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찰순례

광주 무등산 원효사(無等山 元曉寺)

맑은물56 2012. 8. 1. 12:52

' 광주 무등산 원효사(無等山 元曉寺) '

▲ 원효암에서 바라본 무등산 동쪽 줄기


여름의 제국(帝國)이 슬슬 그 기세가 꺾이던 9월 첫 주말, 호남의 수부(首府)이자 우리나
라의 5번째 도시인 광주(光州)를 찾았다. 거의 3년 만에 발걸음을 한 광주,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광주를 한번도 찾지 않은 무심함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 일어난다. 앞으로는 부
산(釜山)만큼이나 자주 찾으리라 다짐을 하며 찾은 이번 광주 나들이에서 문을 두드린 곳
은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원효사이다. 원래는 다른 곳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광주에
발을 내리자 돌연 원효사로 목적지가 바뀌었다.

광주의 주요 관문인 광천터미널에서 원효사(무등산장)까지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
(광천동↔원효사)
을 탔다. 광주역과 옛 도청(문화전당역), 산수5거리를 지나 구불구불 고
갯길의 진수를 보이는 작고개를 오른다. 이 고개는 사방(四方)으로 몸집을 불려가는 광주
시내의 동쪽 확장을 막으면서 속세(俗世)와 자연세계의 경계 역할을 한다. 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무등산의 포근한 품에 안기게 되며, 고개 정상에 마련된 무등산전망대에 올라서면
인구 150만을 지닌 남도(南道)의 웅도(雄都) 광주시내가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온다.

고개에 오르면 대도시 광주의 풍경 대신 자연에 묻힌 전원(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옛 무
진주(武珍州)의 고성(古城)과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제4저수지, 충민사, 충장사 등의 다양
한 볼거리가 눈과 마음을 제대로 호강시킨다. 충장사(忠壯祠)에서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
어 4리를 들어가면 그제서야 산중에 자리한 원효사 종점에 이른다.

원효사 종점은 증심사(證心寺) 지구와 달리 주막 몇집과 주차장 외에는 별다른 시설은 없
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많지만 별로 번잡하지가 않아서 좋다. 종점에서 내려 서쪽을 두리
번거리면 속세와 불계(佛界)를 구분짓는 일주문이 보인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원효
사의 산문에 이르며, 절까지는 수레가 마음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도로가 깔려 있다.


▲ 원효사 일주문(一柱門)

문이라고는 하지만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기둥만이 있을 뿐 여닫는 문짝이 없다. 등산객과
답사객, 부자와 서민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맞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마음이자 대자연의 마음이다.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하여 만물의 영장을
외람되게 칭하는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을 절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아름
다울 것이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 원효사 부도군(浮屠群)

일주문을 지나 4분 정도 오르면 커다란 돌탑과 부도군이 나온다. 이름없는 중생들이 그들의
조그만 소망을 담으며 차곡차곡 올려놓은 돌이 이제는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다. 돌탑 좌측에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그들을 기리는 탑비가 심어
진 부도군이 있는데, 부도는 총 6기로 가운데 탑은 1927년 절을 중수한 원담화상(圓潭和尙)
의 탑이다.


▲ 원효사를 100m 앞두고

도군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원효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
진을 하면 원효사의 정문인 회암루가 나오며, 왼쪽은 무등산으로 오르는 산길로 원효사 후문
과 이어진다. 어디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직진이 더 빠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원효사의 내력(來歷)을 간추려보도록 하자.


♠ 신라 후기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무등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한 ~ 무등산 원효사(元曉寺)

원효사는 광주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 1187m)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오랜
산사(山寺)이다. 7세기 중반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그런 이유로 절의 이
름도 원효사이다. 허나 원효는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부터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 시절까지 신라 불교의 1인자로 거의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그 시절 광주는
옛 백제(百濟) 땅으로 백제부흥군의 활동지역이었다. 비록 660년에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
게 멸망하고 말았지만 백제의 땅이 신라의 그늘에 제대로 들어오기까지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
다. 그런 상황에 어찌 원효가 이런 위험지역까지 와서 절을 세웠겠는가..? 게다가 1980년 절을
발굴하면서 8~9세기에 만들어진 청자파편과 금동불상이 나와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보여주
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4~1339) 시절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한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수도했으며, 1597년 증심사를 중창한 승려 석경
(釋經)이 중창했다. 1636년 신원이 중수하고
다음해에 32불을 조성했다. 1789년과 1802년에 선방과 법당을 새로 짓고 1831년 단청불사를 벌
였다. 1894년에는 학산대사(鶴傘大師)가 관아(官衙)
에 절 중수를 호소하여 공사비를 지원받고,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고 한다.

