서 형장으로 실려 갈 때 마지막으로 어미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여 어머니를 만나서 젖을 먹고 싶다고 하고는 그 젖을 확 물어뜯으며, 나는 어려서 조그만 물건을 훔쳤는데 엄마가 ‘얘, 그것 들킬라 조심해라’ 하며 감추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큰 도둑이 되었다.” 고 했다는 일화로 그 부인에게 자식의 교육 방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아버님의 의도를 꾸중으로 알고 자꾸 사죄만 하였다.

또 한번은 광에 도둑이 들어 나가 보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으나 아버님은 저만큼서 “누구야-” 소리만 질러 달아나게 두었다.

사람들이 왜 잡지 않느냐고 하자 “도둑이란 다 잘 아는 사람인 법이야. 잡지 말고 쫓아 보내야 된다.”고 말씀하였다.

또 6.25후 어렵던 시절엔 고구마 농사를 지어 밭에다 70가마를 저장한 것이 모두 썩어버렸으나 일언반구 한탄을 하지 않았다.

어느 해는 집에 불이 나서 그해 땔감으로 사 놓은 솔방울 100가마가 모두 타고 헛간도 타서 기르던 오리며 닭이며 돼지들이 다 죽었으나, 한숨 한번 쉬시지 않고 남들에는 물론 우리들에게도 언짢은 표정 하나 없었다.

친구는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자식이 허구 헌날 술친구들과 어울리자 아버지가 친구란 “참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 그런 사람들과는 그만 만나거라.” 하였으나 아들은 그 친구들이 진실된 친구들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러면 지금부터 누가 진실된 친구를 갖고 있는지 내기를 해서 네가 지면 이제부터 내 말을 듣도록 하여라.” 하고 돼지를 잡아서 거적대기에 싸서 지게에 짊어 지워 놓고는 아들에게 “네가 진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사람을 죽였으니 같이 묻으러 가자고 하고, 숨겨달라고 해 보거라.” 시켰으나 아들이 찾아간 친구들은 모두 방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 친구는 문을 열어주고 따뜻이 맞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것이 진짜 우정인 것이다.” 하면서 갖고 간 돼지를 삶아 잔치를 하여 아들을 훈계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자바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군은 총칼을 차고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자 당신께서 슬리퍼 차림으로 연단에 올라가 유창한 현지어로 설득하여서 진정시켰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 대위는 “나는 석자짜리 칼을 차고도 어쩌지 못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맨 몸 세 치 혀만으로 그들을 진압시킬 수 있었는가?” 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친구 김상욱 씨와 함께 외출하였을 때 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잡혔었으나 아버님은 책상을 발로 차 둘러 엎으면서 굴하지 않고 대항하여 빠져 나왔다고 한다. 김상욱씨 말로는 이쪽은 빈손이고 그들은 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였다.

나의 아버님은 이러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단 한 사람의 의인, 단 한 사람의 대장부, 단 한 사람의 현인, 내게는 예수보다도 석가보다도 위대하고 거룩했다.

그로 인하여 내게는 더 이상의 참된 사람도, 대장부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작품은 ‘동시대 동인지, 131-149p, 호서 출판사, 1987년 9. 20일 발행’에 실린 것을 발췌한 것이다.

 

저자 약력 : 현도국민학교, 대전여중 및 대전여고 졸업

충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천안여고 교사 역임

문학동인 동시대 창립 회장

대전 문인총협회 부회장

충청불교 문협 부회장

대덕문화회 고문

문학세계 심사위원

시집 : [사람아 달무리같은 사람아]-혜진서관

[낮은 목소리로]-대교출판사

[바람에게]-문경 출판사

 

출처 : 순흥안씨 양공공파
글쓴이 : Ann Yong-Geu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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