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수도 한성 성곽 18킬로미터!~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
역성 혁명으로 태어난 조선 왕조.
새 왕조는 한양에 터를 잡고 새 수도 건설에 착수한다.
태조에서 태종까지 3대에 걸쳐 이루어진 한성 건설.
그것은 조선 왕조 최대 개국 프로젝트였다.
"한 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14세기말은 바로 그런 시기였습니다.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새 왕조 조선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수도는 여러분도 잘 아다시피 지금의 서울입니다.
우리는 흔히 조선의 수도를 한양이라 부르는데요.
한양이라는 명칭은 신라때부터 있었고,
고려때는 한양 또는 남경으로 불렀구요.
조선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공식 명칭을 이렇게 바꿉니다.
한성(漢城)!
여기서 성은 성곽성(城)자입니다.
왜 '한양'이라고 하지 않고 '한성'이라고 했을까요?
조선의 건국자들은 이렇게 한양을 빙 둘러싸 성곽을 쌓고
수도의 관할 구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 즉, '성곽 십리까지'로 정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도의 개념속에는
성곽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조선의 수도 성곽, 그 성곽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지난 4월 1일.
서울에 유서깊은 문화재 하나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갔다.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과 함께
한성의 4대문을 이루었던 한성의 북문, 숙정문(肅靖門)이 개방된 것이다.
"시내에서 바라보면 삐죽한 공원같지만, 여기서 바라보면 얼마나 넓은 두께를 갖고 있는지요.
굉장히 큰산입니다. 그리고 이 산세가 내려오다가 줄기를 꺽어서 한 가지로 내려와가지고..."
- 유홍준
이날 숙정문과 함께 성문 양 옆으로 이루어진 성곽도 공개됐다.
성문은 물론 성곽도 북악의 산비탈에 서 있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이다.
"성곽 뿐만 아니라 경치하고 도시하고 어울리는 게 상당히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 김찬영, 관람객
"이 숙정문이 음의 기운이 많이 서려 있다고 해서 음의 기운을 한 번 느껴보려고 왔는데
실제로 와 보니까 소나무도 많고 또 음하고 연관되는 것도 많고 해서 상당히 재밌었어요."
- 김대철, 관람객
청와대 뒷산인 북악은 군사 구역이라 그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숙정문 구역은
지난 1968년 무장 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일명 1.21 사태 로 인해 폐쇄되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성곽은 비교적 온전하게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30년만에 개방된 숙정문 구역.
이것을 출발점으로 문화재청은 북악 성곽의 전면적인 개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높이 300미터가 넘는 두 개의 큰 산줄기를 따라서 산성을 쌓았기 때문에
산성의 인공적인 축조물 뿐만 아니고
인왕산과 북악산이라고 하는 자연과 함께 아우러진 산성이라고 했을 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역사 도시로써 기억이 될 것입니다."
- 유홍준, 문화재청장
1396년.
한성 성곽이 완성되었을 때,
성의 길이는 총 18킬로미터.
취재팀은 지금 서울에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의 남쪽 정문이었지만,
지금은 서울의 한복판이 되어버린 서울의 숭례문(남대문)
성문만 덩그마니 있을 뿐 성곽이 있어야 할 자리는 도로가 차지하고 있다.
성곽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남대문 인근 빌딩 숲속에 새로 지은 듯한 담벼락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갓 쌓은 회색 성돌 사이에 오래된 성돌이 보인다.
남대문으로 이어진 옛 성곽은 이렇게 일부만 남아 있다.
한성의 서대문인 돈의문과 그 일대의 성곽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다만 사직동 뒤쪽에서부터는 다시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성곽은 인왕산 비탈로 길게 이어져 옛모습을 짐작케 한다.
동쪽의 관문인 동대문(흥인지문).
도로가 생기면서 끊어진 성벽은 인근 주택가에서 다시 발견되는데
성곽은 다시 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악, 인왕, 남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나즈막한 서울 성곽이 이어진다.
성문이 통로라면 성곽은 경계이다.
조선 시대엔 이 성곽이 도성의 안팎을 구분지어 주었다.
한성 성곽은 도심 곳곳에 남아있었다.
태조때 쌓은 성곽이 잘 남아있는 신당동 지역.
역사를 숨결을 간직한 채 도시를 감싸는 성곽은
서울이 유서깊은 성곽 도시임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성곽의 흔적을 찾던 중 취재팀은 장충동 대로변 축대에서 옛 성곽과 만났다.