왜정(倭政) 때는 1927년 원담화상이 중수하고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상당한 규모를
지니게 되었다. 허나 6.25전쟁 때 모조리 소실되면서 수백 년을 일구었던 가람이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전쟁 이전 이곳을 찾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쓴 심춘순례
(尋春巡禮)
에 왕년의 원효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법당과 범절이 당당한 일사(一寺)의 풍모를 갖췄다. 본존(本尊)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
자의 등에다 지운 대법고는 다른데서는 못 보던 것이다. 법당 오른편에 있는 영자전(影子殿)에
는 정면에 달마(達磨)로부터 원효. 청허(淸虛) 내지 서월(瑞月)까지의 초상화를 걸고 따로 영조
50년 갑오(1774)에 담양 서봉사(瑞鳳寺)에서 모셔 온 원효의 초상화를 걸었다. 나한전, 명부전,
선방, 칠성각 같은 것이 다 있고 불상도 볼만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名
刹)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 6.25전쟁의 가슴시린 상처 ~ 5층석탑 (대웅전 좌측 석축)

1954년 대웅전을 다시 지으면서 주춧돌 밑에서 고려 때 만들어진 금동비로자나불이 발견되어 모
셨으나 그만 1974년에 도난을 당했다. 1980년 법타가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를 세웠으며, 그 과
정에서 원효사의 찬란했던 옛 유물 수백 점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와 발굴조사를 벌였다. 1992년
개산조당과 종각, 회암루를 지어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비록 고색(古色)의 내음은 형편없이 씻겨 내려갔고, 절의 규모도 조촐하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무등선원, 회암루, 약사전 등 10여 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동부도(광주 지방유형문화재 7호, 아쉽게도 만나지 못함)와 만수사에서
가져온 동종이 있으며, 1980년에 발굴된 유물 가운데 32점(금동,청동불상 12점, 소조불두(塑造
佛頭) 18점, 동경(銅鏡) 2점)은 광주 지방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가
있다.

깊은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의 그윽함과 여유로움, 자연의 내음을 듬뿍 선사하며, 속세의 오염된
마음과 머리를 정화시키기에 그만인 곳이다. 특히 경내로 들어서는 회암루는 속인(俗人)들에게
활짝 개방되어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야기꽃이 쉬엄없이 피어나는 쉼터로 이곳에
서는 누각이 바라보는 정면(동쪽)으로 의상봉과 윤필봉, 누에봉이 바라보인다. 회암루에 앉아
풍경물고기의 잔잔한 음악소리와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번뇌를 시원하
게 털어버는 것은 어떨까?

※ 원효사 찾아가기 (2011년 10월 기준)
* 광주(광천동)터미널, 광주역(동측), 지하철 금남로5가역(1번 출구), 금남로4가역(2번 출구),
산수5거리에서 1187번 시내버스 이용 (15~25분 간격)
* 주말, 휴일에는 1187-1번 시내버스(원효사↔산수5거리)가 임시 운행된다. (60~80분 간격, 1일
10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원효사까지 접근 가능)
① 광주시내 → 산수5거리 → 지산유원지입구 → 제4수원지 → 충장사입구에서 우회전 → 원효
사종점 → 원효사 주차장

★ 원효사 관람정보
* 원효사의 오랜 보물인 동부도는 대웅전 뒤쪽 산에 있다. 절 뒷문으로 나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로 가면 동부도가 나온다. 이정표가 따로 없으므로 지나치기 쉽다.
* 원효사에서 늦재를 넘어 증심사로 내려갈 수 있으며, 사양능선과 용추3거리를 거쳐 입석대까
지 4시간 소요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 (☎ 062-262-0321)

▲ 개산조당 뒤쪽에 조그만 석불입상
허전한 머리와 오른손에 쥐어든 지팡이는
그가 지장보살(地藏菩薩)임을 알려준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예전에는 삼성각(三聖閣)의 기능을 하던
성산각(星山閣)이었다.


