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일보 / 2012.7.9(월요일)자
詩가 있는 풍경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나 주고
- 허영둘
봄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밀린 방값과 한숨을 지불하고도 눈물이 남아 손톱만한 달을 샀다 창문에 우표같은 달을 붙이고 부치지 못할 마음을 접으면 손톱이 욱신거렸다 강으로 달려갔으나수만 마장을 풀어내는 두루마리 강은 내 손가락 하나를 묶지 못했다 매화꽃 가득실은 기차가 하루 두 번 지나갔는데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마침표처럼 맺히는 계절이므로 환시幻視라는 것을 알았다 강의 발원지를 거스르며 꿈을흠뻑 적신 아침이면 손으로 문지르는 것마다 붉게 물이 들었다
칸나는 그때 문득 피었다
붉은 것은 울컥거리는 습성이 있어 좁은 울을 어지럽혔고 태양은 칸나의 목젖을 자꾸만 자극했다 야생마처럼 폭우가 밟고 가는 동안에도 칸나의 토악질은 멎지 않았다 치명적으로 뜨거운 여름이었다
허천난 속을 안고 강으로 간다 무럭무럭 커가던 강도 수척해 있다 가을이 주춤주춤 산마루를 내려온다 발가락이 축축이 젖어오고 강물이 삼투압처럼 스며들어 정수리가 아뜩하다 가벼운 취기에 돌아보니 구름이 젖은 솜처럼 수면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저 구름처럼 혼미해질 때까지 강을 퍼먹지 않아도 조금씩 흔들리는 계절이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나 주고 산그림자처럼 무심하고 싶은 저녁이다
◆시 읽기◆
가랑잎 구르는 소리나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가을, 그리움이 짙어지며 엷은 우수에 물들기도 하고, 차분해지는 소멸과 성숙의 계절,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를 생각해보게 되는 계절이다.
시인에게 추억이란 흔들림과 아픔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꿈과 그리움, 연민 따위로 흔들린 날들, 손으로 문지르는 것마다 붉게 물들었다. 칸나가 문득 피었던 청춘의 열정도 그리고 붉은 것에 울컥거리는 습성조차 그리움이고, 방황이고, 아픔이었다고 한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사물이 윤곽이 뚜렷해지고, 흔들림의 발원지를 거스르지 않아도 조금씩 흔들리는 가을이 산마루를 주춤주춤 내려오는 저녁, 시인은 가을서정에 무심코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리움이고 아픔이었던 추억의 계절,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게나 주고, 산그림자처럼 무심하고 싶다는 것이다.
상상속의 상상과 낯선 문체의 형상화로「어디에 있든 자유로우라」팃낙한의 어귀를 생각해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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