성곽이 왜 여기 있을까?
"이 돌들은 모양이나 크기로 봐서
분명히 도성, 서울을 둘러싼 성의 일부였는데 이것이 무너져 있는 상태였었나 봅니다.
1960년대말~1970년대에 요 위에 타워 호텔과 자유총연맹, 현재 자유센타라고 이름하는 건물을 짓는데
이 돌들을 가져다 축대를 쌓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전혀 도성이 아닌 엉뚱한 곳에 와 있게 되는 것이죠."
- 홍순민 교수, 명지대
혜화동의 한 중학교.
조선 시대 한성 성곽은 이 학교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성 성곽이 훼손된 경우는 이 뿐만이 아니다.
주택가 담장이 되어버린 옛 성곽.
시멘트로 조잡하게 성돌의 틈을 메워 성벽임을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또 어떤 성돌은 고급 주택가의 축대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공서 담벼락의 담장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 한성 성곽의 실태를 파악해온 정기용 교수.
건축가인 그는 현재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서울 역사 도시 복원 계획 중의 하나로
서울 성곽을 복원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지난 100년 동안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살았었는데
성곽을 답사해보면 누구라도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 문화 유산을 시민들의 품으로 빨리 되돌려주어서
시민들이 서울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그 기틀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죠."
- 정기용 소장, 기용건축 연구소
훼손된 성벽은 보수하고 옛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라진 성곽이었다.
이를 위해 정교수는 위성 사진을 이용했다.
위성 사진을 통해 사라진 성곽은 확인되었지만, 이번엔 복원 방식이 문제였다.
빌딩이나 도로가 들어선 자리에는 어떻게 성곽을 복원해낼까?
도로 옆으로 이전 해놓은 자하문의 경우 도로 위에 없어진 성곽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도로 개통과 함께 아예 없어져버린 서대문의 경우엔 성곽 자리에 그 흔적을 표시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성곽을 복원하는 것은 제가 늘 말하듯 경관을 복원하는 것이고,
경관을 복원하는 것은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이 틀림없이 자원과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님처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어떻게 보면 소박한 일인데 그것이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일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기용 소장
이제 600년전 한성을 둘렀던 옛 성곽을 복원해보자.
전체 18킬로의 성곽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약 12킬로미터.
남아있는 성곽을 이으면 끊어진 성곽의 위치가 확인된다.
북악과 남산, 인왕과 낙산을 잇는 18킬로의 성곽.
이것이 600년전 수도 한성을 잇는 성곽이다.
2. 한성 성곽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현재 서울의 남대문은 대로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지만
600년 남대문 옆에는 이렇게 멋스런 성곽이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숙정문,
한성의 4대문을 잇는 성곽의 길이는 무려 18킬로미터.
그런데 600년전 18킬로에 달하는 성곽을 어떻게 쌓았을까요?
태조 연간엔 모두 두 번에 걸쳐 축성 공사를 하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5년 1월 민정 8천 7십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게 했다."
또 그 해 8월의 기록입니다.
"축성 인구 7만 9천 4백 명을 징발했다."
무려 20여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였습니다.
새 도읍을 짓기 위한 공사는 주로 농한기에 이루어졌는데요,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조치였을텐데요 그래서 공사 기간도 짧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름과 겨울 농한기 두 번의 공사는 각각 49일에 불과했습니다.
대규모 공사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려면 공사가 무척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한성 성곽 과연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박나운 아나운서가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예. 저는 지금 600년전의 과거와 만나고 있습니다.
제 옆으로 있는 이 성벽이 바로 조선이 한성을 수도로 정한 뒤 지은 한성 성곽의 일부입니다.
어떻습니까?
성곽이 있는 풍경, 봄의 정취와 아우러져서 고즈넉하고 운치 있어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수도의 건설, 그 중에서도 한성 성곽의 건설은 조선 왕조 최고의 개국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런데 장작 18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성곽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축조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이 성벽에 새긴 글자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성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도대체 어떤 글씨인지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희미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팀의 도움을 얻어 탁본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탁본은 나무나 돌에 새겨진 글씨를 원형대로 뜨는 방식으로
먼저 성돌위에 물을 뿌려 창호지를 밀착시킵니다.