♠ 작지만 알차 보이는 원효사 둘러보기


▲ 절을 찾은 중생들의 포근한 휴식처 ~ 회암루(檜巖樓)

보통 외부에서 절 경내로 들어서려면 2층 규모의 누각 비슷한 건물을 지나야 되는데, 원효사는
회암루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1층은 뻥뚫린 공간으로 가운데에 경내로 올라서는 계단이 있으
며, 계단을 내딛으면 대웅전이 정면에 나타난다. 2층은 넓은 다락으로 거의 강당(講堂)의 역할
을 하고 있는데, 일반에게 개방되어 휴일에는 쉬었다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기둥에 기대거나 난간에 걸터앉아 조망(眺望)을 즐기는 사람들, 간혹
벌러덩 누워 꿈나라를 청하는 이들까지, 정말로 정겨운 풍경이다. 원효사를 찾은 그들에게는 이
곳은 그야말로 조그만 극락이다.


▲ 개산조당 우측에 자리한 무등산 호랑이상
호랑이는 산신(山神)의 심부름꾼이자 애완동물로 속인(俗人)들에게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돌에 새겨진 무등산 호랑이는 그에 걸맞는 용맹과 무서움은 온데간데
없고 호랑이의 탈을 쓴 귀여움이 묻어난 고양이를 보는 듯 하다.


▲ 조촐하고 간결한 모습이 인상적인 개산조당(開山祖堂)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사를 세웠다는 원효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개산조당에 담겨진 만수사 동종(萬壽寺銅鍾)
- 광주 지방유형문화재 15호
개산조당에는 300년 된 빛바랜 조그만 종이 소
중히 담겨져 있다. 이 종은 1710년 담양 추월산
(秋月山)에 있는 만수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주
상삼전하(主上三殿下)'란 명문이 있어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종의 아랫
부분에는 1954년 대웅전 중수를 도운 시주자 명
단이 적혀 있으며, 윗 부분에는 '옴'으로 발음
되는 범자(梵字)를 새겼다. 9개의 유두(乳頭)가
있는 4개의 유곽 사이로 보살입상을 배치했다.


▲ 대웅전 뜨락에 지장보살상과 금강역사(金剛力士)

자비로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부처의 경호원인 금강역사(金剛力士) 2인이 서로
반대의 방향을 주시하며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지장보살과 절을 지킨다. 그런데 이들은 경내의
한복판인 여기보다는 경내 한켠에 자리를 두는 것이 더 적당할 듯 싶다. 배치상으로도 조금은
어색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개산조당과 영산전 사이에 자리한 건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원효사는 지장보살상이 유난히도 많다.


▲ 원효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1981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모셔져 있다. 법당
뜨락에는 부처를 상징하는 석탑을 세우기 마련이나 원효사는 그런 것이 없다.


▲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3존불
조금 두툼해 보이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킨다.

6.25전쟁의 처참한 흔적 ~ 대웅전 좌측 석
축에 힘겹게 기댄 5층석탑

대웅전 뒤쪽과 좌측에는 법당을 만들고자 쌓은
오래된 석축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좌측 석
축에는 보기에도 안쓰러운 만신창이의 5층석탑
이 힘겹게 석축에 기대며 옛날을 그리워한다.

6.25이전에는 대웅전 뜨락에 당당하게 서 있었
으나 전쟁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저 자리에 둔 것이다. 옥개석(屋
蓋石)과 탑신(塔身), 기단(基壇)까지 전흔(戰痕
)이 지독하게 서려 그날의 아비규환을 짐작케
만든다. 1층 탑신에는 탑을 위로하려는 듯 중생
이 쌓아놓은 돌탑이 가득하며, 탑 옆에는 옛 주
춧돌과 석등이 심어져 있던 대석(臺石) 등이 나
란히 놓여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성보각(聖寶閣)으로 쓰였다.


▲ 무등산의 옥계수로 마를 날이 없는 감로정(甘露井)

▲ 감로정 동자상(童子像)

감로정에는 달고 맛있는 이슬과도 같은 옥계수가 콸콸 쏟아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제대로 해
소시켜준다.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이곳의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던지 몸속의 때와
번뇌가 제대로 씻겨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하다. 감로정에는 머리를 둘로 묶은 귀여운 동자상이
자신의 물병을 석조에 쏟아 붇느라 여념이 없다. 물병은 분명 작은데 그 안에서는 쉼도 없이 물
이 쏟아져 나오니 정말 요술 물병이 따로 없다. 그 주변으로 파란 바가지들이 돌에 기대 약간의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 회암루 앞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부드러운 곡선

이렇게 하여 작지만 알찬 원효사 경내를 모두 둘러보았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곳의 오랜 보
물인 동부도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를 보기 위해 절을을 나와서도 경내 주변을 한참이나 두
리번거렸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동부도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정말 무등산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그 아쉬움을
힘겹게 삼키며 원효사와 작별을 고한다.