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조정숙 기자]
"수상해 수상해…. 요즈음 바람났나봐~ 아침마다 어디를 그렇게 바삐 다니는 거예요?"
"아 네…. 바람난 여인 만나러 갑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10층 아주머니의 의심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뭔가에 홀린 것처럼 장비를 챙겨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야생화가 핀 산을 오르면
봄바람이 코를 간질이고,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나오는 새싹들의 아우성 소리에 귀가 열린다. 힘찬 새싹들 덕분에 고소한 흙냄새까지 덤으로 얻게 되니 바람나지 않고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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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송보송한 솜털이 노루귀를 닮았다하여 이름붙여진 노루귀, 고운자태가 앙증맞고 예쁜 청노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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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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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을 예쁘게 가꾸시는 1층 할머니는 "난 알아. 또 야생화 만나러 가는구나. 우리 집 앞 화단에 흰노루귀와
복수초도 피었어, 산으로 들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담으시구랴~. 그리고 전시회 하면 꼭 나도 불러주고~" 하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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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노루귀이른 아침이라 아직 피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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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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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노루귀2시간이 지나자 조금 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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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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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핀 야생화를 찾아 담는 맛. 기다림의 수고가 주는 희망과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들을 만끽하기 위해 들로 산으로 마구 쏘다니는 나를 보며 어르신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도 했다.
봄이 네게 주는 선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피어나는 아주 작은 꽃들이 자꾸만 나를 유혹하니 그 녀석들에게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행여 밟힐세라 조심조심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며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숲 속을 들여다보면, 낙엽을 뚫고 나온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가 미세한 바람에도 온몸을 떨며 흔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꽃을 보면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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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레지바람난 여인이 꽃말인 얼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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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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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레지얼레지 가족이 마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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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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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꽃망울만 맺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꽃들이 그사이 활짝 피어 시선을 멈추게 한다. 벌써 여기저기 몇몇 사진가들이 도착해 야생화를 찍는 모습도 보인다. 꽃이 어찌나 작은지 바짝 엎드려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작품을 담기에 여념이 없는 사진가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조심스럽게 꽃을 찾아본다.
꽃말이 '바람난 여인'인 얼레지가 활짝 피어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보라색 꽃잎을 모두 들춰 속살을 보여주는 얼레지의 유혹, 빠지지 않고 버틸 수가 없다. 그 자태를 보면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데다 멜랑꼴리한 색감 때문에 더욱 더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마치 노루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노루귀, 노루귀는 분홍노루귀와 흰노루귀, 청노루귀가 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색감이 청노루귀다. 청노루귀는 자생하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에 사진가들은 청노루귀를 찍기 위해 경기도 가평에 있는 한 산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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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와 청노루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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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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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이 지나자 청노루귀가 조금 얼굴을 보여 주었다. 얼레지는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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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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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발견한 청노루귀를 찍기 위해 바짝 엎드려 있는데 저만치에 기이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고 꽃망울만 맺힌 상태로 마치 소곤소곤 속삭이며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얼레지와 노루귀가 서로 마주보고 있지 않은가. 어울리지 않는 만남, 이것들이 바람났나?
"심봤다" 속으로 외치며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려본다. 녀석들이 언제 필지 알 수가 없어 마냥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이 시작된다. 2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다. 아무리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하지만…. 잠시 녀석들을 뒤로 하고 근처를 살펴보기로 했다. 얼레지, 현호색, 노루귀도
너도바람꽃도 군데군데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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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바람꽃이른 봄에 피기에 보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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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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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더 오르자 여기저기 사진가들이 땅에 엎드려 사진을 찍고 있다. 얼레지가 지천이다 보니 조심들 한다고 하지만 간혹 발에 밟히는 경우도 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야생화를 찍는 사람들은 항상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발걸음을 조심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산행도 하고 야생화들을 만나다 보니 얼추 5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지금쯤은 피었겠지 하는 마음으로 '연애하고 있는 얼레지'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얼레지는 그대로 있고 청노루귀만 수줍은 듯 살짝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활짝 핀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내려오는데, 어혈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어서 여성의 월경이상을 치료한다고 하는 현호색과 얼레지 가족들이
봄나들이 나와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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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혈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어서 여성의 월경이상을 치료하고 한다고 한다. 색감이 예쁜 현호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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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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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 사이에 피어 있는 돌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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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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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봄이라 하지만 7시간가량 야생화의 매력에 푹 빠져 전투하는 자세로 사진을 찍다보니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잠시 멈춰 땀을 식히는데 돌단풍이 커다란 바위 사이에서 씩씩하게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맺은 채 시원한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꽃을 피울 때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눈을 돌리면 군데군데 보물들이 가득한데 봄바람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야생화는 전투 자세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야생화를 찍는 날은 온몸이 모두 아프지만 오늘도 나는 카메라를 들쳐메고 '어느 산을 찾아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