창호지가 완전히 마르면 먹물을 묻힌 솜방망이로 가볍게 두드리는데,
이렇게 하면 글씨가 새겨진 부분만 먹물이 묻지 않게 됩니다.
탁본을 마치자 성돌위에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곤자육백척'이라 함은
'옥출곤강'해서 천자문의 47번째 글자라서,
여기가 47구역 100척이라고 표시한 겁니다.
곤륜산이란 뜻이긴 하나,
곤륜산이냐 아니냐는 의미보다는 번호로써 의미가 더 큰 것입니다.
이쪽에도 뭐가 있는데요 .
이게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이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 홍순민 교수
"성벽에 새긴 글씨, 각자는 또 있었습니다."
"여기에 또 글자가 있네요. 글자가 잘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이네요."
"성벽에 있는 글자들은 모두 천자문속에 있는 글자입니다.
생자는 마흔 두번째, 곤자는 마흔 일곱번째, 강자는 마흔 여덟번째,
이 각자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요?"
"도성에 보면 '무슨 자 몇 백 척'하고 확인이 되는데요,
그것은 도성을 쌓으려고 계획을 할 때
백악산 정상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600척 단위로 번호를 매겼습니다.
그런데 그 번호를 매기는 것을 1, 2, 3, 4로 하지않고
천자문에 따라 '천(天),지(地),현(玄),황(黃)...'
이렇게 쭉 나가면서 번호를 매겨 97번째 '조'자에서 끝났는데,
이 글자들은 태조때 도성을 쌓으려고 계획을 할 때, 구획 번호 매긴 것이라고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 홍성민 교수
"각자의 의미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백악 동쪽에서 '천'자로 시작하여 '조'자까지 6백 척마다 한 자씩 97자를 붙였다'
- 태조 5년 1월 9일.
"한성 길이는 총 5만 9천 5백 척.
이것을 6백 척으로 나눠, 각 구획마다 천자문으로 순서를 매겼는데
이렇게 해서 '천'자에서 '조'자까지 모두 97구간을 만든 것입니다.
곤자 6백 척, 강자 6백 척은 구간을 표시하는 단위였음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성벽을 일정한 구간으로 나누어야 했을까요?
그 의문을 풀어줄 또 다른 글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흥해'라는 글자인데요, 과연 이 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흥해시면(興海始面)'이라면 바로 흥해가 시작하는 면이라는 뜻일텐데요,
흥해는 어딜까요?
< 경상북도 고지도 - 흥해, 연일, 경주, 경산, 하양>
'흥해'가 새겨진 남산 일대의 성벽에는
경주, 연일, 경산, 하양이라는 각자도 발견되었습니다.
흥해를 제외하고
모두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지명들입니다.
조선 고지도에서 흥해를 찾아보았습니다.
영덕 지방에서 흥해란 지명이 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흥해를 비롯해 모두 경상도 지역의 지명이란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성벽 축성 당시에 각 구간마다 담당 지역을 두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동대문에서 남산 지역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경상도 담당 구간이었고,
그래서 그 지역의 지명이 성벽에 새겨졌던 것입니다.
결국 5만여 척의 성벽은 97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각 구간마다 담당 지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의 장정들이 농한기마다 올라와 성벽을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성 성벽엔 각자이외에 특이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로 이어진 성벽에 서로 다른 축성 방식이 나타납니다.
한쪽은 비교적 돌을 잘 다듬은 다음,
큰돌에서 작은돌 순으로 정교하게 쌓아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크고 작은 돌들을 거친 상태로 그대로 쌓아올렸습니다."
"태조때 축조했던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깬돌을 가지고 사용했기 때문에
얼핏보면 난석쌓기, 그러니까 큰 규칙없이 쌓은 것으로 보이고,
세종때 쌓은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게, 크고 작은 돌들이 일정하게,
예를 들면 아래쪽은 큰돌을 쓰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돌을 쓰는 방식으로 축조했습니다."
- 손영식 박사, 문화재전문위원
"태조5년에 완공된 한성 성곽은,
세종대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가 이루어지고,
임진왜란 이후 숙종 시대 다시한번 대규모 개축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성곽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네모진 돌의 축성 방식은 숙종때에 쌓은 수법인데요,
이 성을 수리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규격화된 돌을 주문을 해서 생산을 해서 축조한 것입니다.
축조한 특징을 보면 규격화된 돌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돌과 돌 사이에 쪽돌도 없고
돌을 약간 기울여서 수직에 가깝게 쌓았기 때문에 가장 급경사로 쌓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손영식 박사
"태조와 세종, 숙종에 걸쳐 축성된 한성 성곽,
후대로 갈수록 축성 방식이 발전하면서 성곽은 점점 견고해졌습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성 성곽이 견고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곳은 태조 시대에 쌓은 성곽입니다.
'제삼소수음 사정우'
여기에 새겨진 '수음'은 조선 시대 이두식 표현으로,
수음, 숨, 즉 구역을 의미합니다.
"수음이 뭘까? 붙여서 읽으면 숨이 되는데
어떤 시간적인 구역이거나 공간적인 구역이 아닐까 이렇게 추정을 합니다.
'소수음'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세번째 구역이다' 이런 뜻이고,
그 옆에 '사'라는 것은 공사를 감독, 관리하는 직책 이름입니다.
'사정우' 이건 인명이구요."
- 홍순민 교수
"성벽에 인명을 새긴 경우는 숙종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훈국(訓局)'은 훈련도감을 가리킵니다.
'패장(牌將)'은
훈련도감의 군사 조직을 뜻하는데
공사 관리를 맡았던 사람의 소속과 이름을 새긴 것입니다.
또 석수(石手)와 도편수(都편首)처럼 기술 책임자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성벽에 그 직책과 책임자의 이름까지 새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사 관리 책임을 맡았던 훈련도감이라고 하는 군대 조직의 책임자들과
또 실제 공사 기술자 석수들의,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책임지고 공사를 해라,
오늘날로 말하면 '공사 실명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홍순민 교수
실제로 태조실록에는 '공사 실명제'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성제조 이성중을 순군부에 가두니 성을 부실하게 쌓은 이유 때문이다."
- 태조 5년 6월 2일.
"지금까지 성벽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서 한성 성곽이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살펴보았는데요,
조선은 성곽을 보다 견고하게 쌓기 위해서
담당 구간과 지역, 또 담당자의 이름을 성벽에 새겨넣는,
말하자면 공사 실명제를 도입했던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조선 개국 최대 공사 한성 성곽은 바로 그렇게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3. 왜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채택되었을까?
"이미 조선 개국부터 공사 실명제가 도입되었다는 게 무척 흥미로운데요,
만약 공사 실명제가 없었다면 성벽을 쌓은 주역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성 성곽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이 커다란 성돌을 하나하나 날라서 힘들게 쌓아올린 것입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온 장정, 충청도 결성에서 올라온 장정, 또 성주와 경주, 기주에서도 장정들이 올라와 성을 쌓았습니다.
전국의 장정들이 올라와 임했을 뿐아니라,
세종 시대 개축 공사에서는 성곽을 쌓다가 무려 87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한성 성곽인 것입니다.
물론 성곽을 쌓고 수도를 건설하는 작업도 힘들었겠지만
그에 앞서 수도를 결정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조선의 수도로 지명된 후보지들입니다.
한양외에도 도라산, 적성, 무악, 송림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요, 생각보다 후보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후보지 중에서 왜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취재팀은 충남 계룡시 계룡대로 향했다.
계룡대가 들어서기전 이 일대엔 백여 개의 거대한 주춧돌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계룡대는 그 주춧돌을 한데 모아 보관 중인데,
그런데 그 주춧돌의 상당수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가장 마른 대추나무 같은 것을 심어 박아가지고 물을 부으면,
그 불어오른 대추나무의 힘에 의해서 돌이 쪼개지는 것이죠.
우리의 전통적인 돌 가공법이죠."
- 나각순 박사, 서울 시사 편찬 위원회
비록 가공하다가 중단되었지만 주춧돌의 크기로 보아 평범한 건물을 지으려던 건 아니다.
이곳에는 어떤 공사가 진행되다 중단된 것일까?
"현재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10개월 동안 궁궐터로 주춧돌을 다듬는 이런 공사들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구요,
또 지명으로도 많이 남아있지요.
대궐터라든가, 종로터라든가, 서문터, 동문터 이와 같은 지명이 남아있지요.
지명이라는 것은 당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거든요.
그걸 통해서 우리가 이 터를 궁궐터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나각순 박사
현재 계룡시 지도엔 대궐평, 종로터와 같은 지명이 보인다.
이는 이 일대에 한 때는 수도 공사가 진행되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궐평이라 불리는 곳의 거대한 주춧돌들, 이곳은 조선의 왕궁터였다.
조선은 계룡산에 궁궐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천도였다.
1392년 8월 13일.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만에 천도를 명한다.
그러나 한양 천도는 개국 공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다.
"날씨가 추워져 백성들이 돌아갈데가 없으니, 궁실과 성곽을 건축한 뒤 천도하소서"
- 태조 1년 9월 3일
"한양은 아직 도시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옮겨가면 상황이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에 반대를 한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기득권층이
새도시로 옮겨가서 생활 기반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 불편함, 이런 것 때문에 반대를 한 것 같습니다."
- 남지대 교수, 서원대 역사교육과
하지만 태조 이성계는 천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면 반드시 도읍을 옮기기 마련이다."
태조는 후보지로 떠오른 계룡산 신도안을 둘러본 후 수도 공사에 착수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공사는 십개월만에 중단된다.
신원사 무학대사 영정.
임진왜란 이후 저술된 야사에는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데에는 무학대사의 영향이 컸다고 전한다.
과연 그랬을까?
그런데 야사와는 달리 천도와 관련해서 무학의 기록은 무척 간단하다.
태조 - "계룡산이 수도로 어떠한가?"
무학 - "잘 모르겠습니다."
태조 - "그럼 한양은 어떠한가?"
무학 - "한양은 수도로 삼을 만하나 중신들과 잘 상의해서 결정하시옵소서."
"실질적으로 봤을 때 조선 왕조 새수도를 여기저기 찾아보러 다니고,
조선 왕조 수도를 결정한 주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태조 자신이었다고 봅니다.
무학대사는 그런 역할을 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었다고 봅니다."
- 홍순민 교수, 명지대
그렇다면 개룡산 신도안의 공사는 왜 중단되었을까?
그 이유는 하륜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하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수파장생의 불길한 입지다."
- 태조 2년 12월 11일
"근본적으로 풍수지리상으로 이곳이 수파장생,
금강의 물줄기가 나라의 국운이 장생, 오래 가는 것을
수파, 부수는 그런 기운이 있다는 쪽으로 주장이 기울었어요.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 물길이라든가, 그 밖에 조운이랄까 이런 면에서 상당히 좋게 보았지만,
이 지역이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남서쪽으로 좀 치우친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중앙으로써의 성격이 좀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도읍지 공사를 하다가 중지된 이유의 하나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 나각순 박사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기까지 천도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곳만 여섯군데,
그 중에 하나가 도라산이다.
천문, 택지들을 담당하는 기간으로 서운관이 추천한 도라산은
현재 경기도 파주 민통선 안에 있다.
나즈막한 산 앞으로 임진강과 습지가 둘러져 있는데,
실록은 이곳을 둘러본 태조의 반응은 이렇게 전한다.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인 풍수지리에 맞지않는 자리인데도 후보지로 천거한 점,
서운관원들이 수도를 안 옮겼으면 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깔고
부적절한 곳을 수도 후보지로 올린 의도에 역정을 낸 것으로 보입니다."
- 남지대 교수
취재팀은 이번에는 적성 광실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광실원은 경기도 양주 지역.
이곳에는 경기 5악 중에 하나인 감악산이 있다.
그렇다면 광실원은 어딜까?
광실원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적성 지역을 그린 한 고지도에 '광수원'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적성 지역에 감악산이라고 하는 큰산이 있는데
그 산을 넘나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료들이 쉴 수 있는 여곽, 원이 좀 필요했겠죠.
여곽으로써 광실원이 조선 초창기에 등장했었는데 그것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
아예 이름을 그대로 쓰기 뭐 하니까 아마 광수원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쳐다보는 입장에서는 계족산의 오른쪽 방향 같습니다."
- 이도남 교수, 건국대 사학과
광실원 자리를 둘러본 태조는 이곳이 수도가 될만한 터가 못 된다하여 퇴자를 놓았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운하여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터가 되겠는가!"
"앞에 큰강이 없어 감악산 뒤쪽의 임진강쪽을 통해서만 조운이 가능하거든요.
그렇다면 조운이 이 산을 넘어와서 수도 후보지 있는 곳에다가 물자를 옮겨놓게 됩니다.
그러면 그만큼의 유통 경비라는 게 더 많이 들구요, 힘이 더 많이 들겠지요."
- 이도남 교수
한양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은 인왕산의 서쪽 줄기에 안산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 일대가 도읍터로 거론이 된 것이다.
무악이 수도가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악이 수도로 삼기에 터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백관이 모여 무악 천도를 논의한 결과 모두 좁다고 하므로 그만두었다."
- 태조 1년 11월 25일
결국 한양이 수도로 채택되게 된다.
" 도평의사사라고 하는 최고 기구에서
태조 임금에게 건의하는 방식으로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자고 하는데요, 그 이유가 세가지입니다.
첫째 도리가 균등하다 즉, 전국에 위치상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구요.
두번째는 수륙간의 유통이 편리하다는 것은, 육로나 수로가 이곳에 집산을 해서 사람을 모이는데 유리하다는 것이구요,
세번째는 형승이 수려하다는 것은 자연 환경이 아름다울 뿐아니라 사람 살기에도 좋고 방비에도 편리하다는
이 세가지 점을 꼽습니다."
- 홍순민 교수, 명지대
당시 한양은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륙 교통이 모두 편리했다.
무엇보다 바닷길을 통한 해운, 운송이 편리했다.
개경처럼 해적이 출몰했을 때 예성강이 막혀 조운이 중단될 위험도 적었다.
서거정의 <동문선>에 의하면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또 다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천도되기 이전부터 한양은 번화했다는 것이다.
"(한양은) 선대에 도읍한 곳으로 산하가 장려하고 인물이 번화해 왕경에 견줄만하다."
- 이곡 <송정참군서>
결국 태조는 수많은 후보지 중에서 한양을 조선 왕조의 새수도로 정한다.
"송경(개경)인들 완벽하겠는가?
이 곳 한양을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이 편하고 중앙에 위치하니 백성들이 편리할 것이다." - 태조
3년 동안 계속된 천도 논의는 이로써 마무리된다.
4. 수도 한성 설계는 어떤 원리를 담고 있을까?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것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비록 600년전이지만 조선의 관리들은 수도가 갖추어야 할 합리적인 기준,
특히 인문지리적인 특징을 잘 따져서 수도를 정한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청와대 바로 뒷쪽 산인 백악산입니다.
조선 왕조의 수도 한성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군요.
한양 천도가 결정된 직후, 조선 왕조는 새수도 건설에 착수하는데요,
지금 보시는 모습이 한성의 기본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백악산의 북악 자락에 궁궐인 경복궁을 짓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끝에 응봉 자락 끝에 종묘를,
오른쪽 인왕산 자락 끝에는 사직단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성곽과 4대문을 완성하는데요,
수도는 모름지기 한 나라의 상징입니다.
때문에 아무렇게나 설계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성을 이렇게 설계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삼각산이라고도 불리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백악산을 비롯해 인왕산과 낙산, 그리고 남산까지,
한성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한양 천도 이후 가장 먼저 공사가 진행된 건물은 궁궐이다.
조선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궁.
궁궐과 함께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
그리고 사직단이 조성되었다.
사직은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일종의 재단이다.
건물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터를 중시했는데 조선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조 3년, 수도의 설계자들은 궁궐과 종묘사직의 터를 정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들이 터를 잡는 기준은 무엇일까?
건축학자인 이원교 박사는
한성 수도의 기본 설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기존의 한성 고지도에서 지명만을 강조한 그래프이다.
이 지도로 보면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모두 산줄기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한성의 주요한 시설물들은 한성이 갖고 있는 중요한 지맥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수법인데,
지맥의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것은 기운을 받아들인다거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입니다.
사람 몸에 비유해보면요,
사람 몸에 에너지가 있을 때 그 에너지는 결국 손가락 끝에서 발열이 되고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몸을 지맥이라고 본다면 내가 살고자 하는 장소가 손가락 끝쪽에 놓일 때
내 몸의 기운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파악이 됩니다."
- 이원교 박사, 건축사, 경희대 겸임교수
지맥의 끝자락에 건물이 위치하는 것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도 보인다.
황궁인 만월대와 종묘인 태묘, 그리고 사직이 모두 산줄기의 끝에 위치해 있다.
현재 개경의 궁궐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경복궁이 백악인 주산을 등지고 있듯이, 개경의 궁궐 만월대 뒤에는 송악이 버티고 서 있다.
건물의 배치 방식뿐이 아니다.
개경의 나성, 즉 외성은 송악과 용수산을 따라 서 있다.
한성 성곽이 자연 지세를 이용해 세운 것과 일치한다.
네 개의 산을 이은 성곽은 물론, 주요 건물의 배치까지
마치 개경을 옮겨온 것 같이 한성은 개경을 닮아 있다.
"한양에 삼각산이 있듯이 개성에는 천마산,
한양에 백악이 있듯이 개성에는 송악,
인왕산에 해당하는 오공산,
남산에 해당하는 용수산,
이렇듯 아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오히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한양의 청계천이 서쪽에서 시작되서 동쪽으로 흘려나가듯이
개성의 하천도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흘려나갑니다.
궁궐의 배치나 종묘사직의 배치도 한양이나 개성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리 나라 동일한 지형 구조에 기본적인 원형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 이원교 박사
그러나 개성과 한양에는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개경에는 고려의 종묘, 즉 태묘가 성 밖에 위치하는 반면 한성엔 종묘가 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은 개국하고 나서 바로 반포한 즉위 교서에서
제일 첫번째로 지적하는 것이 고려의 사직 제도가 예제에 틀렸다,
종묘와 사직이 방위는 맞지만 종묘가 성 밖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한양에 들어서서는 성 안에 있는 것으로 수정이 되구요,
경복궁 같은 경우도 고려 궁궐터 만월대 자리나 남경 궁궐터에 비해 평탄한 곳에 지어서
예제에 적합한 자리에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장지연, 서울대 국사학과
<주례고공기>.
주나라 시대의 기록인 주례는 고공기를 통해 도성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주례의 고공기에 의하면
성곽은 평탄한 지형위에 네모 반듯하게 짓고
사방에 세 개씩의 문을 내어야 한다.
중앙에 황성을 배치하며
황성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배치한다.
중국의 수도 북경은 주례고공기의 원칙을 가장 잘 따른 도시로 유명하다.
북경의 상징인 자금성은 15세기초 명나라 왕조에 의해 설립하였다.
이 화려한 왕궁은 도성의 어느곳에 위치해 있을까?
< 중국 북경 - 주례고공기를 따른 15세기 명나라 자금성의 궁궐, 종묘, 사직 위치>
이것은 북경 지역 전체의 모습이다.
황궁인 자금성은 이 도성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도 성 안에 있다.
북경과는 큰 차이가 나지만,
한성이 종묘를 성 안에 들이고 궁궐을 평지에 세운 점은 모두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왜 조선 왕조는 한성 설계에 주례를 적용한 것일까?
문헌사(경기도 평택).
그 해답은 한성 설계의 총책임자인 정도전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건국한 정도전.
신진 사대부인 그가 꿈꾸는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궁'의 이름은 유교의 경전인 <시경>에서 따온 것이다.
한성의 관문인 '4대문' 역시 정도전이 직접 그 이름을 지었는데
동대문은 '흥인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 지은 것도 유교적 이념에 의한 것이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은 유교의 덕목이다.
정도전은 한성을 통해 조선이 유교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고려말에 불교가 정치 세력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정치적인 경제적인 이해 집단처럼 비대해지고 부패한 것을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조선 왕조는 유교 이념, 특히 성리학 이념을 지향하는 사회를 그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성이라는 수도를 건설할 때도
그러한 유교적 이념들을 도시 구조에서도 반영하고, 특히 명칭에서도 집어넣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홍순민 교수, 명지대
자연 지세를 중시하는 도시 설계의 전통을 따르는 한편,
상징적인 건물에 유교의 이념을 반영했다.
전통과 새로운 사상이 만나 그것이 한성 설계의 원리였다.
신도가(新都歌)
정도전(鄭道전)
옛날에는 양주 고을이었다
이 자리에 새 도읍이 좋은 경치로구나
나라를 일으키신 나랏님께서 태평성대를 일으키셨도다.
도성답구나 지금의 경치! 도성답구나!
임금께서 만세를 누리시어 온 백성이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시도다 아흐 다롱디리
앞에는 한강물이요 뒤에는 삼각산이여
복덕이 많은 강산 사이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소서.
- 악장가사
"수도를 찬양하고 국운의 번창을 기리는 이 노래는 정도전이 지은 신도가입니다.
수도 건설의 총책임자로서 한성의 건설에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요,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결정한 지역이고, 정도전이 수도를 설계한 지역이라면,
한성 수도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태종 이방원입니다."
태조 7년인 1398년,
한성엔 권력 투쟁의 회오리가 몰아친다.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정적인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제거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축성 공사가 마무리된 지 겨우 2년만에
한성은 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조선의 제2대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개경 천도를 단행한다.
*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 이방원이 정도전 등을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출한 사건.
"개경으로 돌아갈 때 재난이 잦아서 피해간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유로 본다면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민심이 크게 동요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원래 도시로 돌아감으로써 민심을 좀 안정시키는 그런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 남지대 교수, 서원대 역사교육과
개경으로 천도한 이유는 또 있었다.
개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개경의 기득권 세력이 꽤 오랫동안 한양으로의 이주를 반대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상인들의 반대가 심했다.
"부유한 상인 중 옮기려 하지 않는 자들만 신도로 옮기게 하고, 금지했던 시전을 열게 하소서"
- 태종 9년 3월 3일
"한양 천도가 결정된 다음에 개경의 시전이나 시사를 다 금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상인층들이 이주하지 않았고,
국가에서 통제 정책이 강화하니까 아예 개경과 한양에 두 채의 집을 지어놓고 왕래를 한다든가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상인들의 반발이 워낙 심하니까 한양으로 천도가 확정된 지 태종 10년이 되어서도
태종이 직접 개경으로 가서 그러한 정책을 펴야할 정도로 개경 상인층의 반발이 상당히 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장지연, 서울대 국사학과
개경 천도 이후 한성에서는 다시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이 벌어진다.
방간과 방원이 시가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1400)이다.
두 번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방원은 조선의 세번째 왕으로 등극한다.
이로부터 다시 천도의 논의가 불거진다.
천도 후보지에 대한 중신들의 의견은 개경과 한성, 무악으로 갈렸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뜻에 따라 한성으로 천도하고자 했으나 이는 쉽지 않았다.
개경과 한성을 모두 수도로 삼자는 양경제가 건의되었다.
천도에 대한 논의가 매듭 지어지지 않자
태종은 중신들에게 다시 한양 천도를 명한다.
"한성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요, 우리 사직과 종묘가 있는데
오랫동안 비워두고 사용치 않으니 이것은 선대의 뜻을 따르는 효도가 아니다.
하여 명년 겨울에는 반드시 도읍을 옮길 것이니 궁실을 수리하라."
- 태종
그런데 한성으로 옮겨가기전 태종 4년 10월,
조선왕조실록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척전(擲錢)',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는 것이다.
실록의 내용은 이렇다.
후보지를 결정하기 위해 태종은 측근 신료 다섯 명만 데리고 종묘에 들어간다.
개경과 한양, 무악을 두고 동전을 던져 점을 친 결과
개경과 무악은 흉(凶)이 두 번, 한양은 길(吉)이 두 번 나왔다는 것이다.
태종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한양으로 가는 것에 대해 상당히 반발 기류가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개경 그곳이 대부분의 사람의 근거지인데 새 도시로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은근히 반발하고 저항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태종 자신도 그것을 강력하게 원하기는 했지만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이기에는 부담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측근 신료 몇 명만 같이 대동해서 종묘 안에 들어가서 동전을 쳐서 점을 쳐서
여기가 2길 1흉이 나왔는데 다른 곳은 흉한 곳이 더 많다,
그러니까 여기는 길한 곳이고 여기로 꼭 옮겨야겠다,
이것은 신성한 종묘 영령들의 뜻이다 뭐 이렇게 종묘의 권위까지 빌어서
한양 천도를 기정 사실화하고 추진하려는 그런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홍순민 교수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은 수도 정비 공사에 착수한다.
이궁인 창덕궁을 짓고, 개천을 정비했다.
경복궁 앞에는 관청을 세우고
운종가인 행랑을 만들어 시전을 열었다.
비로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수도 한성이 완성된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종각의 종이 스물 여덟번 울리고 성문이 닫힙니다.
이 시간이면 성 밖은 물론 성 안에서도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었는데요,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비록 양반이라 하더라도 곤장을 때렸다고 합니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통행 금지가 시행되었다는 것인데요
그만큼 수도 한성의 치안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수도를 결정하고 천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수도로 결정되기까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참 많았지만
한성은 조선 왕조의 명실상부한 수도로써 자리잡습니다.
왕권의 상징인 도시,
이제 한성은 새 수도로써 새로이 600년의 역사를 써 갑니다."
- 고두심의 역사스페셜을 보고 (늘 복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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